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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이 Dec 06. 2024

<박하사탕> Peppermint Candy, 2000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한 남자가 카메라에 있던 필름을 통에서 뽑아버리고 있다. 

현상되기 전의 필름이 빛에 노출되면, 담았던 이미지들은 날아가버린다. 

그러면 돌이킬 수 없게 된다. 

결국 저 남자는 필름에 담긴 과거의 추억들을 제 손으로 영원히 날려버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남은 시간을 지켜보고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된다. 

저 망가진 남자에게, 추억은 과거에 대한 고통스런 후회만 늘려놓는다는 것을. 

물론 희망적인 작가라면 저기 담겼을 추억의 순간을 통해 

저 남자, 김영호에게 구원을 안겨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건 불가능하다. 


김영호가 필름을 뽑는 사이에 뒤편으론 열차가 지나가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필름의 형태를 연상시키는 열차가. 

필름이 시간의 풍화로부터 추억을 보존하는 도구라면, 

열차는 멈추지 않고 앞으로 달려가는 시간 자체를 은유한다.*

남자는 제 손으로 추억-필름을 날려버렸지만, 

영화는 열차-필름을 통해 남자의 추억을 거슬러 오른다. 

여기엔 잔혹한 농담이 있다. 

시간의 역행-거꾸로 가는 열차란 오직 영화에서나 가능하니까. 

김영호의 구원이 불가능한 이유는

그가 오프닝에서 이미 열차에 치여 죽었기 때문이다. 

그건 흘러간 시간이며, 지나간 역사이다. 


개인적으로 한국영화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꼽곤 하는 <박하사탕>은 

7개의 챕터를 시간의 역순으로 펼쳐내며 전개된다. 

우리는 김영호라는 인물의 현재(1999년)를 가장 먼저 보고, 

일정한 단락으로 건너뛰며 그의 삶을 청년기의 한순간(1979년**)까지 거슬러 오른다. 

말하자면 <박하사탕>은 김영호라는 인물에 대한, 거꾸로 보는 역사서와 같다. 

이 플롯이 기막힌 비극을 이루는 이유는 그 불변성 때문이다. 

빌리 와일더의 <선셋대로>와 <이중배상>이 '죽은 자' 혹은 '곧 죽을 자'의 나레이션으로 시작하듯이, 

<박하사탕>도 첫번째 챕터에서 김영호의 자살을 보여준다. 

뒤에서(과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 사실은 불변이다. 

김영호는 현재에서 죽었다. 

뒤이어 드러나는 챕터들은 김영호가 악인이 아니라, 

역사로 인해 망가져버린 슬픈 개인에 불과했음을 보여주지만, 

그가 이미 죽어버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 가혹한 불변성이 안겨주는 무력감은 

오늘을 사는 현세대가 지나간 역사 앞에서 탄식하는 감정과 동일하다. 

우리가 아무리 규탄한다 해도 

역사에 새겨진 사건들을 되돌릴 순 없기 때문이다. 

한국전쟁과, 숱한 학살과, 국가 분단과, 군사 반란과, 

12월 12일의 또 다른 군사반란과, 5월 18일 광주에서의 참극과, 

IMF 외환위기와, 비선의 국정농단 뿐 아니라, 

어떤 시기에 어떤 대통령이 당선되었다는 국민의 선택조차

결코 없었던 일이 되지 않으며, 

그것들은 그 순간으로 끝나지 않고 현재와 미래에까지 길고 긴 뿌리를 뻗친다. 

오늘이란 결국 어제의 결과인 것이다. 

말하자면 모두가 '재앙적 수준'이라 말하고 있는 저출산 문제. 

그것이 수도권 과밀화 해결의 골든타임을 놓친 시점부터 굴러온 스노우볼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늘어만 가는 자살률과 고독사 문제. 

그것이 고도성장 시기, 경제성장을 개인의 행복과 동일시했던 집단적 최면의 대가를 

이제야 치르는 게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모두가 모두를 향해 보여주는 끝간데 없는 증오. 

그것이 합당한 징벌과 그에 뒤따르는 용서가 없었던 우리 역사가 만든 풍경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선택할 권한조차 없었던 채, 

역사에 의해 강제된 오늘을 살아야 하는 현세대에겐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희망을 가지고 내일로 나아가려는 이들에게, 

그 음습하게 창궐한 어제의 뿌리를 잘라내는 일이란 얼마나 어렵단 말인가. 

김영호가 과거의 짙은 어둠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듯이. 

결국 <박하사탕>은 역사라는 주제를 역사를 닮은 구조로써 드러내고, 

거기서 말미암은 윤리의식은 이 영화를 한 악인에 대한 감상주의적 변명으로 머물지 않게 한다. 

이창동 감독은 역사 앞에서의 무력감과 슬픔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플롯을 통해 체험시키는 것이다. 


시간을 순차적으로 거슬러 오르는 <박하사탕>의 구조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남아있는 어떤 질병을 떠오르게 하기도 한다. 

현재를 잊고 점차 과거로 퇴행하는 병, 바로 알츠하이머. 

영화의 마지막 챕터, 청년 김영호는 자신이 (미래에)죽을 장소로 야유회를 와 있다. 

물론 청년 김영호는 중년 김영호가 어떤 삶을 살아갈지, 

어떤 최후를 맞이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는 다리 위로 지나가는 열차를 한참 바라보다가 한줄기 눈물을 흘린다. 

마치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듯이. 

혹은 이 모든 되새김이 죽음 직전의 주마등이었다는 듯이. 

그 눈물 서린 얼굴의 클로즈업으로 끝나는 <박하사탕>의 클로징 쇼트는

스무살에 보았을 땐 가슴을 치게 슬펐지만, 

지금 와서는 싸늘한 경고처럼 보였다.

이 영화를 본 당신은 

저 눈물만을 기억하며 역사의 치매로 살 것인가, 

그 죽음을 기억하며 오늘의 파수꾼이 될 것인가. 


이야기란 청자의 기억력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역사도 하나의 이야기다. 

당신이 무엇을 어떻게 기억하는지가 결국 그 이야기를, 그리고 역사를 규정한다. 

<박하사탕>은 역사의식을 강의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그 자체로 역사이다. 





*<살인의 추억>의 백광호 역시 열차에 치어죽는다. 그를 죽인 것은 시간, 결국 망각이다. 

**김영호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자 영화의 마지막 챕터 시간대인 

1979년은 짧았던 '서울의 봄'이 있던 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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