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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석 Dec 05. 2023

서문

단풍잎

 칠십 대 후반으로 접어들고 보니, 지나온 삶이 황혼에 반짝이는 단풍잎 같다. 오랫동안 꼽아 두었던 책갈피에서 툭 튀어나오는 단풍잎은 반갑다. 엎드려 주울 때는 색이 선명하고 고귀한 잎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인생길 산책을 하다 그저 주운 잎이지만, 나에게는 보석 같은 삶의 흔적들이다. 세월이 쌓였으나 색이 아니 바랜, 그러나 시간이 퇴적되어 여위어 버린 기억들. 아름다웠던 시간보다 힘들었던 날들이 더 선명한 채로 남아있는 삶의 자국들이다.


 인적 없는 고산준령에 올라 주우려 하지도 않았다. 키 큰 나무 우듬지의 매혹적인 잎을 따고 싶었지만, 한참을 올려 보다 목이 아프면, ‘저 잎은 멀리 있어 착시로 예쁘게 보일 뿐이야.’라며 자위하고 포기했다. 아침 햇살에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은행잎을 줍는 행운의 날도 가끔은 있었다. 


 책 속의 노랗고 빨간 기억들은 몇 년 또는 몇십 년을 나와 함께 숨을 쉬며 지내왔다. 조심조심 다루지 않으면 부스러져 버릴 듯 마른 이파리지만 그날 그 자리에서는 가장 아름다웠던 잎이었다. 


 항상 최선을 다하려 했던 많은 순간에도, 대나무 마디처럼 선명하게 빛나는 자국이 가끔은 아름답다. 숨 막히게 사랑했던 순간들 말이다. 노을이 물든 강 위로 뛰어오르는 붉은빛 피라미들, 우레와 번개가 번쩍이는 산속에서 혼자 받아냈던 세찬 소나기, 첫사랑의 까마득한 그림자를 쫓아갔던 해바라기 들판, 이른 봄 양지바른 곳에서 스스러운 듯 피어나는 작은 봄꽃. 이러한 삶의 기억처럼 책 속에서 나온 단풍잎은 빛나고 있었다. 


 지금까지 만나고 있는 잎들은, 주웠다 버려져 가랑잎 돼 버린 수보다 많이 적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시간이었지만, 팔십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남아있는 아름다운 기억 또한 개암나무 노란 꽃 중에서 빨간 암꽃 찾기만큼 어렵다. 지금 마주하는 단풍잎이 그러하듯이, 아름답게 빛나는 기억 또한 많지 않다. 


 세월이 쌓여 여윈 삶이지만 색만은 아니 바래고 싶다. 몇 안 되는 추억을 책 속의 단풍잎을 꺼내듯이 조심스레 꺼내 보았다. 비록 벌레 먹고, 바람에 다친 잎이지만 다행히 한 권의 책으로 영글게 되어 기쁘다. 부디 사랑하는 자식과 손자들 삶에 자양분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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