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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검사 Mar 31. 2022

오랜만에 땡땡이

살다 보면 그런 날이 있다. 별 것도 아닌 일이 계기가 되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향하게 되는 날 말이다. 예전 대학교에서 교양수업으로 들었던 수업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30년 정도 함께 산 부부였는데 갑자기 남편이 이혼을 하겠다고 했단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이유가 조금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내가 치약을 끝에서부터 짜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도 처음에는 땡땡이를 칠 생각은 없었다. 여느 평일과 마찬가지로 막내를 어린이집에 내려놓으러 가고 있는데 와이프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와이프도 일을 나가려고 하는데 차고의 문이 닫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집 차고 문에 달려있는 센서가 가끔씩 말을 안 들어서 문이 안 닫히는 경우가 있는데 오늘은 하필이면 출근을 해야 할 때여서 마음이 급해졌나 보다. 고치는 것이야 몇 분 걸리지 않으니 내가 우선 집으로 빨리 돌아가서 그것을 고치고 일을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에 돌아와서 보니 역시 센서가 문제였다. 차고 문의 센서는 양쪽에 하나씩 달려있어서 하나는 신호를 주고 하나는 신호를 받는다. 그런데 센서가 다른 물건에 살짝 부딪히면 방향이 약간 틀어져서 신호를 제대로 받지 못해서 문이 안 닫히는 경우가 있다(*).

(*) 차고 문은 매우 무거워서 사람이 깔려서 크게 다칠 수 있기 때문에 센서가 필요함


센서 사이가 2m 정도 떨어져 있기 때문에   틀어진 경우 그냥 눈짐작으로 둘을 정확히 일치시키게 만들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레이저 레벨기를 이용해서  센세의 높이를 맞춘  한쪽을 조금씩 움직여 가며 일치시킨다. 이번에도 손으로 맞추려고 하니 역시나  안되어서 레벨기를 가지러 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안은 무척이나 따뜻하고 좋았다. 벌써 3 말이지만 올해는 날씨가 정말 이상해서 밖은 영하 12도라 매우 추웠기 때문이다.


레벨기를 가지고 다시 밖에 나가서 센서를 고치고 있으려니 손도 시리고 너무 추웠다. 3월 들어 최고 기온이 10도 정도까지 올랐다가 다시 추워진 것이라 그런지 한 겨울보다 훨씬 더 춥게 느껴졌다. 역시 옛날 말은 괜히 나온 것이 아니어서 대한이 소한네 집에 놀러 갔다가 얼어 죽는다는 말은 참 일리가 있다. 대한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놔둔 소한이도 독한 놈이긴 하지만.


어쨌든 날도 너무 춥고 일은 가기 싫고 해서 오랜만에 땡땡이를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7년 전 캐나다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일자리를 찾는 것이 나의 지상과제였다. 모르는 곳에 가서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정말 나의 성격에 맞는 일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밥 벌어먹고살 길을 찾아야 했기 때문에 취업 박람회, 세미나, 엔지니어 협회, 이민 정착 기관 등등을 찾아다녔다.


한 번은 취업 박람회에 갔는데 말 그대로 캐나다에 온 지 삼일밖에 안되었을 때였다. 행사 안내 포스터에 본인의 이력서를 지참하라고 쓰여있었는데 한국에서 출발한 이삿짐이 짐이 도착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프린터도 없었다. 그래서 구글 지도에서 복사집을 찾아서 이력서 10부를 출력했다.


행사 당일이 되어서 박람회장을 찾아가 보았는데 뻘쭘하기 그지없었다. 이 나라의 모든 것이 생소한데 영어로만 이야기를 해야 하니 더 고역이었다. 그래서 회사 부스에 가서 말도 붙여보지 못하고 행사장만 계속해서 뱅글뱅글 돌았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뭐라도 이야기는 하고 가야 할 것 같아서 두세 군데 부스에 가서 말을 걸어보았다. 하지만 누가 봐도 완전 초짜인 나를 상대해 줄 사람은 많이 없었다.


결국 한 곳에서 길어야 1~2분 정도 말을 하고는 이력서는 한 군데도 주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집으로 돌아와서 제출하지 못하고 다시 들고 온 나의 이력서를 보니 여기저기 오타가 보였다. 그렇게 고치고 고쳤는데도 오타가 있구나 생각하며 안 주고 돌아오기를 잘했다 생각했다. 물론 받아주는 곳도 없기는 했지만.


또 한 번은 취업 세미나에서 들은 대로 내가 가고 싶어 했던 회사에 무작정 찾아가 보았다. 강사의 말로는 밑져야 본전이니 회사에 찾아가 자기를 어필하고 정보도 받으라는 것이었다.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찾아간 것이었는데 막상 회사 문 앞에 서니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말 사무실 문 앞에서 들어갈까 말까 수 십 번 고민을 했지만 이번에도 여기까지 왔는데 일단 들어가 보기는 해야겠다는 생각에 결국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내를 하는 사람이 무슨 일로 오셨냐고 물었고 나는 여기 회사에 관심이 있는데 혹시 내가 일하는 분야의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 볼 수 있을지 물어보았다. 그 사람의 반응이 어땠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어쨌든 사람을 불러줄 테니 로비에서 조금 기다리라고 하였다.


조금 있다가 안쪽에서 엔지니어가 한 명 나왔고 4~5분 정도 이야기를 했다. 이곳에서 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주 보일러 검사원 시험 등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그 엔지니어는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대부분 추상적인 말들만 해주었는데 놀랍게도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만 되는 말도 있었다. 그에 따르면 주 검사원 자격증 시험에 필요한 책자는 모두 원본이 필요하고 낙서, 밑줄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곧 시험을 볼 예정이었는데 이렇게 중요한 정보를 모르고 있었구나!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적어도 한 가지 중요한 정보는 얻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밑줄을 너무 많이 쳤던 책자는 정부에서 운영하는 서점(Queen's Print)까지 찾아가 다시 사기까지 했다. 나중에 보니 그냥 정부 홈페이지에서 PDF 파일 받아다가 출력하면 되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그래도 생각해 보면 그 사람도 일하느라 바쁘고 나오기 싫었을 텐데 나와 같은 사람을 만나 준 것 자체가 고마운 일일 것이다.




그때를 돌이켜보면 일자리 찾느라 고생했네 싶으면서도 어느새 15년 정도 비슷한 일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요즘은 그저 놀고만 싶다. 특히 내가 담당하는 곳은 머리를 많이 써야 하는 일들도 별로 없고 바쁘지도 않아서 더 그렇다. 은근히 이게 악순환인데, 평소에는 일이 별로 없으니 시간이 남아서 놀게 되고 일이 조금이라도 많으면 일이 많아서 더 놀고 싶어 진다.


결국 센서를 고치고 집으로 들어와 검사를 가기로 했던 곳에 전화로 오늘은 사정이 있어서 내일 간다고 이야기를 하였다. 그렇다. 한 군데만 갔다 오면 되는 날이었다. 사실 처음부터 다음날 가도 되는 곳이니 땡땡이를 칠 생각을 한 것이다. 그리고 회사에다가는 적당한 사유를 만들어 비상 휴가를 올리고는 회사 유니폼을 벗었다.


그래도 집에 있다 보면 은근히 바쁘다. 휴가이긴 하지만 평일이라 메일 들어오는 것에도 답을 해주어야 하고, 아이들 없는 사이에 마당일도 조금 해야 하고, 도서관에서 책도 반납하고 빌려와야 하고, 코스트코에서 장도 봐야 하고, 그래도 한 겨울보다는 따뜻해졌으니 다시 밖에 나가서 달리기도 해야 한다. 이렇게 하루가 참 빨리 지나가니 일을 할 시간이 부족한가 보다.






아내가 치약을 끝에서부터 짜지 않아서 이혼을 결심했다던 남자는 사실 아내가 평생 동안 자기의 말을 존중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혼을 결심했다고 한다. 치약을 끝에서부터 짜라는 단순한 부탁도 들어주지 않는데 다른 것은 어떻겠냐며.


나도 단순히 추운 날 차고의 센서가 고장 나서 땡땡이를 치겠다고 결심한 것이 아니다. 더 크고 근본적인 이유, 예를 들어 최근 새로 받은 회사 차량에서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지 '엉뜨' 기능이 빠졌는데 웃기게도 '엉뜨' 버튼은 그대로 남아있어서 날도 추운데 버튼을 계속 누르며 왜 안 켜지지, 새 차인데 고장이 난 것인가, 혹시 배터리가 부족해서 그런가 조금 달리다가 다시 눌려봐야지, 다시 눌러도 안되네, 아니 망할, 이거 얼마나 한다고 날도 추운데 옵션을 빼버리나 이 망할 놈의 회사, 월급도 더럽게 조금 주면서..., 그런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Full disclosure: 나는 와이프에게 항상 엉뜨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런데 막상 없어지고 나니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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