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나 자체는 신용이 없군요.
이제 통장 잔고가 곧 나입니다.
오늘의 기록 이전에, 직장인에서 사업자로 전환된 후 가장 충격적으로 다가온 일화를 하나 소개할까 합니다.
회사를 그만둔다는 생각을 갖기 몇 개월 전, 부동산 열풍 속에서 저도 한때 하우스푸어를 꿈꾸며 아파트 매매를 알아보고 있었지요. 그때는 집값이 아주 쬐금 떨어졌던 시기이기도 했고, 더 이상 오피스텔 세입자로 전전하며 살기에 지쳤다고 생각하는 고연봉의 대기업 직원였거든요.
점심시간에 찾아간 회사 근처 은행에서 대출이 얼마나 나올지 나름 생각했던 아파트 단지를 얘기하며 상담을 받았는데, 와우. 지금과 달리 대출이 잘 나올 때였어서 충분히 매매를 할 수 있을 만큼 대출이 넉넉하게 나오더군요. 역시 대기업 직원은 대출이 잘 나오는구나.. 오호라.. 하며 나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후, 더 이상 아무 곳에도 소속되지 않고 홀로서기를 한 저의 신용이 무엇으로부터 나오는지 알게 되었어요.
퇴사 몇 개월 전, 오피스텔은 전세에서 월세로 전환되었고 전세보증금을 여러 은행 통장에 분산해서 예금으로 돌렸습니다. 그중 한 곳이 기업은행였어요. 기업은행에 계좌가 없어 입출금 통장을 만들어야 했는데 한 겨울 영하 10도 날씨에 밖에 나가기가 너무 싫었습니다. 그래서 비대면으로 입출금 통장 계좌를 만들고, 제 나름 큰돈을 예금으로 거치해 뒀어요. 그리고 예금 만기가 되어 돈을 다른 은행으로 옮기려고 보니, 비대면으로 만든 계좌는 이체 한도가 소액인 한도제한 계좌로 묶여 있었고, 이를 해제하러 직접 지점에 방문했습니다.
(나) "비대면으로 만든 계좌가 한도 제한이라고 해서 풀려고 왔어요."
(직원) "직장인이신가요? 사대보험에 들어 있으세요?"
(나) "아뇨."
(직원) "그럼 지금 풀어드릴 수가 없어요."
(나) "네??"
(직원) "공과금 납부를 6개월 이상 이 통장으로 하시면 풀 수 있어요."
(나) "네.."
하고 돌아 나오다가
(나) "그럼 목돈이 있는데 못 빼는 거예요? 기업은행에 예금을 들어야 하나요?"
(직원) "아, 예금 만기가 되셨던 거예요? 그럼 잔고부터 우선 확인해 드릴게요."
잔고 확인 후 활짝 웃으며,
(직원) "고객님, 잔고 금액이 OOO이상이셔서, 바로 한도 해제해 드릴게요."
(나) "네..."
회사생활을 시작한 15년 전부터 회사를 그만둘 때까지. 늘 어딘가에 소속되어 사대보험이 납부되는 사람이었고, 이직 사이에 쉬는 때라도 직장인으로 만든 신용카드와 통장으로 신용이 유지되는 사람이었지요. 대출받는게 어렵지 않았고, 신용카드사에서는 한도 올려줄테니 신청하라는 문자를 자주 보내왔습니다. 인터넷뱅킹 수수료는 늘 면제였고, ATM기 출금 수수료도 면제되어 무료였어요.
그러나, 퇴사하고 "급여"로 찍히는 돈이 없어지자 냉정하게도 ATM기 수수료는 유료가 되었고, 사대보험에 가입되지 않아 한도 제한 계좌도 바로 풀 수 없었으며, 이제 대출은 생각도 못하고 아파트 매매는 커녕 전세자금대출도 저 먼~ 얘기가 되었습니다.
내가 가진 자유와 맞바꾼 건, 어쩌면 신용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속했던 기업이 가진 신용에 얹혀있었던 것이죠. 유명하신 회장님이 말하길 매출이 높으면 은행에서 대출 좀 받아달라며 서류를 가지고 온대요. 저금리로 사인만 하면 되게 문서를 작성해서 가지고 온답니다. 어쩌면 한 사람의 사업가로 느끼는 불안정한 마음과 사업체가 유지되는데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는 금융의 차별이 한몫하는 것 같습니다.
제 신용은 당분간은 제 통장 잔고에서 나올 것 같아요. 아기자기한 매출로는 소득이 있는 사업체로 인정받기 어려우니까요.
내년에 이루고 싶은 제 바람은 매섭게 줄어드는 통장 잔고가 버텨주는 동안, 통장에 "급여"가 다시 찍히게 되는 것이에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상상 이상으로 어려운 일임을 사장이 되어서야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