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영혼
그가 나이 오십을 갓 넘겼을 때였다. 서울 강남 세브란스 병원에서 폐암 판정을 받았으나 항암치료를 거부했다. “생명의 연장을 얻는 대신에 자유를 담보해야 한다면, 자유를 얻고 생명의 연장을 포기하겠다. 자유를 지불하고, 생명을 구걸하고 싶지는 않다.” 그의 거절의 변이었다. 세상을 떠나기 이삼일 전까지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혼자만의 세상을 자유로이 산책하다 홀연히 갔다. 자유는 외로움이라고 늘 말했듯이, 외롭지만 자유로웠던 오십 생을 그렇게 마감했다.
나는 초중〮고〮등학교 시절을 전주의 중심에서 도보로 30분 정도 떨어진 ‘서낭댕이’라는 마을에서 살았다. 6ㆍ25 전쟁이 끝난 지 오륙 년이 지났음에도, 동네에서 가까운 산들은 당시의 피폐한 살림처럼 민둥산이 되어버린 채 황토가 흐르고 있었다. 뒷산에는 불에 그을린 당솔나무 한 그루가 고독한 듯 홀로 서 있었다. 전쟁 때 당솔나무 앞에 사람을 세워놓고 총질했다는 이야기를 어른들에게서 듣고 나서는 가까이 가기 무서웠던 나무다.
바로 앞집에 진환이라는 2년 선배가 살고 있었다. 그가 중학교 3학년이 된 해 이른 봄, 생뚱맞게 봄맞이를 가자고 했다. 보리가 새파랗게 자라는 들판을 걸었다. 아지랑이 아른거리고 뻐꾸기 우는 봄이 거기 있었다. 그는 갑자기 하늘을 쳐다보며 “저 소리 들려?”라고 물었다. 종달새 두 마리 하늘 높은 곳에서 ‘지지배배 지지배배’ 지저귀며 놀고 있었다. <봄처녀 제 오시네. 새 풀 옷을 입으셨네. 하얀 구름 너울 쓰고….> 목청을 높여 노래를 불렀다. 동요 아닌 가곡을 부르는 모습에 매료되었고, 봄이 생명의 계절이라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한 번은 전주 아중 저수지를 따라갔다. 둘레가 3km나 되는 저수지를 헤엄쳐 일주하겠다고 했다. 자동차 튜브에 입으로 바람을 불어넣고 긴 끈을 묶어 나에게 주며 따라오라 했다. 팔을 몇 번 휘둘러 체조를 하고는, 차고 깊어 시퍼런 저수지로 서슴없이 뛰어 들어갔다. 나는 밖에서 튜브를 들고 걷고, 그는 헤엄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절반쯤 지났을 때 그는 지쳐 보였고 삼분의 이쯤 지났을 때는 얼굴이 새파랬다. 튜브를 던지라는 손짓을 하였다. 뭍으로 나오더니 가쁜 숨을 헐떡거리며 쓰러졌다. 얼굴은 새파랗고, 입술은 검푸르게 되어 떨고 있었다. 다리와 팔을 정성껏 주물러 주었다. 한참 후에 “자연을 이길 수는 없어!”라며 웃었다.
내가 수업료를 내지 못해 정학 처분을 당한 고등학교 여름방학 때였다. 그는 우리가 직접 돈을 벌자고 제안했다. 새로이 초등학교를 짓는 토목 공사장으로 갔다. 그때는 굴삭기 같은 것도 없이 모든 토목공사를 사람의 손으로 하던 시절이었다. 터파기 공사로, 높은 곳의 흙을 파서 낮은 곳을 메우는 ‘땅 띠기’를 했다. 공사장 십장*이 내주는 전표에 이름과 주소를 적고, 곡괭이 2개, 삽 2개, 괭이 2개, 싸리나무 삼태기 2개, 손수레 1개를 받아 작업을 시작했다. 7월 더위가 얼마나 혹심한지, 얼마나 땀을 흘릴 수 있으며 물을 마실 수 있는지를 배운 극한 노동의 시간이었다. 이틀 작업을 하고 사흘을 앓았지만, 머리만은 맑았다.
평일에도 자주 학교에 가지 않고 가방을 든 채로 완주군 용진면 소양천으로 물고기를 잡으러 갔다. 법수*라는 유리 도구를 사용했는데, 쏘가리, 피라미, 동자개라 부르는 빠가사리가 주로 잡혔다. 책도 읽고 물놀이도 즐기며 종일토록 자유로이 놀았다. 특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의사 지바고’와 ‘레 미제라블’등 감명 깊게 읽은 책 이야기를 했는데, 들으면서 즐거웠고 감동도 많이 받았다. 잡은 고기는 바로 엄지손톱으로 배를 따서 내장을 빼 버리고, 작은 몽돌 위에 널어 말렸다. 낙조를 즐기다가 어둠이 내리면, 주막에 들러 법수를 맡기고 잡은 물고기와 막걸리를 바꾸어 마셨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이면, 소양천의 하늘과 들판은 온통 진홍색으로 물들어 황홀함 그 자체였다. 붉게 물든 하늘과 그 빛을 받아 분홍빛으로 반짝이는 물비늘은 그림에서나 볼 수 있는 현란한 환상의 세계였다. 하늘은 핏빛으로 물들었고, 우리는 죽은 자처럼 넋을 잃고 있었다. 불타는 듯한 구름은 우리를 전율케 했다. 구름 아래로 쏟아지는 붉은빛 속에서 신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나는 신비와 경외로 몸을 떨었다. 훗날 노르웨이 여행 중에 ‘뭉크’의 작품 ‘절규’에서 핏빛 빨강의 하늘을 보며 소양천의 진홍빛 하늘을 떠올렸었다.
별과 벌레만이 깨어 있는 여름날 늦은 밤, 소나무 한 그루 서 있는 무덤가 잔디 위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누었다. 폭신했다. 밤이슬을 흠뻑 맞으며 하늘의 별을 세고 있었다. 별은 맑고 컸다. 가끔 별똥별이 하늘에 길고 밝은 포물선을 그렸다가 사라졌다. 그가 말했다. “모든 생물은 몇 억 년일지 모르는 세월 동안 자손을 퍼뜨리며 살아왔다. 생존과 번식이라는 너무도 분명하고 숭고한 자연의 법칙에 반하는 부류가 있다. 신부 수녀 승려가 그들이다. 그들은 대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자들이다.”라고 말했다. 고등학생이었던 나에게는 신선했고 충격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런 본인은 결혼도 하지 않고 혼자 살다 세상을 등졌다.
그는 “넓은 들판 가운데로 흐르는 강이 좋다”라며 한평생을 제방을 쌓는 공사장을 옮겨 다니며 일일 잡부로 일했다. 35cm 정도 화강암의 견치돌*을 맞추는 공사의 보조를 하였다. 비 오는 날이면, 막걸리를 마시고 비를 맞으며 혼자 걷기를 좋아했다. 그리고는 탄식인지 노래인지 모를 ‘열두 냥 인생’이라는 당시의 유행가를 자주 불렀다. <비 오는 날이면 님 보러 가고, 달 밝은 밤이면 별 따러 간다./하루에 품 삯은 열 두 냥 금, 우리 님 보는 데는 스무 냥이라./사랑도 좋고 친구도 좋지만 막걸리 따라주는 색시가 더 좋더라.> 그는 “어느 누구도 남의 노동을 착취하는 것은 죄악이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의 아버지는 고등학교 선생님이셨다. 십일 남매 중에 다섯째로, 위로 형님 두 분, 누님 두 분, 아래로 남동생이 둘, 여동생이 넷이었다. 다른 형제자매들은 모두 중ㆍ고등학교 선생님이었다. 그 역시도 전주에서 가장 입학하기 어렵다고 알려진 중ㆍ고등학교에 다녔다. 그는 중학생 때부터 책을 즐겨 읽었다. 병문안을 갔던 날에도 책을 읽고 있었다. 체격도 좋고 용모도 준수했다.
그는 안락한 삶을 위한 새장의 새가 되기를 거부하였고, 풀숲을 맘대로 기어 다니는 꿩이 되기를 원했다. 많은 책을 읽어 하늘을 높이 나는 대붕(大鵬)이 되기를 소원했지만, 종달새도 되지 못했다. 그가 희망했던 자유는 습하고 그늘진 곳에서만 자라는 버섯 같은 자유였다. 아무리 예쁘게 핀 버섯이라 한들 화분에 심어 방안에 두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기 삶의 주인으로 뒷동산의 당솔나무처럼 꿋꿋하게 살다가 푸른 채로 돌아갔다. 항암치료라는 감옥에 자기를 가두지 않았고, 안락을 위하여 자유와 자신을 파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성인이나 황제가 만든 경전이나 법전보다는 우주와 자연의 섭리를 따르려 했던 아름다운 영혼이었다. 홀연히 저 세상으로 간지 이십여 년이 지났다. 아마도 그는 천상의 무위자연에서 유유자적 행복할 것이다.
* 십장: 현장 작업에 있어서 몇 명 단위의 집단을 지도 감독하는 기능 노무자.
* 법수: 옛날에 강이나 내에서 물고기를 잡는 유리로 만든 도구.
* 견치돌: 돌 쌓기에 쓰이는 정사각뿔 모양의 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