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새벽에 눈을 떠 보니 창 밖을 보니, 오랜만에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될 거라는 일기예보가 들어맞았다는 걸 알았다. 하얗게 변한 바깥세상이 낯설게 느껴진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흥분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요새는, 일찍 깬 날은 습관적으로 브런치스토리에 글을 끄적거리는 습관이 생겼다. 페이스북 리마인더가 지난 크리스마스 전야의 기억들을 떠올려준다.
잠시, 옛날 기억 속으로 들어가 본다.
#2
11년 전 오늘은 아마도, 내가 개인적으로 한참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을 때였다. 갖은 우여곡절을 겪고 개원한지 1년 정도 지났지만, 조직은 불안정했고, 처음 마주하게 된 많은 일들에 두려움이 밀려왔다. 환자들은 기대처럼 많이 오지 않았고, 용산이라는 낙후지에 병원을 크게 벌려 놓은 것에 대해 우려하던 많은 사람들의 우려가 사실이 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불안감이 심각한 불면증을 만들었다. 하루에 세네시간만 자면서 일만 했고, 사람들에게 예민하게 굴었다. 둘째가 태어난 직후였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 없이 두 명의 자녀들을 키워야 했던 시기라 좀 힘들었다. 그래도,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그 사람들은 내가 알지 못했던 세상에 눈뜨게 만들어 주었다.
이 글을 읽고 매우 마음에 와 닿았다. 생각해보니 감사할 일들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나는 만족하지 못했고 어느 것에도 감사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은 이차적으로 나쁜 에너지 파장을 만들어서 내 삶을 역주행시키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9개의 나쁜 일이 있더라도, 1개의 감사한 일에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에너지의 방향을 긍정적으로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3
4년 전 오늘은, 코로나19가 들이닥치기 전 마지막 성탄전야였다. 병원에서 참여하고 있는 이촌1동 사회보장협의체의 일원으로서 충신교회와 함께 하는 성탄전야 음악봉사에 참여해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크리스마스 캐럴을 불러드렸다. 두달 이후엔 강제 마스크 착용, 전세계적인 봉쇄와 삶이 피폐해진 시기가 들이닥치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때는 전혀 몰랐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라는 것도, 역시 몰랐다.
길거리를 지나가는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선물을 나누어 드리는 것, 처음엔 많이 쑥스러웠다. 하지만, 뜻을 함께 하는 여러사람들이 곁에 있으니 그런 어색함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기쁨은 나누니, 커졌다.
#4
3년 전 오늘은, 이촌1동에 있는 글로벌빌리지센터에서 강의 초청을 받았다. 코로나19로 인한 봉쇄가 한참이었고, 사람들은 접촉이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교육들은 빠른 속도로 온라인화되어갔고, 줌을 통한 온라인 강의가 대세가 되었다. 일본인들 대상으로 눈 건강 강의 요청을 받았다.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인데, 강의는 통역을 사용하지 않고 일본어로 해주었으면 한다는 특별요청이 들어왔다.
문제는, 내가 일본어는 한 글자도 몰랐다는 것이었다. 한글로 만들어진 강의 자료를 네이버 파파고를 사용해서 일본어로 번역한 후 재생했고 그 내용을 한글로 적어서 슬라이드 노트에 적어두고 읽었다. 강의는 꽤 성공적이었고, 일본어를 잘한다고 칭찬해 주시는 분들이 많았다고 한다. 머리를 좀 쓰면 왠만한 일들은 보다 창조적인 방향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들었던 소중한 경험이었다.
#5
2년 전 오늘은, 딸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 내 이름이 "딸바부"로 되어있는 걸 발견했다. 나와 비슷한 부분들이 많아 애착이 가는 부분이 많은 녀석인데, 내가 저를 사랑하는 것이 그렇게 티가 났나 보다. 딸아이는 이제 초등학교 6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절반 정도는 사춘기에 접어들어가면서, 예전만큼은 나를 찾지 않는다. 친구들과 하는 다른 재미있는 것들이 훨씬 재미있는 시절이니까. 가끔은 뜽금없는 순간에 화도 내고 그러다가 또 풀어지고 하는 녀석의 모습을 보면서 가끔은 나도 기분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한다. 하지만, 예전과는 다르게 이제는. 그래 그럴 수 있겠지, 하면서 비교적 평온한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지켜 보는 중이다.
사랑은, 감정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가벼운 것은 아니니까. 그래서, 난 항상 같은 곳에 있으려 노력할테니까.
#6
1년 전 오늘은, 전날 했던 녹내장 수술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발생하는 연소성 녹내장 (juvenile open angle glaucoma)은 여러 종류의 녹내장 중에서도 예후가 매우 안 좋은 편이 속한다. 안압이 높은데다가, 진행도 빠르고, 수술성공률도 낮은 편이기 때문이다. 우리 아들과 동갑내기인 강원도에서 온 중3짜리 여학생의 눈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 여러 병원을 거친 다음에 마지막으로 나를 찾아왔다. 만일 안압이 조절되지 않는다면, 두 눈 모두 실명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눈 상태도 안 좋았지만, 주위의 여러 여건들도 좋지 않아서 그 아이에겐 불안한 마음이 눈빛이며, 행동에서 많이 느껴져서 마음이 아팠다.
양안 모두 녹내장 수술을 한 달 간격으로 했고, 현재까지 경과는 매우 좋다. 그 덕분인지 이제는 예전의 불안감은 많이 줄어들었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다. 한 달 전 왔을 땐, 미술을 전공할 꿈을 꾸고 있다고 했다.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 기뻤다, 많이.
#7
내일은 성탄절이다. 어렸을 적에는 그저 쉬는 날이었지만, 이제는 그 의미를 생각해 보려 애쓴다.
가브리엘 천사가 제사장 즈카르야의 꿈에 나타나서, 나이 든 아내 엘리사벳이 아이를 가지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였을때 그는 믿지 못했지만, 하느님의 축복으로 엘리사벳은 세례자요한을 낳았다.
길을 잃고 헤메던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재산을 다 까먹고 곤궁해져서 집으로 돌아갔을때, 아버지는 화를 낸 것이 아니라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아난 것을 기뻐하며,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며 기뻐했다.
그리고, 2023년 전 성탄절에 하느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허름한 마굿간을 통해서 세상에 보내시어, 어둠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과 용서와 평화의 메시지를 보내주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복음 25,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