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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여니 Dec 02. 2024

퇴사 후, 익숙함속에서 발견한 새로움

3개월 만에 종로가 건넨 위로와 설렘


첫눈 소식에 설레었지만, 갑작스러운 폭설이 온 세상을 눈으로 하얗게 덮어 버렸다. 어제까지 살던 공간이 순간 새로워지는 마법이 일어나는 듯했다. 다음 날, 출근길 교통 대란 소식이 전해져 잠깐 멈칫했지만, 마음먹었을 때 움직이기로 결심하고 발걸음을 내디뎠다.



퇴사 후 3개월 만에, 처음으로 서울 종로로 나섰다. 한적한 시간대의 지하철에 몸을 싣고 책을 펼쳤다. 사람들 틈에 끼어 책을 읽던 지난날 출퇴근 독서 기억이 떠올랐다.  요즘의 어색했던 일상과 달리 너무 자연스럽게 책을 펼치는 내 모습에, 여전히 몸에 배어있는 습관들을 실감하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다만 이번엔 여유가 더해져, 그 기억은 새로운 낯섦으로 다가왔다.




폭설 뒤 따뜻한 날씨 덕분에 서울의 도로는 생각보다 깨끗했다. 눈이 내린 서울을 오랜만에 느껴보는 재미도 있었다. 오랜만에 눈 덮인 청계천을 걷는 동안 발걸음은 가벼웠고, 곳곳에 꾸며진 크리스마스트리와 로비에서 울려 퍼지는 피아노 연주가 발걸음을 붙잡았다. 계절이 바뀌는 이 순간, 서울은 여전히 바쁘고 생동감이 넘쳤다.




이번 나들이는 내 몸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나선 길이었다. 그동안 변화된 몸 상태를 직접 확인하기 위한 길이라 긴장되었다. 서울 나들이가 주는 기분 전환을 느끼며, 가끔 나올 핑계를 일부러 두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에 병원을 집 근처로 옮기지 않았다. 진료실을 나서며 생각보다 훨씬 좋은 결과를 들었다. 몸 상태가 좋아졌다는 결과에 발걸음도 한층 가벼워졌다. 낯선 일상 속에서도 꾸준히 나 자신을 돌봐온 시간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꼈다.



오랜만에 바쁜 직장인들 사이에 있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천천히 걷던 걸음이 어느새 빨라지고, 왠지 모르게 여러 곳을 바쁘게 움직였다.


볼일을 마치고 자주 가던 식당에서 혼밥을 했다. 따뜻한 국물 속에서 기억 속 익숙한 맛을 찾아냈을 때, 내 안의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기분이 들었다. 추운 날씨에도  평소 산책길을 거닐며, 과거의 따뜻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이후 여유로운 마음으로 카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하며 종로를 찬찬히 눈으로 담았다.



오래된 상점과 간판 사이에서 느껴지는 익숙함 속에서도, 변해가는 도시의 모습은 내가 걸어가야 할 새로운 길과 닮아 있었다. 나를 둘러싼 세상이 조금씩 변하고 있음을 실감했다.  



회사 근처를 돌다 친했던 동료 언니들에게 카톡을 보냈다. 바쁜 시간을 방해할까 망설였지만, 회사 앞에 지나며 그냥 가는 건 오히려 마음에 걸렸다. 갑작스러운 연락에도 반가워하며 뛰어나온 그들의 모습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얼굴이 훨씬 편안해졌네 "라는 말과 함께 퇴사 이후 회사 이야기를 나누었다. 부서가 조금 나아졌다는 소식에 참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퇴사를 결심했던 순간들이 떠오르며 그때 왜 그런 조치를 취하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도 스쳤다. 그래도 내 경험이 바탕이 되어 발전했다니 내 역할은 충분히 다한 것 같았다.



짧은 대화를 나누고 지하철역까지 배웅을 받으며 오랜만의 만남을 마무리했다. 약간의 망설임 끝에 연락했지만, 얼굴을 보고 나니 잘한 선택이었다. 언니들과 웃으며 나눈 대화 속에는 그동안 쌓였던 추억들이 아있었다. 회사 생활의 고단함속에서 그로 인해 생긴 유대감을 다시한번 되새겼다. 비록 방향은 달라졌지만, 우리의 인연은 여전히 같은 선 위에 있다고 느껴졌다. 다시 돌아오라는 말에 위로를 받으면서도, 이미 다른 길을 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모든 시간은 인생에 있어 결국 지나가야 할 과정이라 여기니 한결마음이 편안해졌다.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퇴사하던 마지막 날의 감정이 스치며, 내 위치가 변했음을 실감했다. 16년을 매일같이 출퇴근했던 익숙한 풍경 속에 더는 내가 없다는 사실이 낯설고 먹먹했지만, 동시에 새로운 자리에서 느끼는 설렘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다시는 오지 않을 줄 알았던 그 곳을 다시와 만나니 기분이 새로웠다. 익숙한 장소와 사람들, 음식들에서 느낀 안정감이 새로움에 대한 기대를 마음속 깊이 피어나게 했다. 퇴사 후 종로에서의 하루는 어쩌면 새로운 시작을 위한 작은 예고편 같았다.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갈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오늘 느낀 설렘과 여유가 내 삶의 방향을 조금 더 따뜻하게 비춰줄 것 같았다.


 익숙한 곳에서 발견한 새로움처럼, 앞으로 펼쳐질 내 인생 책의 새로운 페이지도 따뜻한 흔적으로 채워지길 기대한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시간은 없다.

- L.M. 몽고메리, 빨간 머리 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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