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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민아씨 Nov 17. 2024

왜 그만두는 거야?

용기가 아니라 그저 선택입니다.

규모 25명 남짓의 작은 회사부터 중견 기업을 거쳐 대기업까지. 15년 간 4곳의 회사를 다녔습니다. 모든 회사에서 성실하게 일하고 원만하게 생활하다 보니 인사고과도 잘 받고 진심으로 인연을 맺은 동료들이 인생의 친구로도 남았어요.


'회사는 왜 그만둔 거야? 뭐가 힘들었어?'


라는 질문을 대학친구로부터 받았을 때 사실은 힘들어서 그만둔 게 아니었는데, 질문자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대답하게 되더라고요. 뭐가 힘들었지?


가설 1. 일이 힘들었나?

공채로 입사해 회사를 오래 다닌 사람들은 이런 '경력자'를 "잠시 있다가 가려는 사람"으로 정의하더군요. 누구보다 '일'이 재밌고 좋아서, 더 성장하고 싶어서 이직을 택했고 이직한 회사를 내 '마지막'회사라고 생각하며 입사했지만 저마다의 '사정'이라는 게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어쨌든 모든 이가 그러하진 않겠지만 '일'의 관점에서 고된 이직을 할 만큼 내 일에 재미를 느꼈고 더 배우고 성장하고 싶었습니다.

따라서, 일이 힘들었던 건 아니었다에 한표.


가설 2. 사람들이 힘들었나?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을 아시나요. 주위에 또라이가 안 보이면 그 무리의 또라이는 나다.라고 할 만큼 또라이는 꼭 존재합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죠. 이직을 많이 하면서 스스로의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느낀 건 생각보다 사람에 대한 기대치가 없고 정치색이 없기에 "일로써 자신을 입증"한다는 겁니다. 사람의 좋고 싫음을 떠나서 "일"로 대하면 상대도 나를 쥐락펴락하려고 안 하거든요. 주위에서도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으로 평판이 좋아지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나와 결이 맞는 사람들이 좋은 동료로, 친구로 곁에 남게 되니 심리적 안정감이 쌓입니다. 이렇게 보면 사람이 힘들었던 건 아니었다에 한 표죠.

다만! 마지막 회사에서는 함께 일한 팀장과 팀원들이 힘들긴 했어요. 하지만 그건 구조적인 문제였다고 생각해요. 그 회사에 아무 기반이 없는 경력직들이 한순간에 모여서 사업 프로젝트를 해야 했으니까요. 그래도 첫 1년은 나름 좋았습니다. 팀장의 개입 없이 팀원들 스스로가 리딩해가며 모두가 하나의 목표를 갖고 프로젝트를 빌드업했던 1년은 '모두 웃으며 일하고 성과를 달성해 의미 있다'라고 서로를 칭찬하며 마무리했거든요.

그러나, 팀장이 개입하며 사업을 주도했던 1년은 최악였어요. 이고(ego)가 높은 20여 명의 팀원들과 초보 팀장의 컨트롤 안 되는 팀워크, 함께가 아닌 혼자 성과를 독식하고 싶은 욕심 많은 동료, 사업의 성공이 아닌 자신만의 KPI가 중요했던 팀원들과 본인에게 유리하게 KPI를 짜낸 팀장. 모두가 이기적이고 개판였지요. 결국 모든 것이 공중분해되고 난 후에야 처음부터 잘 될 수 없는 조직이었다.라는 결론을 냈습니다. 결국 비교도 안 되게 좋은 리더십을 가진, 나를 믿어주시는 새로운 팀장님을 만났지만, 이미 조직의 공중분해 과정에서 느꼈던 회사와 사람들에 대한 환멸로 직장 생활은 정리하는 게 맞다고 느꼈습니다.

사람이 힘들었다는 반은 맞고 반은 틀렸으므로, 0.5 표입니다.


가설 3. 직장인보다는 사업가 기질인가?

내 성과에 대한 PR이나 나서기를 드럽게도 못 하는 선비(?) 같은 성향 때문에 늘 느꼈던 생각은 '회사에 맞지 않는다'는 거였죠. 어찌 되었든 회사라는 곳은 피라미드 구조여서 PR을 잘하고 존재감이 돋보여야 계속 위로 위로 올라가며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요. 위로 안 올라가면 문제 있냐고요? 문제는 없죠.. 그런데 까마득히 어린 내 후배상사가 되고, 정말 일 더럽게 못하는데 '공채 남자'이기 때문에 고과를 잘 받아 먼저 승진하는 경우라면? 속이 뒤틀리지 않겠습니까. 직접 겪은 일은 아니지만 모시는 여자 상사분들이 어떤 처우를 받는지 옆에서 보다 보면 미래에 희망은 그다지 없어 보이긴 했어요. 그래도 나 같은 사람도 회사 윗선에 있어줘야 일로서 돌아가는 조직이 되지 않겠냐는 야무진 꿈을 가지고 끝까지 다녀보려 했죠. 하지만. 역시는 역시입니다. 직장에 느끼는 환멸감은 야무진 꿈을 이겨버렸고, 그간 쌓아온 내공이 이제는 무너지지 않으려는지 '내 사업'을 해보겠다는 결심이 들더군요. 여기에는 부업으로 하려고 실무교육을 받으며 해본 온라인 쇼핑몰에서 작게나마 성과도 내보니, 회사 밖에서도 잘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 동기가 되었어요.

사실 회사가 아닌 다른 곳에서 내가 무언가 할 수 있다는 걸 확인할 길이 없었기에 생계를 위한 '직장인'으로 머물렀을 뿐, 다른 기회가 있고 그곳에서 내 생계를 이어갈 수 있다면 회사를 다닐 생각은 안 했을 것 같아요. 대기업의  한 부분에서 일을 완수하는 나보다, 1부터 100까지 결정하고 일하는 게 훨씬 재밌거든요.

그리고 조금이라도 머리가 잘 돌아갈 때 내 사업을 해보고 싶었어요. 혹~시라도 망해도 다시 직장생활을 할 수 있는 나이였음 했고요.

네, 사업가 기질은 아니지만. 때가 되었다에 한 표입니다.


정리하면,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한 건 그저 '선택'였습니다. 내 앞에 선택지는 무수히도 많고, 그걸 선택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죠. 선택할 '시기'가 왔고 '동기'가 생겼을뿐예요. 무엇보다 제 상황도 이런 선택을 내릴 여건이 충분했죠. 결혼해 아이가 있거나 대출을 갚아야 할 집이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요. 신기하게도 회사를 그만두기 약 1년 전부터 물욕도 없어졌어요. 이미 소비를 너무 많이 해서인지 필요한 것도 없고 모든 것이 넘쳐서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자연스럽게 한 달에 지출하는 돈이 훅 줄었습니다.


선택에 대해 지인들로부터 많이 들은 얘기는 용기 있다는 거였어요. 하지만 용기도 아니고, 어리석은 결정도 아닙니다. 제게는 높은 연봉과 넉넉한 소비만 포기하면 되는 정말 단순한 선택였어요. 그리고 이 선택으로부터 9개월이 된 지금, 적어도 내년까지는 이 선택을 계속 유지할 것 같아요. 훅훅 줄어드는 통장 잔고를 보면 놓아버리고 나온 제 연봉이 아른아른 거리지만, 그보다 더 소중하게 세상에 내놓고 싶은 새로운 꿈들이 생겨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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