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움 주의
가족들과 아래 동네(미국)로 주말여행을 가다가 갑자기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있었던 일인데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다. 더럽고 충격적인 이야기이니 비위가 약하신 분들은 거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금은 학생이 줄어서 그러려고 해도 그럴 수 없겠지만, 한 반에 학생수가 50명도 넘었던 90년대에는 학생들이 반 청소는 물론이고 학교 구석구석을 직접 청소해야 했다. 음악실, 교무실, 체육관, 화장실 등도 물론 학생들이 청소를 해야 했는데 반 마다 돌아가면서 구역을 담당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1교시가 시작되기 전 친구 한 명이 다급하게 교실로 뛰어 들어오며 외쳤다.
어떤 미친 XX가 변기에 똥을 쌌어!
변기니까 변기에 똥을 싸지 무슨 저런 똥 같은 소리를 하는 거지? 하지만 그의 다급한 목소리와 당황한 표정을 본다면 이것은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친구들이 무슨 소리냐며 채근하자 다시 외쳤다.
어떤 미친X이 소변기에 똥을 쌌다구!!
아.. 이건 또 무슨 X소리란 말인가! 우리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알아차렸기 때문에 교실 전체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정말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소변기에 똥을 쌌다고 치자. 근데 그 주 화장실 청소 담당은 누구란 말이지? 바로 우리 반이 아니었던가! 당시 (본의 아니게) 반장이었던 나는 알 수 없는 책임감에 우선 화장실로 향했다.
아이들과 함께 도착한 화장실은 내가 그때까지 본, 아니 나이가 사십이 넘어버린 지금까지 봤던 화장실 중에서도 가장 처참했다. 보자마자 도대체, 도대체 어떤 인간이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것은 분명 누군가가 우리 반에 엄청난 원한이 가지고 있지 않고서야 결코 벌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어제 집에 갈 때까지만 해도 문제가 없었던 화장실이었는데, 밤 중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지!
당시 우리 학교의 구조는 대충 이랬다. 1학년 교실은 5층에 모여있었고 2학년 교실은 4층에 모여있었다. 남자 화장실은 복도 끝에 위치한 계단을 반층 내려가면 층마다 하나씩 있었다 (건물이 'ㄱ' 같은 모양). 그래서 1학년들은 주로 반층을 내려가서 화장실을 이용했다. 2학년들도 대부분 반층을 내려가서 화장실을 이용했는데 굳이 반층을 올라와서 1학년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는 멋진 형들도 꽤나 있었다.
어쨌든 화장실로 들어가 보면 왼쪽으로는 세면대가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소변기들이 보인다. 그리고 그 사이를 지나야 앉아서 큰 일을 볼 수 있는 변기들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런데 어떤 미친 인간이 화장실 입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소변기에 똥을 한가득 싸놓은 것이었다. 정말 양도 묵직했고 색깔도 묵직했다. 그 옆에는 버려진 팬티도 보였다.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세면대 위에 붙어있는 거울에도 똥이 묻어있었다.
처음에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천천히 주변을 살펴보니 머릿속에 대충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려지기 시작했다.
'어떤 미친 인간'이 몇 걸음만 더 걸으면 다다를 수 있는 변기를 앞에 두고 굳이 가장 끝에 있는 소변기에서 바지를 내리고 큰 일을 본다. 무척이나 시원하다고 생각을 한다. 내려갈 곳이 없는 소변기에 일을 봤으니 그 시원함은 배가 되었을 것이다. 화장지가 없으니 일단 팬티를 벗어서 엉덩이를 닦는다. 똥 묻은 팬티를 들고 갈까도 생각했지만 냄새가 심하니 그냥 버리고 가기로 마음을 먹는다. 바지가 내려간 상태로 움직여야 하니까 먼 길은 갈 수 없다. 펭귄처럼 뒤뚱뒤뚱 두 걸음을 걸어 세면대로 향한다. 워낙 양이 많았으니 팬티로 닦다가 손에 묻었나 보다. 물로 손을 씻기 전에 굳이 거울에 손을 쓰윽 쓰윽 두 번 닦는다. 별 의미는 없는 행동이지만 다잉메시지같이 수사에 혼란을 주기는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수도꼭지를 틀어 물로 마무리를 한다. 다시 바지를 올리고 웃으며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그날 우리들은 슬펐다. 우리는 적절한 청소 도구도 없이 소변기에 들어있는 거대한 물체를 들어 올려야 했고 (생각해 보면 이런 일을 하기에 적절한 도구가 애초에 있을 리가 없긴 했다), 똥 묻은 팬티를 버려야 했으며, 거울에 묻어있는 흔적을 지워야 했다.
처음에는 이런 일을 벌인 사람을 꼭 잡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범인을 찾을 수는 없었다. 분명 사람들의 눈이 적어진 야자 시간 중 발생한 일인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전날 야자 시간 중 특별한 행동을 보인 사람은 확인되지 않았다.
사건은 그렇게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갔고 범죄는 미궁에 빠지게 되었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르고 이 사건은 그저 술자리에 좋은 이야깃거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그렇다. 남자들끼리는 이런 것이 '좋은' 이야깃거리다). 그래도 이 지저분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어떤 미친 인간'은 도대체 왜 그런 짓을 벌인 것인지, 그 이유가 정말 정말 궁금했다. 하지만 내가 그 진실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느 날 고등학교 일 년 선배들과 술자리를 가질 일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 사람들을 만나면 언제나 그랬듯 즐겁게 그 사건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더니 한 선배가 갑자기 엄청나게 놀라운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사실 자기는 누가 그 일을 벌인 줄 알고 있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그날의 진실은 이랬다.
'자기 친구' 중 한 명이 야자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배가 너무 아프기 시작했다고 한다. 조금 참아봤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급하게 화장실로 달려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너무 급했던 나머지 변기까지 다다르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일단 바지를 내리고 소변기에 앉아서 일을 보았다고 했다. 일단 싸기는 했지만 본인도 너무 당황한 나머지 팬티로 뒤처리를 하고 재빨리 자리를 떴다고 했다.
나는 나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 당신은 범인을 알고 있다고? 우리가 그렇게 똥을 치우고, 똥 묻은 팬티를 치우고, 똥 묻은 거울을 닦고 있을 때에도 당신은 범인을 알고 있었다고? 나는 도대체 그 친구가 누구냐고 이름이라도 알자고 그 선배를 다그쳤다. 갑자기 정색을 하고 물어보는 내 모습에 당황을 했는지 그 선배는 누군지 말해 줄 수는 없다고 했다. 재차 물어보았지만 그것은 그 사람의 인생이 달린 문제라 말해 줄 수 없다며 굳게 입을 닫았다. 더 이상 물어보기에는 분위기가 어색해질 것 같아서 다른 주제로 말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자기 친구'가 왜 2학년들이 많이 가는 화장실이 아니라 1학년들 화장실에서 그런 참사를 일으켰는지, 차라리 청소하기 편하게 바닥에 싸지 왜 소변기에 쌌는지, 물로 닦으면 되지 굳이 거울에 똥 묻은 손을 닦았는지, 그날 팬티 없이 집으로 돌아가서 엄마에게 혼나지는 않았는지 등등 디테일은 부족했지만 그래도 그 선배의 말이 그날의 진실에 가까웠다고는 생각한다.
그래도 그런 의문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 선배가 알 정도라면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몇 명 정도는 알고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누가 했다는 소문 정도는 나지 않았을까? 정말 '자기 친구'가 그랬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