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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이 Dec 06. 2024

<세븐> Se7en, 1995

신과 인간에 대한 이야기



장소는 뉴욕. 한 노형사가 있습니다. 

그는 아침부터 살인사건 현장을 보아야 합니다.

그것도 아내가 남편을 총으로 쏴 죽인 현장입니다. 

냉장고에 붙어 있는 아이의 그림을 보고 노형사는 씁쓸하게 묻습니다.

"아이가 (이 참극을)봤을까?"

그 말에 동료 형사는 짜증스레 반문합니다. 

"대체 그딴 게 왜 궁금한 겁니까?" 


어머니가 아버지를 죽이고, 남은 아이의 마음 따윈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세상. 

그는 베테랑 경찰이지만, 무너져가는 세상을 견디기가 너무 힘이 듭니다. 

그래서 노형사, 서머셋은 퇴직을 바라고 있습니다. 

일단 뉴욕을 떠나고 싶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도시는 '아이를 낳아 기를 만한 도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아직까지 독신입니다. 

그런 그의 앞에 새파란 신참 형사, 밀즈가 나타납니다. 

밀즈는 조금 건방지고, 조금 미숙하며, 사리분별도 못하지만, 미워할 정도까진 아닙니다.

무엇보다 밀즈는 베테랑인 서머셋에게 한수 배우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지칠대로 지친 서머셋은 그가 부담스러울 뿐이지만, 어차피 퇴직이 코앞이니 상관없습니다.

과연 서머셋은 밀즈를 제대로 된 형사의 길로 인도하고 평화롭게 은퇴할 수 있을까요. 


앤드류 케빈 워커가 쓰고 데이빗 핀처가 연출한 1995년의 스릴러 영화 <세븐>은

수많은 관객들에게 쇼크를 안겨주고 후대 창작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작품입니다.

무명의 시나리오 작가였던 워커가 <세븐>을 쓰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뉴욕이라는 대도시의 인상이었습니다. 

그 전까지 헐리우드의 스릴러나 호러 영화들의 주요 무대는 대도시가 아닌 

외딴 전원지역(<싸이코>, <텍사스 전기톱 학살> <서바이벌 게임> <미져리>, <양들의 침묵>)이었습니다. 

도시인들이 미개척지를 바라보는 두려움과 우월감이 반영된 결과였을 겁니다. 

그러나 당시 무명의 작가였던 워커에겐 모두가 동경하는 '잠들지 않는 도시', 뉴욕이야말로 

탐욕과 죄가 부글거리는 무저갱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뉴욕을 배경으로, 두 형사가, 일주일 간, 

광기 어린 연쇄살인을 추적해가는 스릴러를 완성합니다. 

스튜디오의 간섭 속에서 <에일리언3>로 데뷔한 후, 

'에일리언 시리즈를 망쳐놨다'는 비난에 절치부심하던 데이빗 핀처는 

<세븐>의 시나리오를 보고 곧장 연출을 결심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 빠른 결심이 작가 에이전시의 실수에서 비롯됐다는 것입니다. 

<세븐>의 시나리오는 상업영화치곤 너무 잔인하다는 비판 속에 몇차례 수정을 거치며 순화되었는데, 

워커의 에이전시는 핀처에게 각본을 보낼 때 실수로 최신 버전이 아닌, 초고를 보내버렸습니다. 

"실수가 있었네요. 초고는 너무 잔인하죠? 최신 버전에선 마지막의 잘린 머리가 빠졌어요." 

에이전시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은 핀처는 말했습니다.

"그게 빠지면 이 얘기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거요?"

핀처는 그런 절망적인 잔혹함이야말로 이 이야기의 핵심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븐>은 앤드류 케빈 워커의 초기 의도대로 만들어질 수 있었습니다. 


<세븐>은 매우 음습하고, 암울하고, 대놓고 보여주지 않고 상상하게 만들기에 더더욱 끔찍한 영화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걸작으로 만든 것은 그 잔혹하고 강렬한 인상만은 아닙니다. 

실제로 <세븐>의 대히트 이후, 스릴러 영화들 상당수가 훨씬 암울하고 잔혹해졌지만, 그들은 그뿐이었습니다.

늘 그렇듯, 트렌드의 모방을 좋아하는 많은 창작자들이 <세븐>의 껍데기만을 흉내낸 것입니다. 

그저 흥행에 성공한 것만이 아니라, 후대에 영향을 끼칠 정도의 걸작들에는 한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건 봐도 봐도 새롭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다시 보고 싶다는 유혹이 들지 않는 이야기는 결코 후대의 창작자들에게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흉내내고 싶다'는 욕망, 나아가 무의식적인 흉내란 그만큼 많이 보았기에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오면, 월요일입니다. 

서머셋-밀즈 콤비는 첫 사건으로 한 남자가 살해당한 현장을 살펴보게 됩니다. 

고도비만인 남자가 식탁에 앉은 채로 죽었는데, 

부검의는 그의 사인이 말 그대로 '배가 터질 때마다 음식을 먹은 것'임을 알려줍니다. 

문제는 뒤통수에 총구를 찍어누른 자국-누군가에게 협박당한 증거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정체불명의 범인이 이 남자에게 죽을 때까지 먹기를 강요한 것입니다. 

골치아픈 사건임을 직감한 서머셋이 수사를 맡기를 주저하는 사이에 화요일이 되고, 

두번째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번엔 한 변호사가 사무실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됐습니다. 

부유층의 범죄를 전담했다던 이 변호사 역시 누군가에게 협박당해 자신의 살 1파운드를 스스로 도려냈고, 

끝내 과다출혈로 사망했습니다. 

서머셋은 범인이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음을 직감합니다. 

<베니스의 상인>의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은 

빌려준 돈을 갚지 못하면 대신 살을 도려내는 탐욕스런 악인입니다. 

결국 범인은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나오는 악덕 상인의 방식으로 악덕 변호사를 살해한 것입니다. 

이쯤되면 범인이 보통 미친놈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셰익스피어를 인용할 만큼 교양인이면서, 

사람을 무자비하게 살해하는 잔인성과, 증거를 남기지 않는 치밀함을 갖춘 인물. 

게다가 이 두 건의 살인 피해자들 사이엔 어떤 공통점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연쇄살인. 

아니나 다를까 두 건의 사건현장에는 범인의 메시지가 남아 있습니다. 

첫번째는 식탐, 두번째는 탐욕

교양이 깊은 서머셋은 범인이 단테의 <신곡>이 규정한 '일곱가지 대죄'를 따라 살인을 저지르고 있음을 알아챕니다. 

서머셋과 밀즈는 사건현장에 남겨진 단서들을 통해 범인을 추적하지만, 

그 역시 '의도된 단서'에 불과했습니다. 

범인은 치밀하게 연쇄살인 계획의 각본을 짜둔 것입니다. 

<세븐>의 살인마는 '자신만의 각본에 집착하는 연쇄살인마'의 완성형이라 할 만 합니다. 


이어 수요일목요일금요일토요일을 거쳐 일요일까지 

나태교만색욕에 해당하는 살인들이 계속해서 벌어지고, 

두 명의 더 피해자가 더 남은 상황에서 영화는 놀라운 전개를 보여줍니다. 

범인이 제발로 경찰서를 찾아온 것입니다. 

핀처는 <세븐>의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범인이 자수하는 대목 이후에도 페이지가 한참 남은 것을 보고 

'이 작가 대체 무슨 생각이야?'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 말대로 범인의 자수는 영화를 따라가던 관객의 리듬을 박살냅니다. 

범인이 스스로 나타남으로서 영화의 목적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범인은 자신의 지문을 모조리 도려냈고, 신원을 증명할 어떤 기록도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연쇄살인을 오래 전부터 계획해왔고, 꼬리를 잡히기 않기 위해 모든 사회적 신분을 말소한 것입니다. 

존재의 증거가 없으므로 그는 실증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관념적인 존재, 더 비약하면 악마라고 해도 될 겁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살인사건이 더 있으며, 시체가 묻힌 곳을 알려주겠다고 합니다. 

조건이 있다면 자신을 수사해온 두 형사가 그 장소까지 동행하는 것입니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듯 해서 찜찜하지만, 

이 제안을 거부한다면 심신상실을 핑계로 어떻게든 법망을 빠져나갈 거라는 협박이 뒤따릅니다. 

두 형사는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범인과 함께 외곽의 황야로 향합니다. 

물론 경찰도 바보가 아니기에 근처에 특공대가 대기 중이며, 헬리콥터를 동원한 항공지원까지 뒤따릅니다. 

범인이 무언가 수작을 부리려 해도 방법은 없을 겁니다. 

그동안 내내 뉴욕에서만 진행된 영화는 단 한번도 하늘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뉴욕은 마천루들 탓에 하늘을 보기 어려운 도시입니다. 

게다가 온난하고 습한 기후 탓에 틈만 나면 비가 쏟아집니다. 

그러나 범인이 자수를 위해 경찰서를 찾을 때부터 하늘이 개이고, 

범인과 동행한 장소 역시 사방이 트인 황야입니다. 

해방감 속에서 햇빛도 찬란하니, 아마 해피엔딩이 기다릴 겁니다. 

그렇게 믿었을 겁니다. 

그리고 모두 아시다시피, 절망적인 피날레가 남아있습니다. 


범인은 자수하기 전에 밀즈가 사랑하는 아내 트레이시를 죽였고, 

그 잘린 머리가 담긴 상자를 택배로 부쳤습니다. 

자신이 형사들과 황야에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배달되도록. 

범인이 아내를 죽였음을, 게다가 아내는 임신 중이었음을 알게 된 밀즈. 

범인은 자신이 밀즈의 행복한 삶을 질투했다며, 그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고 말합니다. 

놈은 자기 자신을 여섯 번째 대죄인 질투의 죄인으로 설계한 것입니다. 

서머셋의 간절한 설득과 만류에도 불구하고, 

밀즈는 결국 범인을 향해 방아쇠를 당깁니다. 

질투를 범한 범인은 죽고, 그럼으로써 밀즈 역시 일곱 번째 대죄, 분노를 범한 죄인이 됩니다. 

범인은 그렇게 광기 어린 연쇄살인의 각본을 완성해내고 맙니다. 


엔딩에서 영혼이 빠져나간 듯 경찰차 뒷좌석에 앉아 있는 밀즈. 

범인의 설계였다곤 해도 살인죄를 피하기 어려울 겁니다. 설사 피한다 해도, 그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 안을 수 있었던 아이, 그리고 자부심을 가졌던 직업까지. 

그런 밀즈를 바라보던 서머셋은 퇴직 결심을 번복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헤밍웨이는 말했다. 세상은 아름답고 싸워볼 가치가 있다고. 그 말의 후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세븐>의 이야기를 간단하게 정리하면, 

'늙은 형사와 젊은 형사가 콤비를 이뤄 광기 어린 연쇄살인을 추적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르적으로도 스릴러와 형사 버디물이 느슨하게 결합되어 있습니다. 

얼핏 흔해보이는 이 이야기가 독창적인 걸작이 된 이유는

고전 작법에서 중대한 룰 하나를 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건 '주인공들은 능동적으로 목표를 추구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서머셋과 밀즈는 연쇄살인사건의 해결을 위해 능동적으로 뛰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수사 과정은 이전의 형사 영화들과 달리 무력감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 한 순간(도서 대여자 리스트를 통해 범인의 집을 알아낸 것)을 제외하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범인의 의도대로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그 와중에 작법적으로 빼어난 점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형사들이 '능동적으로 수사해나가고 있다'는 착각을 안겨준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말 그대로 무능하고 무력하기만 하다면 우리는 이야기를 끝까지 보지도 않을 테니까 말입니다.

우리는 마리오네트처럼 놀아나는 주인공들을 보면서 그들이 능동적으로 움직인다고 착각합니다. 

이러한 서사 스타일을 보여준 것이 <세븐>이 최초는 아니지만, 

상업적인 스릴러 구조 안에서 그것을 녹여내고 성공함으로써 

후대의 이야기들에 엄청난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합니다. 

세계화를 통해 거대해지고 시스템이 촘촘히 깔린 오늘날의 세상에, 

개인은 더 이상 커다란 변화를 부를 만한 존재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고전 서부극에서처럼, 기막힌 솜씨의 총잡이 하나가 

세상에 만연한 불의를 해결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냉전 이후 소련이 붕괴되면서 미국은 '공공의 적'을 잃었습니다. 

그건 픽션에서 끝없이 써먹었던, '명확한 악'을 잃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개인은 나약해졌고, 누가 적이고 무엇이 악인지 구분할 수도 없는 세상. 

헐리우드 상업영화의 이야기가 그러한 변화를 따라잡지 못해 쩔쩔매고 있을 무렵에, 

<세븐> 같은 걸출한 메인스트림 작품들이 개인들의 무력감을 포착해내고 주류 서사에 변화를 이끈 것입니다. 

그만큼 후대의 많은 스릴러 영화들이 <세븐>의 자장 안에 놓여 있기에

지금 와서는 그다지 새롭게 보이지 않을 뿐이지요. 

이러한 무력감을 좀 더 극단화시킨 작품이 바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이며, 

지금은 열기가 약간 식어버린 슈퍼히어로 장르의 대부흥은 

그런 '개인의 무력감'과 '공공의 적'에 대한 판타지적인 반작용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히어로, 그것도 '슈퍼'히어로는 강력한 공공의 적과 맞서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존재니까요. 


우리가 걸출한 작품에서 무언가를 배우고 싶다면, 

이야기의 표면을 넘어 심층을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종이 위에서, 혹은 스크린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통해 관객의 마음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야기의 심층을 본다는 것은 

'그 이야기가 우리의 마음 속에 어떤 효과를, 어떻게 일으키도록 설계되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이야기들이 심층을 따로 가진 것은 아닙니다. 

많은 실패한 이야기들, 미숙한 이야기들은 표면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또 성공했다 하더라도, 재미에 비해 이상할 정도로 기억 속에서 빨리 휘발되는 작품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랫동안 살아남아 회자되는 걸작들은 심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 작품들은 늘 백프로 이해된 듯 해도, 다시 보면 늘 새로운 구석이 보이는 것입니다. 

알 것도 알지만 아무리 겪어도 알 수 없는 것. 

그건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도, 세상도 겉만 보아서는 모든 게 명쾌한 듯 하지만

한꺼풀 들춰보면 터무니없을 정도로 복잡한 요지경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결국 픽션에 불과한 이야기가 인생을 닮고 때론 영속성을 갖기도 하는 것은

표면과 심층 사이의 입체적인 경합 때문인 것입니다. 

그 경합이 없다면 우리가 <살인의 추억>이 역사의 어둠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까요? 

<대부>가 상실한 가치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까요?

<터미네이터2>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그래비티>가 삶의 의지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테넷>이, <1917>이 각자의 방식으로 구원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곡성>과 <덩케르크>가 다른 말을 같은 방식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오징어 게임>과 <매트릭스>와 같은 말을 다른 방식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까요? 


심층을 가진 이야기들은

서사가 그 기능에만 복종하지 않습니다. 

쉽게 말하면 가장 효율적이고 단순한 방식을 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뭔가가 더 있는 거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예컨대 <세븐> 역시, 

단순히 두 형사와 광기 어린 연쇄살인사건의 이야기라면

이 글의 서두에 서술된 오프닝 시퀀스는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두 사람이 원래 알던 형사였다고 해도 성립될 수 있는 이야기이며, 

오히려 그 편이 더 경제적이기 때문입니다. 

뛰어난 이야기들은 그러한 창작적 선택을 통해 

흥미로운 표면과 그보다 더 흥미로운 심층을 동시에 획득합니다. 

결국 자본이 요구하는 '재미있는 이야기(표면)'와

창작자 스스로 말하고 싶은 '본질적인 테마(심층)'를

영리하게 포개어 놓는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므로 한 이야기의 심층을 들여다보려면 

그런 선택의 순간들을 발견하고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왜 오프닝에서 서머셋의 하루를 보여줘야 하는가? 

왜 서머셋은 독신인가(효과적으로 쓰일 수 있는 가족이라는 장치를 왜 굳이 버렸는가?)? 

왜 서머셋의 정리벽이 강조되어 묘사되는가? 

왜 밀즈와 서머셋은 극의 시작에서 처음 만나야만 하는가? 

왜 하루가 바뀔 때마다 요일을 텍스트로 보여주는가? 

왜 하필 일주일인가? 

왜 범인에겐 이렇다 할 동기가 없는가? 

왜 서머셋은 마지막에 와서 퇴직을 번복하는가? 

이 외에도 숱한 질문들이 <세븐>이라는 영화의 심층을 들여다보는 단서가 됩니다. 

참고로 이건 '해석'의 영역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해석되어야만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좋은 이야기란 바로 우리의 삶을 닮아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해석이 뒤따라야만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란 삶의 진실성에 대한 모욕처럼 보입니다. 

그러므로 해석한다기보단, 또 다른 관점을 찾는다는 표현이 더 적당할 겁니다. 

심층을 가진 영화들은 그 자체로 흥미로울 뿐 아니라, 

관점을 달리 하면 새로운 흥미가 솟아나기 때문입니다. 


<세븐>에서 가장 이상하게 보인 점은 세 가지입니다. 

첫번째 의문은 왜 굳이 관찰자적 주인공을 따로 두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에 더 어울리는 인물은 서머셋이 아니라 밀즈입니다. 

서머셋은 극을 효과적으로 이끌기엔 너무 신중합니다. 

반면 밀즈는 생각하기 전에 일단 저지르는 인물이죠. 

똑같은 스릴러인 <살인의 추억>에서도, 

두 형사 중 극을 추동하는 주인공에 가까운 박두만이 밀즈와 비슷한 성격입니다. 

<추격자>의 주인공 엄중호 역시 일단 움직이고 본다는 점에서 서머셋보단 밀즈에 더 가깝죠. 

서머셋은 밀즈의 조언자이자 관찰자적 주인공이고, 극에 어떠한 화학작용을 만들어내는 캐릭터가 아닙니다. 

좀 더 비판적으로 보면 (관찰자적인 조언자라는 점에서)편의주의적으로 보일 정도지요. 

스릴러에서 이러한 캐릭터를 따로 두는 것은 선호되는 방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관찰자적 주인공은 필연적으로 극의 속도감을 저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굳이 극에 조언자격 캐릭터가 필요했다고 한다면 이해하고 넘어갈 순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두번째 의문을 만듭니다. 

그건 서머셋이 조언자라고 하기엔 너무 무력하다는 점입니다. 

지성과 교양이 깊은 서머셋은 사건에 대해 많은 단서를 발견하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들에서는 형사가 맞나 싶을 만큼의 무력한 모습을 보입니다. 

한 번은 밀즈가 범인의 집에 무단으로 침입하려 할 때이고, 

한 번은 결말부에서 밀즈가 범인을 쏘아 죽이려고 할 때입니다. 

모두 어떤 행동을 하려는 밀즈를 말리는 상황인데, 이때 서머셋은 물리력을 동원하지 않습니다. 

말로써 설득하려 하죠. 

마치 밀즈의 선택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혹은 개입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마지막 의문은 서머셋의 시점이 영화의 시작과 끝을 이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언급했다시피 오프닝은 서머셋으로부터 시작되고, 

엔딩 역시 퇴직을 번복한 후 헤밍웨이의 말을 인용하는 서머셋으로 끝납니다. 

결국 <세븐>이라는 영화 자체가 서머셋의 시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서사는 서머셋이 퇴직을 번복하고 뉴욕에 남기로 결심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앞서의 두 의문들이 결합되어, 서머셋이 그 수동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는 뜻처럼 보입니다. 


저는 이러한 서사의 특이점들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하며 <세븐>을 보고 또 보다가, 

불현듯 이것들이 쉽게 설명되는 관점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종말적 분위기의 대도시를 배경으로 한 스릴러 영화 <세븐>은 

사실 신과 인간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서머셋을 나타내는 키워드가 있다면 질서(정리벽, 메트로놈, 도서관)입니다. 

게다가 그는 캐릭터 설정상의 단순성(독신, 전사의 부재)과 그 초탈한 태도로 인해

피와 살이 흐르는 인간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가족이 있고, 다혈질이며, 일단 저지르고 보는 밀즈와 대비되는 지점이죠.

그리고 서머셋은 (아마도)불면증은 시달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집 안까지 세상의 온갖 소음이 전부 들려오기 때문입니다. 

추상적인 존재이며, 질서를 선호하고, 집에서조차 세상의 온갖 소리를 듣는 존재. 

결국 서머셋은 이 세상을 굽어보고 있는 신을 은유하는 것입니다. 

다만 서머셋은 이 죄의 구덩이에서 지칠대로 지쳐버린 신입니다. 

"아이가 (이 참극을)봤을까?"하고 묻는 신에게, 

인간들은 그딴 게 뭐가 중요하냐고 반문하기 때문입니다. 

서머셋을 신으로 본다면, 그가 퇴직을 원한다는 것은 단순히 캐릭터의 내적 욕망이 아니라 

신조차도 이 세상을 저버리려 한다는 종말적인 선언이 됩니다. 

이 상황에서 그는 신참인 밀즈를 떠맡습니다. 

누가 봐도 불완전한 인간처럼 보이는 밀즈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 

그건 어쩌면 인간에 대한 마지막 숙제입니다. 

밀즈는 누가 강권해서가 아니라 그에게 배우고 싶다는 이유로 

서머셋의 파트너가 되기를 자청했습니다. 

이러니 서머셋이 그를 저버릴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신이 자신을 찾는 인간을 저버릴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한 이야기의 심층을 발견하는 감각은 논리보다는 직관입니다. 

어느 순간의 착각, 어느 순간의 착시가 그 심층을 엿본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이죠. 

저 역시 불현듯 그렇게 느꼈습니다. 

오프닝 크레딧 시퀀스가 시작되기 직전, 

소음 속에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는 서머셋의 모습이 

세상의 절규와 비탄을 듣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신처럼 보인 것입니다. 


이때 곧장 따라오는 질문이 있습니다. 

서머셋이 신이라면, 그는 왜 그렇게 무력한가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새로운 약속, 즉 신약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세상을 인간들의 것으로 놓아두는 것.

그래서 서머셋은 조언을 하며 이끌기는 하지만, 밀즈의 선택을 결코 강제하지 않습니다.

물론 서머셋의 이러한 수동성은 표면적으로 이해해도 충분히 말이 됩니다. 

어차피 퇴직할 테니 실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길 꺼리는 건 당연하니까요. 

그리고 지금 저의 비약들처럼, 그를 이 죄많은 세상의 신이라고 여겨도 말이 되고 말입니다. 

(공교롭게도 모건 프리먼은 몇 년 뒤에 찍은 <브루스 올마이티>에서 진짜 신을 연기합니다)


이 영화가 신-서머셋이 인간-밀즈를 이끄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라면, 

적대자가 누구인지는 뻔합니다. 바로 악마지요. 

범인인 '존 도(신원미상인에게 붙이는 가명)'는 앞서 언급했듯 존재의 증거가 없습니다. 

캐릭터로서의 추상성이 서머셋보다 한술 더 뜨는 셈입니다. 

추상적인 존재이면서 악을 행하고 있다면, 그 정체는 악마라고 밖에는 설명이 안됩니다. 

신이 일주일에 걸쳐 천지를 창조했듯이, <세븐> 속의 악마는 일주일에 걸쳐 악을 완성하려 합니다. 

그렇게 보면 <세븐>은 천지창조를 가장 불길하게 뒤집은 이야기이며, 

전설적인 오프닝 크레딧에서 존 도가 작성하고 있는 노트는 종말의 성경인 셈입니다. 

관점이 여기까지 이르렀다면, 범인이 갑자기 밀즈를 표적으로 삼는 이유도 분명해집니다. 

<다크나이트>의 조커가 그랬듯, 악마는 노리는 건 하나 뿐이니까요. 

바로 인간의 타락. 

그러니 그가 밀즈-인간-를 노리는 것은 당연하고, 

최후의 황야로 범인과 두 형사가 동행하는 과정은

인간을 사이에 둔 신과 악마의 경합이 됩니다. 

이 심층적 은유는 트레이시의 죽음을 알게 된 밀즈가 범인에게 총을 겨누면서 절정을 이룹니다. 

밀즈를 사이에 둔 채 

'너의 분노를 행하라'는 악마의 속삭임과 

'그래선 안된다'는 신의 설득이 번갈아 교차되는 것이지요. 

여기서 되새겨야 할 지점이 있습니다. 

존 도는 자신의 집을 수색 중인 형사들에게 전화를 걸어와서 

"자네 때문에 내 계획을 조금 수정했다"고 말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은신처가 발각되는 바람에 차후의 살인계획을 불가피해야 수정해야 했던 것이죠.

이걸 뒤집어 생각하면, 서머셋과 밀즈가 범인의 은신처를 찾아내지 못했다면 

밀즈가 표적이 되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여기서 질문, 서머셋과 밀즈는 범인의 집을 어떻게 알아냈습니까?

바로 서머셋의 부정행위를 통해서였습니다. 

FBI 요원에게 뇌물을 줘서 단테의 <신곡>을 대여한 이들의 리스트를 손에 넣었던 것이죠. 

그건 경찰의 합법적인 수사 절차가 아니었습니다. 

서머셋은 밀즈를 올바른 길로 인도했어야 함에도 도리어 앞장서서 부정을 저질렀고, 

여기서 사실상 신과 악마의 내기 결과는 결정되고 만 것입니다. 

악마의 표적이 된 순간, 나약한 인간 밀즈가 견뎌낼 방법은 없었습니다. 

악마의 덫은 너무나 억세고 잔인하니까 말입니다. 

밀즈는 결국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고, 황야엔 절망적인 총성이 울려퍼집니다. 

인간 그 자체를 부수는 듯한 총성이. 


황혼이 지난 어스름한 어둠 속에서 서머셋은 차 안에 갇힌 밀즈를 바라봅니다.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밀즈. 

내기에서 승리한 악마-존 도는 밀즈의 영혼을 가져간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던 서머셋에게 반장이 어디로 갈 거냐고 묻자, 서머셋은 답합니다. 


"근처에(Around)"


그건 퇴직 결심에 대한 번복이기도 하지만, 

마치 신이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에 답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또한 '어디로 갈 건가?'라는 반장의 질문은

요한 복음서 13장 36절에 등장하는 베드로의 예수에 대한 질문, 

'어디로 가시나이까(쿠오 바디스)?'를 연상케 합니다. 

서머셋은 매일 밤마다 침실까지 들려오는 세상의 절규와 비탄을 들어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근처에 있겠다고 합니다. 

세상은 절규로 가득하고, 악은 강대하고 인간은 나약하지만, 

그래도 자신은 여기에 남겠노라는 선언. 

그것이 숱한 죄악과 죽음으로 점철된 영화 <세븐>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아주 작은 희망입니다. 

그리고 그 희망은 우리에게 어려운 질문을 던지기도 합니다. 

이 세기말의 세상에서, 당신도 여전히 희망을 품고 살아가겠냐고 말입니다. 


아침에 창 밖을 보니, 첫눈에 뒤덮인 세상이 하얗습니다. 

물론 저 순수하고 하얀 세상의 이면에는, 여전히 좌절적인 난해함과 숱한 악이 숨어있을 것입니다. 

서머셋의 말대로 세상은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절망보단 희망을 품고 살아가고 싶습니다.

밀즈는 끝내 악에 넘어가고 말았지만, 그 타락조차 아내에 대한 깊은 사랑에서 비롯되었으니 말입니다. 

저는 그 위태로운 사랑을 믿습니다. 




*<반지의 제왕 : 왕의 귀환>에서, 사악한 절대반지가 운명의 산의 용암 속으로 떨어지는 계기는 골룸이 발을 헛디뎠기 때문입니다. <반지의 제왕>의 작가이자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톨킨은 그 '헛디딤'의 순간이 세계관 속 창조주인 일루바타르가 이 세상의 악에 나름의 방식으로 개입한 것이라고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신이 있다면 왜 세상의 악에 개입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명쾌한 신학적 해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은 수수방관하지 않습니다. 서머셋이 밀즈에게 계속해서 기회를 주고, 설득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덧붙이자면, 저는 종교가 없습니다만 그렇다고 무신론자냐고 한다면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신이 없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증명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족 : 범인이 자수를 위해 경찰서를 찾아오는 대목은 극적으로 아주 중요한 장면입니다. 이때 핀처는 밀즈의 뒤편에 서머셋을, 그 배경으론 성조기를 배치했습니다. 이러한 미장센으로 밀즈는 미국과 동일시됩니다. 신의 목소리를 저버린 채 악에 넘어가고 마는 것. 그것이 핀처가 예언한 '갓 블레스 아메리카'의 미래였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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