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잃어버리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
어떤 영화들은 아무리 다시 보아도
도저히 분석적인 시선으로 볼 수 없게 만든다.
그런 영화들은 유독 새벽에만 되새겨지는 슬픈 기억과 비슷하다.
너무나 서툴렀기에 놓쳐야만 했던 첫사랑,
두고두고 후회되는 인생에서의 선택,
늘 무뚝뚝했던 아버지의 주름진 미소,
너무나 곤궁해 숨기고 싶은 경험들,
너무 아름다웠기에 너무 슬프게 남아버린 추억들,
어느새 순수를 잊고 나이를 먹어버렸다는 쓸쓸함...
<먼 훗날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이 담겨있는 영화다.
2007년 섣달 그믐, 베이징을 떠나는 귀성길 열차 안.
복작대는 사람들 속에서, 표를 잃어버려 곤란해하는 팡샤오샤오.
이때 같은 열차에 타고 있던 청년 린젠칭이 느닷없이 표를 내민다.
"이거 그쪽 표 아니에요?"
서로를 향한 호감 서린 미소.
아직 청춘인 두 사람의 동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곧장 2018년 섣달 그믐, 베이징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
어째선지 흑백화면.
비지니스 클래스에 오른 린젠칭은 승객들 사이에서 누군가를 발견한다.
고민 끝에 돌아본 그는 눈이 마주친다.
저편의 이코노미 클래스에 앉아 있는 그녀, 팡샤오샤오와.
서로를 향한 반가운, 하지만 어색한 미소.
흑백 화면 속에서, 청춘을 지나온 두 사람의 재회가 시작됐다.
영화는 이렇게 두 사람의 과거-컬러와 현재-흑백을 교차하며 진행된다.
현재가 칙칙한 흑백인 이유는 청춘이 끝났기 때문만은 아니다.
린젠칭과 팡샤오샤오에게는 베이징에서 성공하겠다는 꿈이 있었다.
린젠칭은 게임 개발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 개미굴 같은 연립주택에서 버티고,
팡샤오샤오는 베이징 남자와 결혼하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연애에 열을 올린다.
두 사람은 서로를 연모하고 있지만
린젠칭의 사랑에는 용기가 없고
샤오샤오의 사랑은 계산이 너무 빠르다.
하지만 청춘의 사랑은 아무리 두터운 벽도 허무는 법이다.
다시 현재, 비행기가 폭설로 결항되면서
린젠칭과 샤오샤오는 같은 방에 앉아 추억을 나눈다.
린젠칭은 어느덧 성공해서 자리를 잡고 가정을 꾸렸고,
베이징 남자와의 결혼만을 원했던 샤오샤오는 그 의존성을 떨쳐내고 홀로서기에 성공했다.
옛 기억을 나누는 두 사람의 눈은 웃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 눈가엔 자꾸만 물기가 비치는 듯 하다.
여기까지만 와도, 우리는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지 어렴풋이 알 수 있다.
연인에게 있어 영원은 너무나 먼 것이고, 이별은 너무나 가까운 것이니까.
이루지 못한 인연을 이제야 보내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먼 훗날 우리>는 <건축학개론> 혹은 <너의 결혼식>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이 중국영화가 저 한국영화들보다 한층 진실되고, 한층 성숙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먼 훗날 우리>엔 오늘날 (물론 순화되었을)중국의 현실들이 담겨있다.
성공에의 열망이 강제되는 천민 자본주의, 한 뼘자리 단칸방에 내몰린 사람들,
신성장동력의 환상으로 부풀려진 IT 버블, 급격한 도시화로 잊혀진 고향들.
그런 사회비판물적인 풍경 속에서도 이 영화가 진한 멜로를 그려낼 수 있는 건
남아있는 미련을 다루는 그 태도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사실.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소재가 아니다.
독특하거나 신기한 소재가 전부라면, 영화나 드라마보다 더 흥미로운 텔레비전 예능들이 얼마든지 있다.
물론 소재가 삶의 진실성을 파내려가는 좋은 도구이기는 하다.
하지만 창작자가 그 굴착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되물어야 하는 것은
그 소재에 대한 자신만의 시선이다.
그것을 모르는 서툰 창작자는 보는 이를 가르치려 들지만,
빼어난 창작자는 보는 이에게 자신의 시선을 빌려준다.
그래서 잘 만든 영화나 드라마를 본다는 것은 타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며,
그건 우리가 타인을 이해하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희망의 증거인 셈이다.
우리가 봉준호의 시선을 빌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기생충>에서 대저택과 반지하 사이의 역학관계를 볼 수 있을까.
우리가 샘 멘데스의 시선을 빌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1917>에서 절망과 구원의 여정을 볼 수 있을까.
우리가 나홍진의 시선을 빌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곡성>에서 참혹하도록 불가해한 세상을 볼 수 있을까.
타인에 대해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이 없다면
어떻게 타인의 눈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예술이 가능할까.
린젠칭과 샤오샤오는 고향으로 가는 길-과거-에 만나고,
고향을 떠나오는 길-현재-에 진정으로 이별한다.
이로써 두 사람의 지나간 사랑이 영원한 마음 속 고향으로 남을 거라 말하지만,
엇갈린 인연의 미련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다.
아픔을 안고 성숙해진 린젠칭과 샤오샤오처럼 그저 하나의 계절처럼 받아들일 뿐이다.
그저 살다보면 겪는 일이라고.
우리의 어제는 지나갔고,
남은 건 내일이라고.
<먼 훗날 우리>는 엇갈린 인연을 다시 붙잡기 위해 질척거리지 않는다.
그저 어린 이별의 아픔을 어른의 마음으로 삭여낼 뿐.
그게 이 영화가 보여주는 이별에 대한 태도다.
내색하지 않기에 더욱 아픈.
그래서 <먼 훗날 우리>라는 제목은 아이러니하다.
왜냐하면 이야기의 과거와 현재 지칭이 뒤바뀌어 있기 때문이다.
제목에 따르면 컬러인 과거가 현재이고, 흑백인 현재는 미래-먼 훗날이다.
왜 '오래 전 우리'가 아닌, '먼 훗날 우리'인가.
그게 이 영화가 보여주는 가장 작고도 쓸쓸한 미련이다.
그 시절이 현재라 믿고 싶은 미련.
게임 개발자로 성공하고픈 린젠칭은
한 남자-이언가 여자-켈리를 찾으러 가는 게임을 구상하고 있다.
"이언이 켈리를 잃으면 어떻게 돼?"
팡샤오샤오의 물음에 린젠칭은 답한다.
"세상이 온통 잿빛이 되지."
그것이 바로 2018년의 현재가 흑백인 이유다.
그리고 엔딩에 이르러 칙칙하던 현재가 색깔을 되찾는 것은 그야말로 감동의 순간이다.
그 이별을 인정해야만, 우리의 오늘이 그 아름다웠던 추억과 이어질 수 있다는 깨달음.
좋은 영화들은 그저 달콤한 판타지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린젠칭과 팡샤오샤오가 그랬듯,
이야기를 통해 우리와 함께 동행하면서
씁쓸하지만 인정해야만 하는 삶의 진실을 안겨주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이야기들은 관객들을 소년소녀로 돌려놓았다가,
끝내 어른이 되어 극장을 나서게 한다.
누군가는 <먼 훗날 우리>에 대해 이런 단평을 남겼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오늘은 그 시절의 우리가 없다.
이제 영영 사라졌기에 더욱 아련한 그 시간들.
당신에게도 그런 기억이 있을 것이다.
해줄 수 없음을 알면서도
하늘에서 별을 따고 바다에서 진주를 캐주겠다고 약속하고,
온 세상에 두사람 뿐인 것처럼 사랑했지만,
끝내 그 사람을 잃고 세상이 잿빛이 된 기억이.
세월이 지나서도 문득 그 사람을 떠올리던 순간이.
여전한 소년의 슬픔을 어른의 얼굴로 삭여야만 하는 쓸쓸함이.
나에게도 그런 기억이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우리 모두의 심장에 남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