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given the choice between being right or being kind, choose kind.
영화 원더에 나오는 대사이다. 옳은 것과 친절함 사이에서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것은 친절함이라는 말. 언뜻 보면 이상적이고 아름답다. 안면 장애를 가진 영화 속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학교폭력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 말은 울림이 있다. 그러나 이 말을 우리의 일상으로 옮겨보자. 누구든 나에게 친절하고 착하게 대하는 사람에게 끌리는 것은 당연하다. 설령,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로 정의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TV에 나와서 내 생각을 대변해주거나 내가 싫어하는 누군가를 논리로 제압할 때 가슴 깊은 곳에서 통쾌함과 희열을 느낀다 해도, 그가 당장 내 옆에서 나의 일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리고자 한다면 그는 동경의 대상에서 비호감으로 전락할 수 있다. 회의에서 맞는 말을 했는데 분위기가 싸늘해진다거나, 옳은 일을 하고도 욕먹는 일이 이런 경우이다. 사회성이 없다거나 인간미가 없다거나 자기만 잘난 줄 안다거나 하는 식의 비난과 상처가 더해지면서 우리는 알아간다. 내 일이 아니면 간섭 말기, 적당한 관계 설정하기, 침묵하기, 모른 척 등 돌리기 등이 답이라는 것을. 그렇게 인간 소라게로 마음 편하게 살면서 어쩌다가 나의 평화로운 일상을 침범하는 사건이 터질 때 우리는 다시 정의라는 이름을 내세워 이 상황의 부당함과 억울함을 토로한다. 남일에 신경 쓰지 않은 대가로 그동안 비축해 두었던 에너지를 다 끌어다 쓰고 만다. 누군가의 시선에는 자기 일에만 눈 돌아가는 이기적인 모습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그렇게 나의 일이 해결되면 다시 조용히 나의 영역을 지키며 소라게로 살아간다. 그래서 "right"보다 "kind"를 선택하는 것은 영화 속에처럼 아름다운 일이 아니라 전략적인 선택이 되는 것이다. 맞지 않는 걸 알면서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불화와 갈등을 피하기 위해, 피곤해질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우리는 상대의 억지와 무논리에 굴복하고 만다. 그로 인해 얻는 잠깐의 평화에 길들여지면서. 이것은 목소리 큰 놈의 승리이자 안하무인의 생존 전략이다. 알지만 받아들인다. 논리가 차지할 공간이 일상에서는 점점 더 사라져 간다. 분명 더 옳은 일은 있고, 더 나은 선택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선택이 항상그쪽을 향해 있지는 않다.
학교 구성원 역시 자신과 자신의 역할을 대변하는 주체로서 저마다의 목소리를 냅니다. 누군가는 합리적인 태도로, 누군가는 이기적인 모습으로, 누군가는 친절하게, 누군가는 무례하게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죠. 조율과 조정의 과정에서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때, 갈등이 없다면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말은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다만, 지금의 사회도 그렇고 갈등의 전제가 논리와 합리가 아닌, 감정과 편향이 될 때 갈등 해결의 과정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다소 회의감이 듭니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선택적 친절함이 아닌 당당하게 옳은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