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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미니 May 14. 2022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

 내가 학교 소재 드라마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다. 현실성 부재. 몇 년 전 기간제 교사가 주인공인 드라마 작가가 실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본을 썼다는 말에 관심 있게 드라마를 지켜봤다. 그리고 다시 실망했다. 드라마 속 학교는 여전히 학생, 교사, 학부모 간의 과장과 과잉의 관계, 재단의 부정과 입시 비리, 더 심하게는 현실과 담쌓은 판타지 속 배경화면으로 그려지고 있다. 게다가 학교 실상을 전면에 내세우는 스토리보다 드라마 세팅의 배경으로 채워지는 경우가 점점 더 많아지는 것 같다. 취재와 고증을 거치는 또 다른 드라마 속 단골 소재 - 의사, 검찰, 경찰의 세계 - 이들 전문가 영역과는 분명 다르다. 사람들은 학교와 교사를 전문가 영역으로 바라봐 주지 않는다. 자신들의 학창 시절 어딘가 경험해봤던, 친근한 소재일 뿐이며 누구든 학교에 대해서는 이러쿵저러쿵 한 마디씩 거들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추억보다 기억에 의존하는 우리들의 학창 시절엔 집단주의와 체벌, 차별, 그리고 무관심이라는 상처와 부정적 감정들이 깔려있다. 그래서인지 화면 속에서 비현실적 억지 스토리가 전개되어도 학교라면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며 이해의 폭을 넓혀 버린다. 특히 학교폭력을 둘러싼 여러 이슈들이 혼재하는 최근 상황을 반영하듯이 학원물 영화들은 더 세고 자극적인 소재와 영상을 보여주는데 문제는 우리가 이를 익숙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얼마 전 소년 심판이라는 넷플릭스 드라마가 화제였는데 법의 심판을 통한 드라마 속 정의 구현이 현실에서는 거의 판타지에 가깝다는 걸 알기에 우리는 드라마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낄 뿐이다.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 예고편을 봤을 때 영화를 볼까 말까 망설였다. 학교폭력의 가해자 부모 모임이라는 설정이 앞으로의 뻔한 전개를 예측할 수 있게 했다. 그래도 끌렸던 것은 배우들의 열연이 기대되었기 때문이었는데 역시 나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그렇게 영화를 보고 나와서 검색창에 영화 제목을 입력했다. 관람평에 누군가 남긴 댓글이 눈에 띄었다. "현실은 몇 배 더 잔인하다" 이 글을 쓴 누군가는 학교 폭력의 현실을 얼마나 절감하고 직접 경험했기에 이렇게 확신할 수 있을까. 우리가 매체를 통해 접하게 되는 대표적인 잔혹함의 사례들이 일상의 현실로 둔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정말 이 시대의 학부모들은 다 자기 자식만 중요해서 양심이란 건 개에게나 던져버린 몰상식하고 이기적인 존재들인 것인지, 영화를 보고 나서도 뒷맛이 개운치 못하여 내내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영화에 매번 등장하는 가해자 클리셰는 그들이 소위 말하는 있는 집 자식들이란 점이다. 부모들은 자신의 권력과 돈을 이용해서 당당하게 굴고 결국 피해자를 굴복시킨다. 피해자가 바라는 진심 어린 사과는 결코 소박한 바람일 수 없다. 가해자 측은 사과를 제외한 다른 모든 일을 하겠다고 한다. 가해자가 뻔뻔할수록 그 기세는 더 강해진다. 가해자 학부모 병원장의 행태를 보며 선한 자는 누가 더 선한가를 경쟁하지 않지만 악에는 우위가 있다는 걸 새삼 느꼈다. 더 악한 놈만이 살아남는다. 영화 속 주인공 강호창이 악인임에도 고통받는 이유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기 때문이다. 일말의 가책을 느끼는 순간, 더 악한 놈에게 밟혀버리는 이 세계 룰이 내가 가장 소름 끼치는 지점이다. 어쨌든 강호창은 자신의 아들을 가해자 무리에서 빼내는 데 성공하지만 재판장에서 나오는 그에게 담임교사는 반문한다. 죽은 건우에게 미안하지 않냐고. 변호사 아버지를 둔 한결은 구원받았지만 사회배려대상자인 건우는 구원받지 못한 것이 이 영화의 또 다른 클리셰. 그렇다면 현실은 어떨까. 사실 매체에 나오는 강력 범죄 급의 사건사고가 흔한 일은 아니다. 오히려 요즘 아이들이 생각하는 학교 폭력의 범주는 일상생활 곳곳에 스며 있다. 물리적인 폭력뿐만 아니라 일상의 말 한마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행동, 말투, 태도 등 사소한 듯 보이는 하나하나가 자신에게 상처가 된다면 이를 학교폭력으로 인지한다. 집단적 괴롭힘도, 가학적 폭력 형태도 분명 존재하겠지만 그보단 개인과 개인의 갈등 상황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꽤 많다. 초등학교에서는 아이들 간 싸움이 내 자식에게 이럴 수 있냐며 부모 싸움으로 번지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대부분은 대화와 타협을 통해 실제로 해소되기도 하고, 일단은 봉합 수준에서 해결된 것처럼 놔두기도 한다. 갈등이 깊어지면 학년이 바뀌고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곪아서 터지기도 하고 아이답게 언제 그랬냐는 듯이 없던 일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일상의 이런 일들이 별거 아니란 말은 아니다. 어떤 형태이든 폭력은 근절되어야 한다. 덧붙여 언론과 매체가 학교 폭력의 잔혹사를 전달하는 데 급급해 오는 동안 그 폭력의 이면에 깔려있는 차별과 혐오, 인간의 본성 찾기에 대한 반성과 성찰도 함께 있었는지 묻고 싶다. 인간성 회복이야말로 국가가 국민에게, 부모가 자녀에게, 학교가 학생에게 끊임없이 교육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 나쁜 놈은 나뿐인 놈이라는 이외수 작가의 말이 떠오른다. 영화 속 한결이도 나만 아니면 된다는 복불복 게임을 선택하지 않았나. 경쟁이 우선시되고 나만 중요한 세상에서 우리 아이들은 타인을 존중하고 약자를 배려하는 삶을 배울 수 있을까. 우리는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까. 길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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