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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는 여행자 이주현 Mar 12. 2024

사케 향에 취해 설국을 거닌 하루

2024. 3. 10. 니가타 사케&온천 투어 2일차 - 폰슈칸, 양조장

느지막히 노천탕에서 온천을 즐기고 캔맥주 한잔에 하루를 정리하느라 새벽 1시반을 넘겨 잠이 들었는데, 아침 6시 눈이 떠졌다. 일상에선 이불에서 빠져나와 몸을 일으키는게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인데, 여행길에 나서면 동트기전 하루를 시작한다. 


기상 습관만이 아니다. 일상에선 잠이 드는데 30분 이상 뒤척이는 편인데, 여행지에선 자리에 누우면 금새 숙면을 취한다. 장이 좋지않아 화장실도 하루에도 몇번씩 불규칙하게 오가곤 하는데, 여행중엔 그런 경우가 거의 없다. 좋아하는 일 앞에선 생체리듬도 변하는 법. 


하루 아침에 설국으로 변한 세상을 즐기러 산책을 하고 싶었는데, 계속 거세지는 눈발에 발길을 거뒀다. 

산책 대신 따뜻한 온천물로 몸을 깨우고 하루를 시작한다. 매일 아침을 이렇게 시작할 수 있다면 열배는 건강해질 것 같은 느낌이다. 


유자와 료칸의 노천 온천. 설경 아래서 온천수에 몸을 담그면 행복한 기운이 온몸을 감싼다. 
유자와 료칸 호텔 로비 뒷뜰로 바라보이는 풍경. 3월에 이 정도 눈이 쌓여있는데 예년보다 적은 거라고


조식은 일행들과 편의점 쇼핑으로 간단히(?) 해결해야 했다. 어제밤 숙소 도착 시간이 늦어 가이세키(료칸 호텔에서 흔히 석식으로 내오는 일본식 정찬) 준비가 안됐고, 저녁 주문이 안되니 조식도 안나온다고. 

예전에는 입실이 늦어도 단체 손님들에겐 도착시간에 맞춰 가이세키가 제공되었는데, 코로나 이후로 인력이 줄면서 생긴 변화라고 한다. 


유자와 마을엔 밤새 내린 눈이 아침에도 계속된다. 건물이며 차며 온 세상이 눈으로 가득한데, 도로는 말끔하다. 길 가운데 곳곳에 뚫린 작은 구멍으로 끊임없이 따뜻한 온천수가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집앞 눈을 치우는 이들의 눈삽도 우리처럼 길가 벽쪽을 향하는게 아니라 도로 한가운데를 향하는 흥미로운 장면을 볼수 있다. 


유자와 마을에선 도로 곳곳에 따뜻한 온천수가 흘러 나와 결빙을 막는다 
부지런히 눈을 치우는 사람들. 온수로 눈을 녹이는 도로 가운데로 눈을 치운다


눈을 맞으며 첫 여정으로 택한 곳은 설국관(유자와 역사민속자료관)이다. 3층짜리 아담한 건물인데 한쪽엔 마을의 역사를 기록해 놓았고, 한쪽엔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그의 소설 설국을 기념해놓은 곳이다. 


내겐 소설 설국의 잔영보다, 진짜 설국 유자와에서 살아온 이들의 역사가 더 흥미로웠다. 

유자와엔 264센치의 기록적인 폭설이 내린 적도 있고, 140일동안 그치지않고 매일 눈이 내린 기록도 있다고 한다. 눈이 너무 많이 내려 농사를 짓기 힘들어 먹고살기 어려운 곳이었는데, 지금은 그 눈 덕분에 스키장으로 먹고산다고. 실제 마을 곳곳마다 렌탈숍이 눈에 띄고, 지나다니는 이들도 대부분 스키 복장을 하고 있다. 


일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유자와의 한 여관에 머물며 실존하는 한 여성을 모델로 설국을 집필했다고 한다. 설국관엔 소설 속 여인의 초상과 함께 실제 인물의 사진도 같이 전시되어 있는데, 소설 속 이미지와는 좀 다르게 느껴진다. 

소설 설국은 6년전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때 잠시 읽다 말았다. “국경의 긴 터널을 지나니 설국이었다” 말고는 남아있는 기억이 거의 없다. 


1968년 일본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가와바타 야스나리. 아름답고 유려한 문체로 유명했다고 한다
소설 설국의 첫 문장.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니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같이 온 후배 한명이 소설을 재밌게 읽고 와서, ‘타카한’이라는 설국을 집필했던 여관까지 가보고 싶어해서, 나는 폰슈칸을 즐기기 위해 유자와역으로 발길을 돌렸다. 


여행에선 자기 마음이 가는대로 움직여야 한다. 일행들과 스케줄을 맞추느라 자신의 취향을 조금씩 양보하다보면, 거기서부터 여행지에서의 자유와 행복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마음이 맞는 여행 친구들과 같이 다니되, 낮엔 자유롭게 각자의 성향대로 움직이고. 저녁엔 맛있는 음식&술과 함께 각자가 보낸 하루의 기억을 나누는게 여행을 즐기는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폰슈칸은 쉽게 말하면 사케 자판기 상점이다. 

일본에서도 이 곳 유자와 역과 니가타 역에만 있다고 한다. 입장료 5백엔을 내면 다섯개의 코인과 작은 잔 하나를 주는데, 1백여개가 넘는 사케 중 자기 맘에 드는 걸 골라 마시면 된다. 대부분은 코인 한개를 넣으면 되고, 간혹 두개나 세개 짜리 비싼 사케도 있다. 술 욕심이 많은 나는 1천엔을 내고 열개의 코인을 얻었다. 


유자와 역 폰슈칸 사용법. 맘에 드는 사케 자판기에 잔을 두고 코인을 넣고 버튼을 누르면 끝 


코인 열개, 한잔에 만원짜리 사케도 하나 있다. 점원에게 왜 유독 비싼지 물어보니, 술밥에서 술을 짜낼 때 보통은 거름망에 압력을 가해 원주를 내리는데, 이 아이는 일체의 압력을 가하지 않고 자연적으로 한방울 한방울 떨어지는 술만 사용했다고 한다. 


또 한가지 궁금한게 있었다. 폰슈칸 한켠에 시음용으로 가지런히 놓여있는 수십개의 소금통. 데킬라도 아니고 사케 안주로 소금을? 

점원 말에 의하면, 지금처럼 사케 맛과 품질이 좋지 않았던 옛날엔 술의 풍미를 강하게 느끼기 위해 소금을 같이 먹던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 이야길 듣고나서 소금 한모금을 혀위에 올리고 사케잔을 비우니 뭔가 진한 맛과 향이 올라오는 것 같기도 하다. 


유자와 역 구내에 있는 폰슈칸. 소액으로 다양한 사케를 조금씩 맛볼 수 있다 
폰슈칸 한쪽 테이블에 놓여있는 소금통. 소금과 함께 사케를 맛보면 좀더 진한 풍미를 느낄 수 있다


오전부터 예닐곱 잔의 술로 속을 따뜻하게 덥히고서 2차를 위해 핫카이산 양조장으로 향한다. 

이자카야를 즐겨 찾는 이라면 한번쯤은 봤을 법한 핫카이산은 유자와에서 차로 40분쯤 떨어진 곳에 있다. 전체 주조 과정을 볼 수 있는 프로그램도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우리 일행은 설장고를 잠시 구경하고 가볍게 시음을 하는 30여분짜리 체험을 신청했다. 


설장고는 겨우내 내린 눈을 일년내내 보관하는 일종의 자연 냉장고인데 오래전부터 내려온 전통이라고 한다. 사진을 보니 옛날엔 짚으로 엮은 벽 안에 눈을 집어넣어 사용했던 것 같다. 

핫카이산은 커다란 창고 안에서 10미터 가까이 산처럼 눈을 쌓아놓고 술을 저온 숙성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3도의 온도를 유지하는 거대한 냉장 창고에서 익어가는 술 향기가 기분좋게 후각을 자극한다. 


가이드의 안내로 설장고를 지나니 수백개의 오크통과 일본 소주가 담긴 병이 가득한 방으로 이어진다. 이곳에 진열되어있는 소주병은 모두 주인이 있는 것들로, 그들이 지정한 기념일에 맞춰 배송해준다고 한다. 길게는 십수년이 넘게 보관되고 있는 술병들도 있다. 


핫카이산 양조장의 설실 입구. 건물 내 인테리어도 전통과 현대의 멋을 조화롭게 꾸며놓았다
양조장 한 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일본식 소주 진열장. 모두 개인들이 맡겨둔 거라는게 흥미롭다
양조장 체험의 마지막 코스이자 꽃인 시음장. 제한없이 원하는만큼 맛볼 수 있다


이제 시음을 할 차례. 몇잔까지 가능한지 제한이 정해져있지는 않다. 아주 고가의 사케 두 종류만 400엔을 따로 내야 마실수 있고, 나머지는 얼마든지 시음할 수 있다. 

그렇다고 취하도록 마시는 건 예의가 아니니 적당히 마시고 맘에 드는 술을 한병 사는 걸로 양조장 체험은 마무리. 


이제 두시간을 넘게 달려 두번째 온천마을 ‘쿠사츠‘로 향한다. 쿠사츠는 니가타가 아니라 군마현에 자리한 곳으로 일본 3대 온천으로 불리기도 하고, 10대 온천에는 늘 이름을 올리는 곳이라는데, 교통편이 좋지않아 다른 곳에 비해서는 덜 번잡하다고 한다. 


호텔에서 차려준 가이셰키로 저녁을 먹고 일찍 잠들기 아쉬워 밤 산책을 나왔다. 유바타케라는 쿠사츠의 명소엔 밤인데도 사람들이 많다. 우리 일행 외에는 한국인은 없고 거의 일본인들. 내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방문하는 곳이다. 


쿠사츠 온천마을의 중심 유바타케. 재미난 사연이 있는 곳인데 설명은 3일차 편에서


(한국인들에게 그리 친숙하지 않은 쿠사츠 온천마을과 유바타케. 그리고 로컬 술집에서 만난 유쾌한 취객의 이야기는 3일차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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