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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여니 Nov 08. 2024

가을 아침 한잔의 위로

종이컵 속 작은 위로, 믹스커피 이야기

싸늘해진 가을 아침, 커피 한 잔이 생각났다. 여러 종류의 커피 중에서 오랜만에 믹스커피 한 잔을 종이컵에 탔다.

‘믹스커피는 종이컵’이라는 고정관념에 맞춰 적당한 양의 물을 넣고 저었다. 달달하고 진한 커피 향이 코끝을 스쳤다. 얼마 만에 마시는 믹스커피인가 싶어 한 모금씩 음미하며 마셨다. 내가 기억하던 믹스커피의 맛이 아닌 것 같아 왠지 모를 아쉬움이 느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출근하자마자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고, 자연스럽게 커피를 타러 일어섰다. 큰 종이컵에 믹스 두 봉을 넣고 물을 가득 부어 휘저었다. ‘빈속에 마시면 안 된다’는 말을 잊은 채, 작은 행복을 느껴본다. 책상에 앉아 마신 한 모금의 커피가 짜증 났던 출근길의 힘듦을 달래주었다. 이런 작은 행복만 있다면 힘든 일도 견딜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달달함의 에너지를 받아 열심히 일을 시작하려는 마음가짐을 갖는다. 커피 한잔을 다 마실 정도의 여유를 갖고 아침을 시작한다. 단맛이 주는 위로를 듬뿍 받은 덕분인지 순간 손가락들이 키보드 위에서 춤을 추기 시작한다. 타닥타닥 키보드 소리와 함께 하루가 시작된다.  




점심 후 휴식을 취한 뒤, 다시 아메리카노와 함께 책상에 앉는다. 씁쓸함을 이겨내고 목구멍을 넘기고 나면 어느새 텁텁했던 입안이 상쾌해진다. 인생의 작은 쓴맛을 경험했으니, 힘겨운 오후 업무도 이겨내 보라는 듯하다. 민원 전화가 많고, 쏟아지는 업무 속에서도 카페인의 힘은 대단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하나하나 해내고 나면 왠지 모를 뿌듯함이 채워진다. 인간의 뇌를 조종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카페인이 들어가면 지쳐있던 몸에도 활력이 생긴다.  






일은 늘 순조롭지 않다. 특히 좋은 일보다 나쁜 일이 생길 때면 꼭 커피가 간절히 생각난다. 마치 흡연가들이 담배가 당겨서 나가는 것처럼.  



상사에게 지적을 받아 기분이 나빠지면 커피를 향해 간다. 농땡이 친 것도 아니고 내 능력을 다해 최선을 다했음에도, 상사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헛수고가 된다. 잠깐 자리를 비우고 커피잔을 들여다보며 차마 입으로 뱉지 못할 이야기들을 눈으로 담는다. 그때 마시는 커피는 왜 더 맛있게 느껴질까? 이럴 때면 이제 커피 심부름이 없어진 것이 여러모로 참 다행이다 싶다.



황당한 민원 전화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어김없이 커피가 생각난다. 규정과 방법을 충분히 다양한 방법으로 안내했음에도 불구하고 몰랐단다. 아니 모르고 싶은 듯하다. 몇 차례나 막무가내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으면 신고한다며 윽박지른다. 대체 어디로, 무슨 사유로 신고할지 물어보고 싶지만, 정작 신고한 경우는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성 민원이 반복되면 이후 골치 아픈 일들이 생길 위험이 높아 나도 모르게 스트레스가 쌓인다. 전화상 민원은 특히 험한 소리를 내뱉는 이들로 인해 굳건했던 마음도 흔들린다. 그저 막연하게 화풀이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싶은 황당한 이야기를 듣고 나면, 자연스레 고객상담전화 같은 광고 전화도 어느 정도는 친절히 받아줘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정신이 탈탈 털리고 나면 믹스커피를 향해 달려간다. 나쁜 일들은 커피 향에 담아 날려버리고 싶다. 좋은 커피 향을 맡으며 그 사람이 이상한 거라고, 내 마음을 잡아본다.  악덕 민원은 늘 반복되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거 보니, 참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괴롭히는 집단이 있는 것인가 싶다.  



하루종일 집중해서 업무를 마치고 나면 나의 모든 에너지가 소진된 듯 커피가 나를 부른다. 이쯤 되면 커피 중독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내 손엔 커피가 들려있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오늘도 잘 버텨서 참 다행히 다며 감사의 마음을 담아 커피맛을 느껴본다. 퇴근 전 마지막의 커피는 아침 커피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하루종일 카페인 수혈을 받은 탓도 있겠지만, 이제 퇴근한다는 기쁨이 더해져 더 달달하고 맛있게 느껴진다. 퇴근길 배고픔도 달래주는 귀한 커피다.  






일할 때는 하루종일 커피를 찾게 된다. 스트레스를 달래주는 믹스커피는 참으로 큰 축복이다. 믹스커피를 개발한 사람은 세계의 평화를 유지시켜 주니 노벨상감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한번 빠지면 헤어나지 못하는 매력을 지닌 믹스커피. 건강 이상이 아니라면  남녀노소 대체로 즐겨 마시는 커피는 이제 우리 모두의 일상이 되었다. 같은 일들을 매일 반복하는 삶에서도 다양한 역할을 해준 작은 커피가 떠오른다.



이제는 회사가 아닌 집에 있다 보니 믹스커피를 마시는 일이 줄어들었다. 건강의 목적으로 피한 것도 있겠지만, 그렇게 스트레스받는 일들을 많지 않은 듯싶기도 하다.  여유로운 하루의 시작과 함께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친구들과 이야기 나누며 달달 디저트와 함께라면 아메리카노가 찰떡궁합이다. 어느새 하루종일 몇 잔씩 종이컵에 먹던 믹스커피도 추억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모처럼 한잔의 믹스커피를 마셔보니 그때의 그 맛이 아니다. 달달함도 덜해진 것 같고, 맛있던 맛도 달라진 듯하다. 환경에 따라 맛이 이렇게 달라질 줄이야.



언젠가 다시 스트레스를 받거나 지쳐 있을 때 믹스커피를 찾겠지만, 그 순간의 그 맛을 온전히 느끼지 못할 아쉬움을 달래며 천천히 향 가득한 커피 한 잔을 음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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