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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워드 Dec 27. 2023

좋은 일이 오려고 그러나 보다

스물 하나, 서른, 마흔, 그리고 쉰 즈음에. 

#1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1994년 6월 가수 김광석이 <서른 즈음에>라는 노래를 발표했다. 


그는 서른살, 나는 스물한살이었다.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서른 즈음에, 원곡 듣기 링크 https://bit.ly/3NDKmZG


당시 나는 서울대 의예과 2학년에 재학 중이었는데, 심한 우울증 때문에 생활이 엉망이었다. 게임과 음주 중독에 빠져 있었고, 몇 번의 어줍잖은 사랑시도에 실패하고, 경제적인 문제도 있었으며, 엎친데 덮친듯 몸 상태까지 좋지 않았다. 나는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수업에도 잘 들어가지 않았고,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는 것도 어려웠다. 아무하고도 상의하지 않고 휴학계를 던져 버리곤,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갔다. 어머님은 화들짝 놀라셨다. 나는 아무런 할 말이 없었다. 뭐라고 대답할 수 있는 기운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막 스무살이 넘은 나에겐, 김광석의 노래 <서른 즈음에>는 충격적이었다. 이 괴로운 이십대가 끝나고 나서 서른살이 되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노래 속 주인공의 서른살은 사랑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거나, 우울한 노래를 하는 것이 아니고서는 스스로의 마음조차 진정시키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서른 살이 되면 이십대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더 심한 문제가 생길수도 있나 보다 생각했다. 그래도 그의 노래는 나의 외롭고 쓸쓸한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고, 나는 그의 콘서트가 열릴 때마다 단골로 출석했다. <서른 즈음에>를 부르기 시작한지 1년 반 후, 그가 스스로의 선택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4번씩이나. 


그의 죽음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리고 나를 자책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음악으로 사람들에게 공감을 줬지만, 정작 그 사람은 아무에게서도 공감받지 못했구나, 외로웠구나. 그 노래들은 단순히 아름다운 음악이 아니라, 그가 외롭다고 눈길 보내고, 그가 힘들다고 소리치는 절규였구나. 돈 내고 콘서트 들으러 오는 사람들은 많았겠지만, 아무도 그 사람의 내면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지는 않았었구나. 


그래서 그는 떠났구나.  



#2

2000년 초반의 핑클

2003년, 이번엔 내가 서른살이 되었다. 


나는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나서 서울아산병원의 안과 전공의 3년차가 되어 있었다. 내 곁엔 연애를 거쳐 1년 전 결혼한 세 살 연하의 사랑스러운 아내가 있었다.


나는 첫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의예과 재학 중 휴학을 하면서 2년을 날려 먹었다. 아내 역시 학부를 졸업한 후 약대에 재입학한 늦깍이 대학생이었다. 우리 둘 다 마음이 급했다. 여러면에서 늦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로를 바라볼 여유는 없었다. 서로를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미래를 향해서 직진했다. 속도가 중요했고,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거추장스러운 일들은 최대한 미뤄두었다. 알콩달콩한 신혼의 재미도, 자녀의 출산도, 혹은 다른 삶의 즐거운 일들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내는 잘 버텨가며 커리어의 한 줄 한 줄을 잘 채워갔고, 나도 직업으로 택한 안과의사가 체질에 맞아서 그런대로 잘 지내던 시절이었다. 


다만, 전공의 생활은 힘들었다. 일주일에 며칠은 날밤을 새다시피 하는 날이 많았고, 위계질서가 엄격한 안과의국에서는 함부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금기였다. 너무 눈에 띄지 않아도 안 되었고, 너무 눈에 튀어서도 안 되었다. 내 생각들은 입에서 나오기 전에 뇌의 전두엽에서 워싱 작업을 거쳐야 했다. 그래야, 배려깊고 훌륭한 의사나 동료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사고형 (Thinking)' 성격유형을 가진 인간형으로 가득찬 안과의국에서는, 이십대의 내가 사랑했던 김광석처럼 '감정형(Feeling)'  성격유형의 표현들을 아무 생각 없이 내뱉았다가는 어딘가 우스꽝스러운 사회부적응자 취급을 받을 수도 있었다. 


매년 연말에는 수술장 파티가 있었다. 이 모임의 장기자랑은 수술장에 들어오는 모든 과들이 의무적으로 참여했다. 분위기는 선정적이고 전투적이었다. 1년차 말 우리 전공의 동기들은 핑클의 <나우(NOW!)>를 여장하고 안무와 함께 연습했다. 김광석의 우울한 노래를 듣고 그 감성에 빠져서 며칠이고 삶을 내팽개쳐두었던 스무살 언저리처럼 지내서는, 그곳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김광석의 우울한 노래는 마음 한 구석에 접어두어야 했다. (핑클의 <나우> 뮤직캠프 라이브 링크 https://bit.ly/41IkUs4)


그렇게, 우리는 표정과 감정을 거세당한 독일병정들처럼 목표를 향해 계속 전진, 전진했다. 



#3 

2013년 7월, 센트럴서울안과 식구들과 함께 뮤지컬 <레미제라블> 관람

2013년, 마흔살이 되었다. 


센트럴서울안과를 개원한지 1년이 좀 지난 시점이었다. 다소 병원이 안정화되면서 많은 부분이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반복되는 진료와 사무적인 업무만으로는 영혼의 갈증을 도저히 채울 수 없었다. 우리는 무엇이라도 함께 할 수 있는 정서적인 일들을 찾아내야만 했다.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함께 보러갔다. 가서 생각해 보니 개인적으로는 너무 바쁘게 살았던 탓에, 20년만에 처음 본 뮤지컬이라는 것을 알았다. 배우 정성화의 열연도 훌륭했지만, 오리지널 스코어들 중 "I dreamed a dream (나는 꿈을 꾸었네)"의 가사들이 공연 후에도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영화 레미제라블 중 앤 헤더웨이가 부른 <I dreamed a dream> 링크 https://bit.ly/3ttGl3n )


"I dreamed a dream in time gone by

 예전에 나는 꿈을 꾸었답니다  

 When hope was high and life worth living

 희망에 가득 차 있었고,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었던 때

 I dreamed that love would never die

 사랑이 결코 시들지 않을 거란 꿈을 꾸었답니다

 I dreamed that God would be forgiving

 신이 너그러울 거라고 생각했어요

 Then I was young and unafraid

 그 때 난 젊었고 두려움이 없었죠

 And dreams were made and used and wasted

 그렇게 꿈을 꾸고 허비하고 하찮게 여겼죠

 There was no ransom to be paid

 내가 치러야 할 대가는 없었어요

 No song unsung, no wine untasted 

 모든 노래를 불렀고, 모든 포도주를 맛봤죠

 But the tigers come at night

 하지만 시련은 한밤중에 찾아오는 법

 With their voices soft as thunder

 천둥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As they tear your hope apart

 당신의 희망을 갈갈히 찢어놓고

 As they turn your dream to shame

 당신의 꿈을 수치스러운 것으로 바꿔버리죠"


막연하게 머리 속으로 꿈꾸던 나의 이상들, 평화와 존중이 넘치던 아름다운 세계가 냉혹한 현실에 부딪혀 박살난 유리잔처럼 길바닥에 뒹굴고 있는 것들이 눈 앞에 선명하게 보였다. 서로 상처를 만들어가면서 이상하게 꼬여버린 인간관계들은 나에게 더이상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으로 변해거린 것들을 알았다. 많은 것들이 처음과는 다르게 변해가고 있었고, 나도 더 이상 내가 기억하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것들은 나의 선택으로 인한 것들이었다.  


참혹한 현실에 절망하고 분노하고 죄를 지었지만, 용서와 자비로 변화할 기회를 만났을 때 그 길에 순명하고 다른 사람들의 삶도 바꾸는 장발장의 용기가 부러웠다. 반대로, 비슷한 기회를 얻었을 때 변화가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파괴하는 쉬운 길을 택하는 자베르를 보면서 절망했다. 그의 모습이 당시의 내 모습 같아서였다. 뮤지컬의 제목 "Les Miserable 비참한 사람들" 중에는 내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뮤지컬 <레미제라블>은, 마흔살의 나를 구원했다.       

 


#4  

2023년, 쉰살이 되었다. 


올해는 유독 가까운 사람들과 이별을 많이 겪었다. 어렸을 적부터 나를 잘 돌봐 주셨던 어르신들 몇 분들이 지병으로 고생하신 끝에 세상을 떠나셨고, 한강성당 독서단에서 함께 성경읽기 봉사를 함께 하셨던 어르신 한 분도 제대로 된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셨다. 환자들 중에서도 더 이상 얼굴을 뵐 수 없는 분들이 한 분 한 분 늘어나고 있다. 세상을 떠난 것은 아니라도 오랜 기간 병원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들 몇 명도 곁을 떠났다. 올해 뿐 아니라 내년에도 많은 사람들과 이별할 것이고, 삶은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는 것쯤이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몸이든 정신이든 쇠약해지고 움추러드는 것을 내 눈으로 목격하는 것은 이별을 예고하는 전조처럼 느껴져서 내 마음을 미리 아프게 한다. 가끔은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나의 어느 한 귀퉁이라도 뭉턱 잘라서 조건없이 주고 싶을 때도 있다.   


여러가지 상념에 빠지는,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이런 계절엔 늘 이별 노래들이 나타나곤 한다. 올해는 헤이즈의 <Last Winter> 앨범이 백미다. 나는 그 중에서도 <입술>이라는 곡에 꽂혔다. (헤이즈의 <입술> 뮤비 링크 https://bit.ly/3GZimfm)


이 노래의 한글 제목과 영어 제목이 완전히 다른 것은 상당히 철학적이다. 한글 제목은 (이별을 말한) <입술>인데, 영문 제목은 <Stranger 낯선 사람, 이방인>이다. 어떤 종류의 이별이라도 겪고 나면 상황은 달라진다.삶과 죽음을 가르는 이별이건, 관계의 단절이건 마찬가지다. 이제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 소속되어 있어 더 이상 접촉할 수 없다. 심정적으로는 늘 가까운 곳에 있다고 믿고 있어도, 물리적으로는 곁에 머물 수 없게 되었다. 머물게 된 세계가 달라졌으므로, 그들은 이미 낯설어졌고 더 낯설어질것이다. 이별로 인해, 그들은 서로에게 이방인이 된 것이다. 


올해의 여러 이별들을 실제로 겪고 나서는 예전에는 이론적으로만 느껴졌던 것들이, 요새는 심장을 저밋저밋하게 만들곤 한다. 불면증에 빠지게 한다. 새벽에 잠에서 깨게 만들곤 한다. 책을 읽고, 글을 쓰게 만든다.  



 #6

지인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그냥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나도 한 권 산 책 <좋은 일이 오려고 그러나 보다>

스물 한 살의 우울증도, 서른 살의 폭주도, 마흔살의 좌절도 이제는 희미해졌다. 현재 진행형인 가슴아픈 이별들은 아직은 진행형인 부분도 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 역시 희미해진다는 것 잘 알고 있다. 


그러면, 그 순간들은 의미가 없었을까? 


바닥까지 갈 뻔 했던 우울증으로 인해 삶의 기쁨이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 더 잘 알게 되었고, 폭주해 보았기 때문에 어떻게 절제해야 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좌절과 분노의 상처는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고, 이별의 순간들은 항상 나 자신의 모습을 뒤돌아보게 만들었다. 내 삶에서 끝까지 지켜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놓아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요새는, 삶의 모든 순간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것이 고통이든 권태이든, 기쁨이든 슬픔이든 간에. 아프면 소리지르고, 지루하면 놀고, 기쁘면 웃고, 슬프면 울었으면 좋겠다. 아파도 울지 않고, 지루해도 참고 견디고, 기뻐도 슬퍼도 아무 표정 없이 사는 것은 오히려 삶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너무 망가지지는 않았으면, 결국은 평화롭고 행복한 세계로 다 들어가기를 모두를 위해 기도해 본다. 


"힘든 일이 오더라도

 너무 무너지기만 하진 말자

 더 좋은 일이 오려고 그러나 보다

 그래서 아픈가 보다 생각하자"


   - <좋은 일이 오려고 그러나 보다> 중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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