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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미니 Nov 21. 2021

District 9

우리는 모두 불완전하다

14년이나 지나 영화 District 9를 만났다. 우주라는 공간은 모험과 신비가 가득한 우리가 꿈꾸는 그곳 아닌가? 2050년 지구의 종말을 경고하는 수많은 과학자들 눈에는 지구를 대신할 무한한 잠재력의 공간이겠지만 나에게 우주는 그래비티가 선사한 광활하지만 공허할 것 같은 미지의 세계이고 콘택트에서 보여준 고차원의 외계 생명체가 우주 어딘가에 존재할 것 같다는 막연한 상상을 더해 보는 정도이다. 아이들에게 영화 마션을 보고 알게 된 점을 쓰라 하니 화성은 감자 키울 곳이 못된다는 말을 적었다. 지구가 더 이상 인간의 서식지로서 기능하지 못하게 될 날이 설마 정말로 오겠냐는 막연한 안심 같은 것이 아직 우리에게 있다. 또한 우주는 상상의 영역일 때 아름다운 것이지 복잡한 계산과 과학의 법칙들이 우리를 조여 오는 현실은 거부하고 싶다.  지구의 문법이 전혀 통하지 않는 미지의 공간을 개척하는 것은 과학자들의 몫이어야 한다. 그런데 영화 District 9에는 외계인을 상대하는 과학자가 나오지 않는다. 이미 외계인들은 지구에 당도해 있고 지구인들은 그들을 위해 기꺼이 영토를 내어준다. 평화로울 것 같은 외계 생명체와의 공존은 물론 오래가지 못한다. 영화는 표면적으로 외계인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의 일상에 스며드는 이질적인 존재의 불편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애초에 외계인을 수용한 이유가 인도주의적 명분이 아닌, 그들의 무기를 탐한 무기 군수업체의 탐욕 때문이었다는 설정은 좀 식상하다. 그렇지만 지구인의 안전을 목적으로 프런으로 비하되는 (아마도 prawn- 새우, 영화 속 외계인들의 모습) 그들을 District 9에 몰아넣고 강제 격리시키는 행태를 보면서 그동안 지구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혐오와 차별의 모습을 연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겉으로 평화로워 보이는 우리의 일상이 사실은 보이지 않는 금을 그어놓고 암묵적인 경계와 견제를 통해 불안하게 유지되고 있는 건 아닌지. 위기와 재난 속에서 언제든 인간의 공격성은 가동될 수 있기에 우리의 평화와 안전은 매일 갱신 중인지도 모르겠다. 

 강제 철거를 수행하던 주인공이 찰나의 실수로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과정은 처연함을 넘어 숭고하기까지 하다. 그는 평범하다 못해 어리숙하고 연약한 아내 바보였다. 공명심이나 정의감도 없던 그가 프런들의 밑바닥 삶을 겪어본 후에야 비로소 배려와 희생을 실천하는 모습에서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으로 느끼는 것, 그리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 사이에 차원이 다른 진정성이 존재함을 느끼게 한다. SF를 기대하고 고른 영화였는데 휴머니즘을 표방한 페이크 다큐였다. 코로나 19 이후 더욱 불거진 혐오, 차별, 다문화, 생태 등 묵직한 사회적 이슈에 대해 생각할 거리들을 안겨주는 신선한 영화를 만났다. 아이들에게 몇 장면 보여주고 생각을 물어보면 또 이렇게 답할 것 같긴 하다. 지구는 외계인이 살 곳이 못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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