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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석 Feb 23. 2024

정월대보름 달집 태우기

우리 민족의 정체성


 정월대보름이 오면 잊지 못할 추억이 하나 보름달처럼 떠오른다. 중학교 삼 학년 때였을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셔서인지, 당고모님들도 나를 친근하게 대해 주셨다. 전북 순창군 동계면 장녁굴이라는 20호쯤 사는 작은 마을에 당고모님이 살고 계셨다.  


 내가 놀러 간 날이 마침 정월대보름 날이었다. 온 동네의 남녀노소가 모두 나와 달집 사르기를 하는 진기한 구경을 하게 되었다. 산불을 염려하여 넓은 논 한 가군데의 비교적 넓은 장소를 골라 달집을 지었다. 굽어서 쓸데없는 통나무를 모아, 어른 키의 서너 배 정도의 움막 같은 뼈대를 세웠다. 달집 한가운데의 땅을 파고 고구마를 넣고 흙으로 덮었다. 중간중간에 꽤 굵은 나뭇가지를 걸치고, 짚 다발을 올리고 바깥쪽으로 청솔가지를 꺾어다가 빈틈없이 꼽았다. 사이사이에는 대나무를 꼽았는데, 가지와 이파리가 붙은 채로였다. 그 위에는 마른 깻대, 고구마 줄기, 환삼덩굴 등 밭에서 거두지 않은 볼품이 없고 쓸모를 몰라 천대받는 허접한 것들을 가져다 쌓았다. 


 마지막으로 달집에 대나무 깃발을 꽂았다. 아침부터 ‘農者天下之大本 也’라고 쓴 깃발을 들고 농악을 울리며 뜰밟이를 했던 그 대나무깃발이다. 오방색으로 치장한 깃발을 들고 가가호호 돌아다녔기에 동네사람들의 소원과 염력이 스며들었을 것이었다. 신령스럽기까지 했다. 깃발을 꽂는 절정의 순간, 그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마을의 번영과 무탈을 바라는 염원이 하나로 모아지는 순간이었다. 화룡점정인 깃발 꼽기 의식으로 달집은 비로소 완성되었다. 


 저녁밥을 일찍 먹고 나온 아이들은, 아직 해가 남아 있는데도 신이 났다. 뭐가 그리 좋은 지 논두렁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부산하게 뛰어다녔다. 조금 큰 아이들은 며칠 전부터 동네에 버려진 깡통을 주워 구멍을 여러 개 뚫고 줄을 매어 오늘을 준비했으니 많이 설레었으리라. 준비한 깡통에 불을 담아 돌리기 시작했다. 몇 번만 돌려도 붉은 불덩어리가 원을 그리며 돌아갔다. 모든 악귀가 다 물러갈 것 같다.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자 깡통의 불이 황혼의 진홍빛과 어울려 기막힌 조화를 이루었다. 


 초가와 기와집 호롱에 불이 하나 둘 켜지자, 서쪽하늘 작은 별과 큰 별도 하나 둘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어른들도 달집에 모여 즐거운 웃음과 덕담을 주고받았다. 어둠이 내리기 전부터 풍물놀이를 시작하였다. 놀이패들은 상쇠의 마치에 맞춰 꽹과리 징 장구의 가락을 바꾸어 가며 모인 사람들의 흥을 돋우었다. 혼자라서 외로운 소고재비의 익살스러운 몸놀림과 얼굴표정을 보고 사람들은 웃고 떠들며 흥에 겨웠다. 평소에는 말수도 적고 얌전하셨을 것으로 보이는 동네할머니 한 분이 흥을 못 이겨 장단에 맞춰 어깨춤을 추기 시작했다. 웃지도 않고 춤을 추는 능청스러운 춤사위에, 동네 아주머니들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음보가 터졌다. 할아버지도 아저씨도 나와 춤을 추고 동네 꼬마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동네 이장이 등에다 바가지를 넣고 곱사춤을 추어 대니 온통 춤판이고, 웃음판이었다. 상쇠가 자꾸만 앞산을 바라본다. 달이 뜨는 시간을 가늠하려는 것이다. 다시 마치를 바꾸어 모두를 조용하게 했다.  


 상쇠는 소리를 높여 “우리 장녁굴에 달님이 오싱개, 우리 모두 마음을 다 져서 건강과 풍년을 빌어 보도라고잉. 달이 뜨면 소원을 한 개씩만 비쇼. 두 개 빌 먼, 후에 세금 나올 팅개. 반다시 한 개 싹만 빌어야 헐 것이여. 자 소원들 빌 준비되었으면 달님 맞을 소리를 해보더라고. 쿵더쿵쿵더쿵” 잠시 후에, 크고 둥근달이 앞산에서 떠오른다. 어쩜 저리도 빨리 오르는지, 오르는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눈 몇 번 깜박이니, 맑고 시원하며 연꽃 같이 아름다운 보름달이 두둥실 앞산 위로 떠올랐다. 왜 가슴은 이리도 두근거리는지…. 

  

 이장이 마을에서 제일 연장자 할아버지를 불러냈다. 짚을 한 주먹 쥐어 주고 불을 붙이게 하셨다. 떨리는 손으로 달집에 불을 붙였다. 마른 짚에 마른나무와 덩굴만으로 지은 달집은 금방 집채 만한 불덩어리로 변했다. 송진덩어리 청솔가지는 연기와 함께 뜨거운 불길을 하늘로 뻗는다. 송진은 가연성이 좋아 옛날에는 자동차 휘발유 대신으로 썼다는 말이 있다. 꼽아 놓은 대나무에도 불이 붙었다. 한마디 마디마다 품고 있던 세월이 터지며 펑펑 소리를 낸다. 겨울 대나무는 대가 여물어 그 소리가 통쾌하였다. 커다란 불덩어리 너머로 둥그런 달이 뜨고 할머니, 아주머니들은 두 손을 합장하고 불꽃과 들꽃을 향하여 절을 해댄다. 한 가지만 하라는 기도는 그칠 줄 모르고, 합장한 두 손에 소원을 담아 달님을 우러른다. 상쇠는 흥을 돋우려는 듯, 신나는 가락으로 마치를 바꾸었다. 커다란 불길 주위를 돌며 흥을 돋우었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모두 나와 덩더꿍 덩더꿍 춤판이었다. 


 이장이 동네의 평안을 기원하는 소원지를 들고 나왔다. 커다란 한지에 먹물을 듬뿍 묻혀 쓴 소원지를 들고 읽었으나 동네사람들 웃음소리와 대나무 터지는 소리에 묻혀 버렸다. 소원지를 불에 던지고 고개 숙여 절을 하니, 소원지는 불속으로 들어가 포르르 재가 되어 하늘로 날아갔다. 아주머니 한 분이 다 읽은 책 한 권을 가지고 나와 불 속에 던지며 머리를 깊이 숙였다. 전주로 유학 보낸 아들이 공부 잘해서 성공하게 해 달라고 비는 것이란다. 또 한 아주머니는 노망 들어 누워 있는 시어머니의 저고리 동정을 뜯어와 불 속에 던지며 건강하게 해 달라고 두 손을 싹싹 비볐다. 그렇게 간절한 소원을 빌며 달집 태우기는 절정을 향해 갔다. 밤이 이슥하도록.


 아이들은 달집 태우기보다 깡통 불놀이가 더 재미있다. 깡통에 불을 담아 빙글빙글 돌리니 금세 벌건 불꽃이 돌아간다. 큰 원을 그리며 돌아가는 불꽃 송이 안에서 보름달이 환히 웃는다. 장관이다. 아이들은 모두가 “하나 둘 셋” 하며 구령을 붙이고, 깡통불을 하늘로 일제히 던졌다. 깡통은 높고 멀리 날아가면서 몇 개의 불덩어리 포물선을 그리고, 깡통에 뚫어 놓은 구멍으로부터 떨어지는 작은 불꽃들은 경쾌하고 화려했다. 아이들은 자기가 더 멀리, 더 높이 던졌다고 다툼질을 하면서도 신이 났다. 또 우르르 달려가 깡통을 주워 같은 놀이를 밤이 깊은 줄도 모르고 계속했다. 


 나이 많은 노인들은 하나 둘 돌아가고, 젊은 청장년과 불꽃놀이에 정신이 팔린 아이들만 남았다. 저녁 무렵에 술도가에서 배달된 막걸리 동이도 바닥을 긁고, 크고 붉던 불꽃도 서서히 사그라지며 달님도 중천에 와 있다. 동네 사람들은 불을 삽으로 헤쳐서 껐다. 행사가 모두 끝났나 했더니 아직 하나 더 남았다. 달집을 지을 때에 묻어 둔 고구마를 꺼낼 차례. 땅 속에 묻어두었던 고구마는 뜨거운 김을 내뿜는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에게 한 개씩 돌아갔다. 두 손으로 떡 쪼개니 노란 속살이 피어오르는 김과 함께 먹음직했다. 입으로 불어가며 한 입을 물으니 향기조차도 꿀맛이다. “왜 이리도 단것이야!” 아이들은 싱글벙글 시끄럽다. 기가 막히게 달고 맛있었다. 


 정월 대보름마다 미국에 사는 외가 형님은 대보름밥상과 달집 태우기를 SNS에 올리며 고국을 그리워한다. 세계 어느 곳에 살더라도 우리는 같은 추억과 전통을 가슴에 담고 살고 있다. 우리 만이 알고 느낄 수 있는 전통과 풍습은 우리의 정체성이고 유전자이다. 이러한 정체성과 유전자야 말로 힘의 원천이요, 애국의 근원이라 생각한다. 우리만의 문화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많은 선열들이 목숨을 걸었던 이유이다. 우리의 문화를 소중히 지키는 것은 애국이요 보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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