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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워드 Dec 21. 2023

사랑, 새벽명상 Part III

상실과 결핍에서, 삶에 대한 더 큰 사랑이 시작된다.


#1

사랑은 다가오고, 사라진다?


감각적인 사랑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옥시토신, 도파민, 혹은 세로토닌 같은 '사랑'이라는 감정과 관련한 신경전달물질이 지속적으로 분비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감각 유형의 사고방식이 강한 사람들에서는 이런 감각이 사라지는 과정을 '사랑이 식었다'라고 느끼곤 한다. 그리곤, 또 다른 사랑을 찾는다. 비슷한 결과가 반복된다. 원래 감각적인 사랑이라는 것은 신경생리학적으로 그렇게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직관 유형의 사고방식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들은 조금은 더 큰 그림을 볼 수도 있다. 그들은 그런 단계가 오면 사랑이 식은것이 아니고, 형태가 변한 것이라고 생각하려 애쓴다. 상대방의 외적인 부분과 감정을 공유하던 현실 속의 감각적인 사랑에서, 인간으로서 서로의 성장을 도와줄 수 있는 동반자적인 관계, 혹은 현실에서 마주하지는 않더라도 영적인 세계로 나아가도록 도와주는 멘토같은 역할로 한 차원 넘어가는 것을 꿈꾸곤 한다, 늘 성공하지는 않더라도, 그리고 꼭 진실은 아니라도.



#2

"인간이 모든 고뇌와 고통을 지옥으로 보내 버린 천국에는 무료함밖에 남아 있지 않다." (쇼펜하우어)


사람들은 결핍에서 오는 '고통'과 만족에서 오는 '권태'에서 불행을 느낀다고 한다. 사람들 사이의 성향 차이는 매우 명확해서 어떤 사람은 고통을, 어떤 사람은 권태를 더 큰 불행이라고 느낀다.  


모든 것들이 지독하게 부족한 젊은 날들의 불행은 결핍에서 오는 고통인 경우가 많다. 물질적인 결핍, 대화와 애정의 결핍, 그리고 사회적 관계의 결핍들은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 가끔은 더욱 무뎌져서, 어쩌면 모든 것이 결핍되어 있는 그 상황조차도 나에게는 원래 그렇게 만들어져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현실에 순응하면서 살게 될 수도 있다. 다르게 마음만 먹으면 한 발 더 나갈 수 있는데 나가지 않는 것도, 삶의 비극의 씨앗이 된다.


반면, 물질적으로 많은 것들이 갖추어지는 시기에 이르게되면 권태 자체가 불행의 근원이 된다. 끊임없이 새로운 사건, 새로운 물건, 새로운 사람들에서만 흥미를 느끼는 것은 자신의 내적인 행복감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런 쾌락의 선호대상은 수시로 바뀔 수 있어서 한두가지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행복감을 얻을 수 없다. 이들은 감각적 쾌락의 중독에 쉽게 빠지는 성향의 사람들로, 마치 <오징어게임>의 설계자 같은 사람들이다. 이 역시 삶의 비극이다.



#3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마태오 복음서 1, 23)


사람들은 대개 고통과 권태 사이를 진자추처럼 오락가락 움직이다가 삶을 마감한다. 어떤 삶의 지향점 같은 것이 없다면 더욱 그러하다. 마치 바람 없는 대양을 떠도는 닻없는 돛배처럼, 시간이 지나도 변하는 것은 나이들고 병들어가는 육체와 피폐해져가는 정신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시점이 오면, 비극은 더욱 극대화된다. 세상에 태어난 인간들은 모두 같은 운명을 공유하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궁극적인 위안이 될 수도 없다.


성탄절이 다가온다. 임마누엘, 즉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은 유한한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우리 인간들에게 큰 희망과 용기를 준다. 다른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피를 흘리다가 지상에서의 삶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 거칠게 몰아쉬는 한숨과 함께 외쳤던 탄식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지만, 삶과 신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했던 그 순간에는 어떤 응답도 받지 못하시고 절망 속에 세상을 떠나시고 만다. 하지만, 돌아가신지 사흘만에 부름을 받아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절절한 마음에 하느님께서 응답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하늘에 올라 하느님 아버지의 옆자리에 앉으셨다. 그는 인간으로서의 한계, 감각적인 사랑의 유한성을 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극복하게 된 인류역사상 가장 극적인 사건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은, 그의 지독한 상실감과 결핍에 대한 인간적인 절규에서 시작되었다.  



#4

상처는 더욱 튼튼한 새 살을 자라게 한다.


불에 데일수도 있고, 칼에 잘릴수도 있고, 떨어지는 물체에 맞을수도 있다. 죄가 없어도 십자가에 못박힐수도 있고, 목숨을 잃을수도 있다. 사람의 말에 감정이 상할수도 있고, 행동에 배신감을 느낄수도 있으며, 위중한 병에 걸릴수도 있고, 전재산을 잃을수도 있다. 가끔은 가까운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가기도 한다.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았던 행복감은 싸늘한 주검같이 변할 수 있고, 내일이 되면 오늘의 느낌들은 잘 기억나지 않을 수도 있다. 가끔은 상처가 너무 아파서 소리내어 울기도 하고, 봐달라고 소리지르기도 하고, 가슴 먹먹한 느낌으로 하루를 1년같이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만 잘 지킬 수 있다면 다른 모든 상처들은 치유된다고 믿는다. 2000년도 더 전에 우리와 같은 인간의 육신을 가지고 태어나 같은 절망과 고뇌에 빠져있었지만,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유한한 인간들이 지향해야 할 곳을 가리키는 표상이 된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답이 있다. 그렇게 돋아난 새 살은 기존의 말랑거렸던 속살과는 차원이 다르다. 감각적인 세계를 넘어 영적인 부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5

올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생일, 성탄절이 다가온다.


한 해의 끝을 맞아 지난 한 해 동안 상처입혔고, 상처받았던 모든 순간들을 회상해 본다. 그런 순간들은 대개, 나는 내게 결핍된 것들을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로 채우고 위안을 받으려 했으며, 그저 지켜봐 주었으면 좋았을 순간에도 상처를 헤집거나 삶에 지나치게 개입해서 상대방을 움추러들게 만들었다. 아파서 내지르는 비명을 그저 듣기 싫다는 이유로 외면했고, 반대로 걱정해주는 마음을 귀찮다고 무시하기도 했다. 화해의 말 한마디 전하는 것이 힘이 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바쁘다는 핑계로 마음의 문을 아예 닫아 버리기도 했고,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큰 관심을 많이 못 준 것 같아 미안한 부분도 있다. 기도는 입으로 하는 형식적인 것인 경우가 많아졌고, 그래서 심연 속에서 울리는 그 분의 말씀을 듣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올해도 잘못한 일 투성이이지만, 올해도 성탄절이 와서 좋다.

부초처럼 하루 하루 버티면서 살아가는 인생이지만, 바라볼 곳이 있고 나눠 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행복하기 때문이다.  

Merry Christ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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