수수수수퍼노바
처음 첫째 녀석의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나랑은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일 줄 알았다. 에스파가 토론토에 온다는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내가 총대를 메야하는 상황이었다.
8학년인 첫째는 어느 순간부터 K-pop에 빠져들었는데 마침 그 녀석의 베스티도 K-pop 마니아였다. 어쩌면 그 친구가 K-pop 마니아였기 때문에 이 녀석도 K-pop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내년 (2025년) 2월에 에스파가 토론토에 온다는 소식을 접한 그 두 녀석들은 반드시 그곳에 가야 했다. 문제는 우리 동네에서 토론토 다운타운까지 가려면 3시간 가까이 걸린다는 점이다.
당연히 두 녀석들끼리 그 먼 길을 갈 수는 없기 때문에 누군가가 그녀들을 데리고 가야 했다. 그 '누군가'가 될 후보 세 명은 다음과 같았다.
친구 녀석의 엄마
장점: 장거리 운전 가능
단점: 3살짜리 동생이 있어 집을 비우기 불가능, K-pop에 대한 이해 부족
우리 와이프
장점: 모르겠다... 아! 인맥! (글 후반부에 진가가 나옴)
단점: 장거리 운전 불가, 8살 5살짜리 동생들이 있어 집을 비우기 불가능, K-pop에 대한 이해 부족
나
장점: 장거리 운전 가능, 2/3번은 엄마가 1번은 아빠가 담당 가능, K-pop에 걸그룹에 대한 이해 높음
단점: 에스파보다는 뉴진스가 좋은데...
다른 후보들은 후보 사유 부적격으로 내가 당선이 되었고, 우리들의 긴 여정은 2024년 10월 티켓 사기로부터 시작되었다.
연극이나 뮤지컬 말고, 실제 가수들의 콘서트에 마지막으로 가 본 것이 언제인지 생각을 해보니 2001년 CB Mass의 콘서트가 분명했다. CB Mass의 2집 발매 기념 콘서트였는데 그때는 커빈과 최자, 개코의 사이가 틀어지기 전이었다. 마침 함께 공연에 간 친구 중 한 명이 최자와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었다. 최자가 일 년 선배라서 학교에서 자주 봤다든지, 자기 주변 사람들이 최자랑 친하다던지, CB Mass가 Critical Mass라는 뜻이 아니라 원래 커빈 매스(*)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참 흥미진진했다.
(*) 이때가 2001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 친구는 정말 핵인싸였나 보다.
특별히 좋아하는 가수가 있거나 음악을 엄청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서 그 이후에는 콘서트에 갈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한국 노래들을 계속 듣기는 했다. 달리기를 하거나 운전을 하다가 졸릴 때 듣기에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온갖 걸그룹들의 노래를 들어왔다고는 하지만 에스파의 노래들은 도대체 적응이 되지 않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겠고, 노래들이 하나같이 HOT의 전사의 후예 느낌이 나서 영 별로였다. 같은 SM이라도 나는 레드벨벳이 좋은데 말이다.
가사도 이게 뭔지 싶어 헛웃음이 나오고는 했다.
우리는 어디서 왔나 오 에
라는 가사를 들을 때면, '어디서 오긴 어디서 와 서울에서 왔겠지'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에스파 공연을 보러 가자니 영 탐탁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부모 된 입장에서 딸 녀석 소원 하나는 들어주어야 했기 때문에 두 말 없이 표를 예매하기로 하였다.
2024년 10월. 대망의 예매일이 찾아왔다. 딸 녀석은 일반 예매일 보다 일찍 예매를 할 수 있다는 에스엠 뭐시기에 가입했으면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거기까지는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그냥 예매해도 된다고 말을 했다. 물론 그때는 표를 예매하는 것조차 이렇게 힘든 일인지 몰랐다.
예매 시작 십 분 전쯤부터 접속을 해서 기다리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되자마자 내 눈앞에 뜬 대기 번호는 놀라울 뿐이었다. 공연을 하는 장소가 아무리 많아도 2만 명 정도 입장할 수 있는 곳일 텐데 10545번이라니! 이러다가 표를 못 사기라도 한다면 큰일이라는 생각에 조금 더 일찍 접속할 걸 후회가 되었다.
좀처럼 대기 숫자는 줄어들지 않다가 십 여분이 흐른 뒤에야 겨우 입장을 할 수 있었다. 입장을 해서도 난리였다. 자리를 고르고 결제를 하려고 하는 그 짧은 사이 자리들이 없어졌다는 메시지가 뜨는 것이었다. 그럭저럭 괜찮은 자리를 골랐다고 생각해서 결제를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선택된 자리는 살 수가 없다고 하니 순간 패닉에 빠졌다. 그래서 일단 선택할 수 있는 자리 중 세 개가 붙어있는 자리를 아무거나 막 고른 후 결제를 했다. 이층 어딘가의 자리였는데 뭐 내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했다고 위로를 할 뿐이었다.
시간은 느리지만 천천히 흘러 영영 오지 않을 것만 같던 그날이 드디어 찾아오고 말았다. 그날과 함께 토론토에는 엄청난 폭설도 찾아왔다. 밤사이 거의 30cm의 눈이 내렸다. 하지만 나는 두 녀석들을 차에 싣고, 그 많은 눈을 뚫고, 토론토에 도착하였다!
우리의 자리는 코피가 난다는 저 높은 곳의 좌석이었지만 공연 며칠 전 와이프 친구분이 뭔가 엄청난 힘을 써주셨다. 그분에 따르면 공연 며칠 전 메일이 갈 것이라고 하였는데 정말 이틀 전 VIP Nation이라는 곳에서 메일이 왔다. 메일 내용을 보니 미리 입장을 한 후 사운드체크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이때까지 '사운드체크'라는 것이 뭔지도 몰랐다).
그전까지는 한 겨울에 녀석들을 데리고 콘서트에 가는 것이 너무 고생스럽다는 생각뿐이었지만, 이 메일을 받았을 때부터는 뭔가 VIP라도 된 기분이라 (딸에게는 말은 안 했지만) 나도 몰래 엉덩이가 들썩거리기는 했다.
LA의 엘리 씨. 이 글을 읽게 된다면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메일에 따르면 두 시부터 체크인이 가능하다고 하여 두 시 반쯤 도착해서 체크인을 하였다. 나는 체크인을 하면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VIP들에게도 문은 네 시에 열리는 것이었다. 내가 기다릴 테니 녀석들에게는 돌아다니면서 뭐라도 사 먹고 오라고 했다.
한 시간 반 동안 서서 기다리고 있으려니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싶었다. 네 시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었으면 먹을 것을 들고 왔을 텐데 그것을 몰라서 빈손으로 왔었다. 운전하느라 점심도 제대로 못 먹은 상태였기 때문에 무척이나 배가 고팠다. 효성이 가득한 딸 녀석이라면 기다리는 아빠를 위해서 먹을 것을 사 올 법도 한데 녀석들은 그저 에스파 생각에 빠져서...
기다리면서 주변을 살펴보니 에스파가 대단하긴 했다. 공연이 시작하려면 아직도 몇 시간이나 남았는데 벌써부터 줄을 서있는 사람이 엄청 많았다. 인종을 보니 중국 사람들이 70%, 서양 사람이 20%, 기타 사람 (서남아시아 등)이 10% 정도로 보였다. 도대체 이 많은 중국 사람들은 광야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그 노래들이 정말 좋은 것일까 혼자 궁금해했다.
네 시가 되어 입장을 했지만 또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우선 멀치(Merch, 한국에서는 굿즈라고 할 듯)를 사야 했기 때문에 줄을 서야 했다. 딸 녀석은 인터넷에서는 매진되어 구할 수 없었던 응원봉을 사야 했다. 그리고 후디도 사고 싶어 했는데 엄마가 안된다고 했는지 내 눈치를 보았다. 나는 뭐 여기까지 왔는데 일단 사고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 뭐 있나. 사줘야겠다고는 이미 마음을 먹었지만 막상 눈앞에 펼쳐진 옷들을 보니 (너무 거지 같아서) 참 슬펐다.
그래 이것은 후디를 사는 것이 아니라 기쁨을 사는 것이다라고 생각을 고쳐 먹으니 마음이 편해졌다.
멀치를 사고 나서 공연장에 입장을 하는 줄을 서야 했는데 도대체 우리는 어디에 줄을 서야 할지 몰랐다. 다른 사람들을 보니 VIP 티켓을 예매한 후 자기 자리에 앉아서 사운드체크를 보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우리는 저 꼭대기에 위치한 자리에서 지켜보는 것은 아닐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어디에 줄을 서야 할지 몰랐다 (위로 올라가는 계단 자체를 막아 놓았다).
안내를 하는 사람에게 우리는 일반 표이긴 한데 어디로 가면 좋을지 물어보았다. 그 사람은 표를 보더니, 아... 혹시 게스트 리스트에 있는 것이냐고, 조세핀의 게스트구나라고 말을 하는 것이었다. 조세핀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맞다고, 그 사람 이름이 조세핀이었던 것 같다고 맞장구를 쳤다. 그러자 맨 앞자리 남는 자리가 있으니 거기에 앉으면 되고 사운드체크가 끝나고 원래 자리로 가면 된다고 하였다.
기나긴 기다림 끝에 찾아간 자리는 정말 놀라웠다. 무대 바로 앞의 자리였는데 다른 사람들의 표는 도대체 얼마나 비쌀지 궁금했다. 아마 그래서 VIP 줄에서 기다리던 사람의 70%가 중국 사람이었겠구나 싶었다.
드디어 무대 뒤에서 에스파가 나왔고 사람들이 비명도 터져 나왔다. 내 옆의 두 녀석들도 완전히 난리가 났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이었으면 우리도 뭔가 준비해서 눈 맞춤을 당했어야 하는데 아쉬웠다. 중국 사람들 사이에서 태극기라도 흔들었으면 꾸러기 녀석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을 텐데 아쉬웠다. 에스파는 사운드체크에서 총 세 곡을 불렀다. 십오 분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녀석들 데리고 먼 길까지 왔는데 참 좋은 경험을 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했다.
그렇게 짧지만 강렬했던 시간을 뒤로하고 우리는 그 자리에 계속 남아있을 리얼 VIP들을 뒤로한 채 저 높은 곳에 있는 우리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내가 좋아하는 문장인 '삼나무 높은 우듬지까지 올라본 까마귀, 다시는 뜰로 내려앉지 않는 법'이 오늘만은 틀린 말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자리는 일반석이지만 한 때 우리도 VIP였다는 생각에 VIP 목걸이만은 내려놓지 않았다.
나는 갑자기 다가 온 현실에 뭔가 우울했다. 조금 클릭을 빨리해서 더 좋은 자리를 사줄걸 후회가 되었다. 하지만 녀석들은 자리가 어디든 그저 신이 났다. 우리 뒤로는 20열 정도밖에 없었지만 녀석들은 저기 위에 앉은 사람들은 하나도 안 보이겠다며 그저 좋아했다. 참으로 긍정적인 녀석들이 아닐 수 없었다.
벌써 5시간 넘게 기다린 상태였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공연이 시작하기 전부터 피곤이 몰려왔다. 벌써 좋은 구경은 다 했으니 빨리 시작해서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공연이 시작되니 또 달랐다. 에스파가 나올 때마다 사람들이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대는데 나도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몰래 그들이 멋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심지어 뮤직비디오를 통해서 볼 때는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던 춤들도, 예를 들어 블랙맘마의 뱀 춤, 그것을 보면서 사람들이 소리치고 환장하는 것을 보고 있으니 사실 이것은 정말 대단한 것이다라고, 마치 한 마리의 뱀을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평소 같으면 비웃었을 '어디서 왔나 오 에'라는 가사도 정말 어디서 왔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마지막 결정타는 그것이었다. 사실 들어본 적도 별로 없는 카리나의 Up. 가사를 들어보니 Spice it up이라고 하던데 그래서 그런지 나에게는 그저 후추통을 돌리는 것으로 보이는 바로 그 춤사위! 그것을 보면서 나는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