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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이 Jan 02. 2022

조디악 Zodiac, 2007

도사리는 악의 공포


 먼저 못 박아 둘 사실이 있습니다. 저는 <조디악>을 평하기엔 관객으로서의 역량이 모자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디악>에 대해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이 영화가 핀처의 팬들에게도 다소 지루한 영화 취급을 받는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세븐>과 <파이트 클럽>을 보고 핀처의 팬이 된 분들이라면 이 영화는 다소 밋밋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한편 핀처의 후기작인 <나를 찾아줘>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서사의 목적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조디악>은 핀처의 어떤 영화들보다 더 많이 알려지고 논해져야 할 의심할 수 없는 걸작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조디악>에 대한 좋은 비평이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일단 제가 본 것 중에서는 유의미하다고 할 만한 글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만큼 <조디악>은 까다로운 영화입니다. 그건 <조디악>이 어렵다는 뜻도, 복잡하다는 뜻도 아닙니다. 이 영화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선 이 영화에서 무엇을 따라가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결국 대다수의 <조디악> 비평은 이 영화에서 무엇을 따라가야 하는지를 놓치고 있습니다. 흡사 영화 속의 살인마, 조디악을 끝내 밝혀내지 못한 것처럼 말입니다. 


  <조디악>의 소재가 된 살인마 조디악은 4건의 공식적인 살인에서 5명을 죽이고 2명에게 중상을 입혔습니다. 숱한 연쇄살인마들이 그랬던 것처럼 조디악도 언론의 관심과 더불어 경찰을 조롱하길 즐겼습니다. 경찰은 집요한 수사 끝에 용의자를 특정하기까지 했지만 첫 사건이 발생한 것이 1968년임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현재까지 범인을 잡지 못했습니다. 즉 '조디악 킬러'는 영구 미제 사건의 범인입니다. 핀처는 이 조디악 킬러의 이야기를 극적 구조로 다듬지 않고 르포르타주처럼 다루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핀처가 조디악 킬러에 대한 다큐멘터리적인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핀처가 드라마적 구조를 최대한 배제한 이유는 우리의 경계심을 무너뜨리기 위함이지, 사실적인 서사를 지향한 것은 아닙니다.


 핀처는 과거 스필버그의 <죠스>에 대해 말하면서, 이 영화가 사람들이 바다에 들어가는 것을 두렵게 만들었다며, 그래서 <죠스>가 위대한 작품이라고 평가했습니다. 핀처는 <죠스>를 통해서 영화가 관객에게 정서적 작용을 일으키는 방식을 연구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핀처의 저 평가가 의미심장한 것은 핀처 스스로도 관객에게 강렬한 공포와 스릴을 아로새기는 솜씨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핀처는 <조디악>을 기점으로 '악'에 대한 규정과 더불어 그것을 보여주는 방식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그건 결국 스릴러로서의 작동 기제에도 변화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조디악>이 핀처의 전작인 <세븐>에 비해 극의 진행과 편집이 지극히 느린 것은 더 이상 빨라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핀처는 더 이상 극작법과 영화적 테크닉으로 이 악이 얼마나 끔찍하고 두려운지 호들갑을 떨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악이란 그 존재 자체로 우리를 두렵게 하기 때문입니다. <조디악>은 '악의 형상'에 대한 핀처의 한층 발전된 대답입니다. 


 <세븐>이 그 자체로 걸작일 뿐 아니라 스릴러를 써보려는 수많은 창작자들에게 레퍼런스로 작용하는 것과 달리, <조디악>은 대중적 호응을 유도하는 데에는 실패했을뿐더러 그 분석도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이 영화에 극적 구조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븐>이나 <나를 찾아줘>와 달리, <조디악>의 씬과 시퀀스들은 인과성을 기준으로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 영화는 보고 나면 서사의 흐름을 명확히 기억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범인이 누구인가?'라는 쟁점이 가장 중요해지는 범죄 스릴러물이 극적 구조를 포기했다는 것은 결국 범인이 누구인지 관심이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결국 핀처는 '우리는 범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를 통해서 '악이란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합니다. <조디악>의 서사는 저 이율배반적인 명제를 성립시키기 위해 구성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69년에 시작해서 91년을 기점으로 끝날 때까지, 숱한 자막으로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특이한 점은 '0년 후' 내지는 '0달, 0주 후'라는 자막이 사용될 뿐, 현재가 몇 년도 인지는 시작할 때와 끝날 때만 알려주고 있습니다. 시간의 흐름 그 자체에 대해서는 '0시간 후'라는 자막까지 사용할 만큼 집요하면서 정작 '현재가 언제인지'는 잊어버리게 만드는 겁니다. <조디악>은 이러한 수법을 통해, 관객이 20년이 넘는 긴 수사와 추적의 세월을 떠도는 유령이 되도록 만듭니다. 악을 뒤쫓는다는 것은 그렇게 두려운 일입니다. 


 영화가 중반에 이르면서 리 앨런이라는 인물이 유력한 용의자로 부상됩니다. <조디악>은 이 순간을 기점으로 진행의 리듬에 약간의 박차를 가합니다. 핀처는 관객도 리 앨런이라는 인물을 의심하도록 연출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리 앨런이 조디악일 수 있겠다는 믿음을 주는 정황 증거는 많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리 앨런이 조디악이라고 단정할 직접증거는 하나도 없습니다. '너무나 의심스러운 인물'과 상반되는 '철저히 부재하는 증거'는 그저 우연이라거나 살인마의 치밀함이라고는 보기가 어렵습니다. 필적 감정사는 '조디악 편지의 필적과 리 앨런의 필적이 다르다'라고 감정하지만, 정작 그의 제자는 스승의 감정 결과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고 합니다. 수사팀과 그레이스미스의 집착과 달리, 이런 혼돈이 갈수록 누적되면서 관객 또한 '리 앨런이 범인인지 아닌지'를 미치도록 궁금해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직접적인 증거는 단 하나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이 짙은 혼돈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혹시 조디악은 악마가 아닐까'라는 스산한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조디악>은 에필로그처럼 동떨어진 마지막 씬에서 2번째 범행의 생존자였던 마이클 마조를 등장시킵니다. 조디악 사건의 새로운 담당자가 된 형사는 마조에게 용의자들의 사진을 내밀고 이 중에 조디악이 있냐고 묻습니다. 마조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리 앨런을 지목합니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고 떠오르는 자막은 리 앨런이 기소 전에 심장마비로 사망했음을 알려줍니다. 그렇다면 리 앨런이 범인이고, 우리는 결국 범인을 심판대에 세우지 못한 걸까요? 그러나 이후에 떠오르는 또 다른 자막은 10여 년 뒤에 진행된 조디악 편지의 DNA 감식 결과는 리 앨런과 일치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조디악>은 실제 사건에도 그랬던 것처럼, 도무지 알 수가 없는 혼란을 정리하지 않고 그대로 이야기를 끝냅니다. 


 핀처는 4차례에 걸쳐 조디악의 범행을 보여줍니다. 1건은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벌어졌고, 영화에서 보여지는 마지막 범행은 미수에 그쳤습니다. 핀처는 조디악의 범행을 요란한 편집을 동원하지 않고 지극히 차분하게 보여줍니다. 이 차분함은 살인을 대하는 조디악의 태도 그 자체를 보여주는 듯해서 소름이 끼치죠. 결국 핀처는 조디악이라는 악의 두려움을 결코 설명하려 하지 않고, 우리가 피부로 실감하게 만듭니다. 조디악의 정체에 집착하던 데이빗 토스키 형사와 그레이스미스, 폴 에이버리는 수사를 이어갈수록 점차 피폐해지고 불행해집니다. 그레이스미스는 조디악 혹은 그 모방범의 위협에 노출되기도 합니다. 똑같이 '범인이 잡히지 않는 수사극'이었던 <살인의 추억>에서도 형사들은 범인을 잡으려는 집념에 점차 미쳐가다시피 합니다. 다만 <조디악>과 <살인의 추억>이 다른 점은, <조디악>이 실제 조디악의 발자취를 훨씬 집요하게 따라갈뿐더러 엔딩에서도 드라마적인 결론을 피했다는 점입니다. 봉준호가 <살인의 추억>에서 '어쩌면 범인은 시대의 어둠 그 자체'라는 결론을 내린 것과는 상반됩니다. <살인의 추억>의 형사들이 그 시대에 몸담았기 때문에 불행해졌다면, <조디악>의 주인공들은 악의 발자취를 쫓는 자체만으로 불행해집니다. 왜냐하면 악의 발자취를 따라간다는 것은 결국 그것을 이해하려는 시도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핀처가 총지휘를 맡은 드라마 <마인드헌터>에서도, FBI 수사관 홀든 포드는 인정 욕구와 탐구심으로 연쇄살인마들의 심연을 엿보다가 위험에 빠집니다. 결국 핀처는 악을 이해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집요한 흐름과 상반되는 철저한 혼돈, 유일하고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는 리 앨런조차 범인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는 최후의 자막까지, <조디악>은 결국 불가지론 그 자체를 서사로 그려냅니다. 여기엔 우리가 결코 악을 밝혀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는 코스믹 호러에 가까운 근원적 허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조디악>이 악에 결코 맞설 수 없다는 패배주의를 담은 작품은 아닙니다. 리 앨런을 직접 보러 간 그레이스미스의 눈동자에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 눈동자는 많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악은 이해할 수 없고, 동시에 상상할 수 없이 두려운 존재이지만 인간은 악을 밝혀내 또렷이 응시하는 것을 포기하지도 않을 것임을. 그 눈빛과 더불어 악에 대한 '설명할 수 없는 설명'이라는 끈질긴 태도야말로 <조디악>을 <세븐>보다 위대한 영화로 만드는 핵심입니다. 


 숱한 장르물들이 악에 매료되어 폭력을 전시하는 것과 달리, <조디악>은 악과 철저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카메라조차 근접할 수 없는 사악함과 두려움. 악에 대한 그 거리 감각이야말로, 핀처의 스릴러를 그 무엇보다도 싸늘하게 느껴지도록 만듭니다. <조디악>은 악에 대한 핀처의 두려운 시선 그 자체인 셈입니다. 어쩌면 인간은 '무엇이 과연 악인가?'조차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나약할지도 모릅니다. 핀처는 할리우드 영화가 오랫동안 상대적인 악을 절대적인 악으로 다뤄왔음을 알고 있을 것이며, 동시에 그 문제에 대해 고민했을 것입니다. 미소 냉전 시기의 소련, 테러와의 전쟁 시기의 중동 무슬림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악은 진영과 이해득실의 차원을 넘어선 그 무언가입니다. 대단히 효율적으로 유대인 대학살을 진행한 나치, 캄보디아 킬링필드, 911 테러, 인도네시아 대학살, 20세기 말엽부터 끊이지 않는 기괴하고 잔혹한 연쇄살인까지. 악이란 존재이면서 동시에 현상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성을 통해 '그 사건을 촉발시킨 악은 무엇인가?'를 질문해 들어갈수록 멈추지 않는 수건 돌리기가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건들을 들여다볼 때 <액트 오브 킬링>의 안와르 콩고가 그랬듯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토악질을 참아내기가 어렵습니다. <액트 오브 킬링>과 <조디악>이 공통적으로 가진 희망은, 인간이 악을 설명할 수는 없을지언정 실감을 통해 알 수 있다는 인간 본성에 대한 실낱같은 믿음이기도 합니다. 만약 당신이 <조디악>을 보고 토악질이 솟구칠 듯한 공포와 한기를 느꼈다면, 악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어느 정도 느낀 것입니다. 저는 <조디악>만큼이나 악을 두렵게 보여주는 다른 영화를 알지 못합니다. 그 두려움이야말로, 인간이 지닌 악에 대한 유일한 저항력 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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