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림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1 자전거 탈 때 음악 듣는 것을 좋아한다. 눈여겨 봐두었던 블루투스 스피커를 얼마 전 큰 맘 먹고 샀다. 새로 들여온 브롬튼 자전거와 잘 어울렸다. 작은 크기치곤 음질이 뛰어났다. 마음에 들었다.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았는데, 잃어버렸다. 처음부터 자전거 프레임과 연결하는 고리 부분이 고무로 되어 있어 약해 보였다. 길거리 어딘가에서 풀어지면서 떨어진 모양이다. 그렇게,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내가 잠시 사랑했던 스피커는 사라져버렸다.
#2 생각해 보니, 잃어버림은 늘 일어나고 있었다. 단지, 스피커만이 아니었다. 주의력결핍과다행동장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산만한 나는, 많은 것들을 잃어버린다. 잃어버린 텀블러가 몇 개인지, 잃어버린 마우스가 몇 개인지는 셀 수도 없을 정도다. 가끔은 사람도 잃어버린다. 사람을 잃는 방법은 보다 다양하다. 상처주는 말로 잃어버리고, 무관심으로 잃어버리고, 아주 가끔은 과도한 관심으로 잃어버린다.
#3 어렸을 때에는 잃어버림이 두려웠다. 내가 애써서 얻은 것들이 사라져 버리고 난 후 허전한 마음은, 차디찬 땅바닥 같았다. 다시 두 발을 딛고 일어서야 했지만, 싸늘한 그 느낌이 싫어서 그저 웅크리고 있기도 했다. 사람을 잃고 나면 더 힘들었다. 함께 쌓았던 과거의 기억들이 더 이상 나눌 사람 없이 나의 두뇌 구석 어디에선가 지직거리는 전기신호로만 존재하게 된다는 생각이 싫었다. 그래서, 끊임없이 사진을 찍고, 글을 쓰고, 뭔가 현실세계에 물증을 남기려 했다. 너는 나에게 노이즈가 아니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4 무언가를, 누군가를 잃어버리고 나서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휴대용 블루투스 스피커를 잃어버리면 자전거 타면서 음악을 듣지 못한다. 사람을 잃고 나면 그 사람이 보여줬던 다른 세상을 더 이상 만날 수 없다. 밀접한 관계로 오랜 시간을 보낸 경우에는 문제가 더 크다. 잃어버림이 주는 아픔이 예외없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5 그런데 진짜 두려워했던 것이 그런 것 뿐이었을까? 잃어버림의 보다 깊은 감정은 물건에 대한 소유욕을 포기할 때가 왔다거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은 욕망이 좌절당했다는 것보다는 한 발 더 나아간 부분이 있다. 물건이나 사람들은, 단지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을 열어주는 연결고리이고, 내가 스스로의 힘으로는 풀지 못하는 문제들을 풀어주는 열쇠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6 나는 단지 스피커가 좋았던 것이 아니라, 스피커가 들려주는 음악과 음악을 들으며 행복해지는 나 자신을 좋아했던 것이다. 나는 단지 그 사람이 좋았던 것 뿐만이 아니라, 그 사람이 나에게 보여주곤 했던 세계 속에서 또 다른 자아의 모습을 찾아가는 나 자신을 좋아했던 것이다. 잃어버림은 단순히 소유나 관계의 변동에 대한 아쉬움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감정이나 세계로의 진입구가 막혀버린 현실에 대한 좌절감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7 어렸을 때 감명 깊게 읽었던 책 <인생수업>의 저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상실을 받아들이는데에 '애도의 다섯 단계'가 있다고 설명했다.'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 그런데, 나는 그녀의 이론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다. 인간을 너무 수동적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집단으로 바라본 객체로서의 인간은 물론 그러하겠지만, 잃어버림 후에도 개인마다의 삶을 살아가는 한 명 한 명의 인간이라면 그것이 옳은 선택일까? 아니라고 소리치면서 화내고, 시간이 좀 지나면 잠잠해지고 우울해졌다가, 그냥 인생이 그런거지 하면서 지내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8 잃어버림을 다른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방법들은 매우 다양하다.
보다 쉬운 방법은, '애도의 다섯단계'를 거치되, 그저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각 단계 단계에 푹 빠져드는 방법이다. 소리쳐 이건 아니라고 부정하고, 거칠게 분노하고, 상황이 달라지면 자신의 감정과 타협할 줄도 알고, 자존감이 바닥까지 떨어지는 깊은 우울감에도 젖어 보고, 그러고 나서 현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쉬운 방법 같지만 쉽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솔직하지 않은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특히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분노와 우울감조차도 남의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내가 화난 것은 화난 것이고, 내가 우울한 것은 우울한 것인데, 나는 화나도 안되고, 나는 우울할 자격조차 가지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느 누구도 그래서는 안된다. 그것은 당신이 소중한 한 생명을 가진 한 존재로 이 세상에 던져지면서부터 당신에게 부여된 존엄한 권리이기 때문이다. 그걸 반대로 가르치는 경우라면, 그게 누구라도 당신의 적이다. 이 애도의 과정 한 단계 한 단계가 충분히 깊고 성숙한 수준에서 잘 끝나고 나면, 다음 대상을 다시 한 번 마음 깊이 사랑하게 될 자유를 얻게 된다. 하림의 노래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처럼. (유희열의 스케치북 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4RPKATPuD1o)
조금 더 어려운 방법은, 잃어버린 대상을 상실했다고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차원이 달라진 대상으로 추앙하는 방법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떠났을 때, 싯다르타가 열반에 들었을 때, 제자들은 로스 박사의 '애도의 다섯 단계'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가르침이 세상에 일으킨 파동들을 정리하고 전파해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추앙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설 추석 명절에 조상님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도 이런 '추앙화'의 한 과정이다. 현실 속에서 사라져 버린 존재의 의미를 단지 그리워하는 차원을 넘어 영적인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그들과 함께 한 추억과 그 경험 속에서의 깨달음들이 나의 삶에 선한 영향력의 흔적을 남기도록 바라면서. 매우 난이도가 높은 일이긴 하지만, 숙련시킬 수만 있다면 당신이 '잃어버림'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9 그럼에도 불구하고, 잃어버림을 극복하는 과정은 매우 힘든 거라는 것 잘 알고 있다. 잃어버림은 누구에게나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긴다. 그래도 나는 믿는다. 결국 상처들은 치유될 것이고, 새로 돋는 살들은 갑옷처럼 당신을 더욱 튼튼하게 감싸주게 될 것이라는 것을.
글을 맺기 전에 한가지 확실히 해 두고 싶은 것이 있다. 우리의 '잃어버림'은 풀어진 연결고리나 부러진 열쇠 같은 현실적인 사소한 문제들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그 '잃어버림'이 우리 삶에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극복하는 방법은 우리 스스로의 마음을 솔직하게 더 잘 들여다 보고, 스스로의 마음을 더 잘 위로해 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무얼 두려워하는지, 내가 무얼 필요로 하는지 아는 사람은 나 자신 뿐이다.
늘 잃어버려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는 삶을 기원하며
2024.2.14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