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심(菩提心)
오색이란 오방색을 이름일 것이다. 풍광도 뛰어나지만, 부처님이 살고 계시는 듯 오색이 창연한 극락정토가 가슴으로 들어온다. 언제나 따스하고 포근하다. 강원도 양양군 서면 오색리 소재 주전골은, 오색(五色)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세상의 중심 색인 황(黃) 색으로 물든 뫼 산(山) 자 생강나무가 우선 나를 반긴다. 잎을 조금 뜯어 손가락으로 비벼 코에 대자, 눈이 맑아지고 피가 잘 도는 듯 몸이 가볍다. 숨을 깊이 들이쉴 수가 있어 좋아하는 향이다.
청(靑) 색의 하늘은 청정무구한 천공(天空)이다. 하늘님이 사시는 곳이요, 아미타불이 계시는 곳이다. 혼이 올라가는 곳이며, 선녀가 내려오는 곳이다. 이슬람의 모스크 타일에서 보았던 코발트 빛이다. 가을 하늘은 맑고 심오하여 더욱 좋다. 산들바람에 하얀 구름 하나 날아와 독주암에 걸터앉는다. 희고 긴 수염의 백(白) 색 도인이 키만 한 지팡이를 짚고 앉아있는 듯하다. 도인은 구름 아래 속세를 굽어보다가, 눈을 들어 조금 전 떠나온 대청봉을 바라본다. 단풍나무는 하늘에서 내리는 붉은 별이요, 맑고 깊은 선녀탕을 적(赤) 색으로 물들이는 붉은 그림자이다. 깎아지른 기암괴석에 뿌리박은 단풍은 가을을 대표하는 오색의 자랑이다. 작은 소로 떨어져 명멸하는 붉은 그림자는 거의 환상이다. 산모퉁이 하나 돌아들면 위세 당당한 흑(黑) 색의 독주암이다. 고개를 잔뜩 뒤로 젖혀야 정상에서 혼자 산다는 신선을 만날 수 있을 만큼 까마득히 높다. 하얀 도복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황 청 백 적 흑의 오방 정색 즉 오색을 눈으로 찾으며 물소리를 따라 오른다. 오르다 뒤돌아보기를 수 번, 올려보는 경치도 좋지만 내려보는 경관도 그에 못지않다. 돌연, 아가씨의 이쁜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나를 부른다.
“할아버지, 저 좀 보세요.”
돌아보니, 여름에 왔을 때 만났던 돌양지꽃이다. 반갑고 기쁜 맘으로,
“잘 지냈어? 지난여름이 비도 많고 바람도 많았는데…”
큰 바위에 터를 잡고 사는 노란 꽃과 초록 잎이 예뻤던 돌양지꽃, 어언 꽃과 잎은 말라버리고 명맥만 남아 이슬 눈으로 나를 본다. 꽃을 피우던 시절에는 오랫동안 바라보며 얘기하고 사진도 찍고 하던 할아버지가, 세월이 쌓여 쇠락해지고 볼품없어졌다 하여 그냥 지나쳐 가다니 어찌 서럽지 않았으랴. 돌양지꽃의 한살이가 마감되는 계절이다. 출중했던 미색도 세월 앞에서는 부질없다.
오르는 동안 만경봉이 보였다 사라지기를 여러 번, 돌 터널 금강문을 지나 몇 개의 출렁다리에 흔들리며 가벼운 기분으로 오른다. 중국의 장자제(張家界)가 아름답다 하지만, 오색의 주전골에는 비할 바 아니다. 기암괴석으로 병풍을 두르고, 단풍나무 소나무 생강나무 등 삼원색으로 그림을 그려 놓은 것을 장자제에서는 본 적이 없다. 규모 면에서는 장자제, 아름다움에서는 단연코 오색 주전골이다.
용소폭포 조금 아래쪽에는 작은 폭포에 붉은 단풍이 걸쳐 있는 초록색 소(沼)가 있다. 맑고 깊어, 높고 푸른 가을이 비치는 소이다. 오래되어 누추해진 영혼을 씻어 헹구고 싶어 진다. 눈을 감고 소로 떨어지는 폭포 소리에 집중했다. 바로 옆 함박꽃 이파리 흔들리는 소리 들리고, 어디선가는 찌르레기 새도 울었다. 자연이 빚어내는 화음은 맑은 영혼 위에 꽃 비를 내려주었다.
조금 가다, 바위에 붙어사는 오래된 친구를 찾았으나 안보였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으려던 찰나에 "나 여기 있어요!" 하며 튀어나온다. 이름도 수더분한 바위떡풀. 이름은 수더분하지만, 자태는 기품과 재색을 겸비한 양반집 규수이다. 둥그스름한 잎은 연화대좌 앙련(仰蓮)을 닮아 존엄하고, 가느다란 줄기의 하얀 꽃은, 하늘을 나는 천인의 피리소리인 양 가냘프다. 성덕대왕 범종의 비천상을 닮았다.
용소바위에 도착했다. 이무기 두 마리 중에 승천하지 못한 암 이무기가 빠져 죽었다는 전설로 널리 알려진 소(沼)이다. 소도 좋지만, 바위틈에 숨어 살짝 내다보는 바위채송화가 더 보고 싶다. 다른데 어디서도 본 적이 없고 만난 지 벌써 오 년이 넘었다. 그렇게 오래 만나 왔건만 한 번도 속마음을 나눈 적이 없다. 꽃을 본 적이 없다. 노란 꽃을 피운다는 얘기를 풍문으로 들었을 뿐, 범부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꼭꼭 숨어 있다. 내 꼭 다시 찾아오리라.
체력이 더 오르기에는 무리이다. 또 하나의 의식이 남아 있으니 내려가자. 올라갈 때 못 본 꽃, 내려갈 때 만날지 누가 아나? 은퇴자 삶이 시작되자 젊은 시절에는 보이지 않던 여유가 많이 보여 좋다. 여백이 보이니 시간이 아름다워지며 행복이 충만해지는 느낌이다.
독주암 바로 아래의 오색 선녀탕 위에서 돌탑 쌓는 의식을 해 온 지 삼 년 째다. 이 자리에는 잘 다듬어진 적당한 크기의 대석(臺石)이 있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 초석이 튼튼해야 공든 탑이 오래가는 법이다. 대석은 큰 물에도 흘러가지 않고 잘 살아 있다. 높이 쌓으려면, 마음도 곱고 모양도 예쁜 돌을 만나야 한다. 공들여 주운 돌을 조심조심 하나씩 올려본다.
평정심과 보리심(菩提心)을 잃지 않으려 주문을 외우며 한 층 한 층 차례로 올리다 보면 구 층에 다다른다. 예전에는 내가 본 탑 중에서 가장 높았던 13층 탑을 쌓았으나, 요즈음은 많으면서도 꽉 차지 않아 여백이 있는 구 층 탑을 쌓는다. 마지막으로 마음의 돌 하나 상륜부에 올리고 나니, 짐 하나 덜어낸 듯 내 맘이 가볍다. 다음은 하늘에서 내려온 정수(淨水)를 길으러 계곡으로 내려간다. 시린 물에 손을 담그고 빈 물병에 물을 가득 담아 쌓아 놓은 탑 위로부터 흘러내린다. 관불의식(灌佛儀式)이다. 돌탑은 모습이 선연한 보살님으로 현신한다. 돌탑에 아니 보살님에게 두 손 모으고 허리 숙여 합장을 올린다.
탑 뒤쪽으로는 오색의 단풍이 풍성하다. 이 탑과 만나는 모든 이가, 오색이 창연한 극락정토에 드신 듯 행복하시기를… 나무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