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터로 간 <쉰들러 리스트>
93년은 세계 영화팬들에게 입이 떡 벌어지는 한 해였다.
최고 수준의 오락영화인 <쥬라기 공원>과
최고 수준의 아카데믹 필름인 <쉰들러 리스트>가 연달아 우리를 찾아왔기 때문.
게다가 이 두 영화는 한 감독의 손에서 만들어졌다.
바로 스티븐 스필버그.
아무리 90년대가 헐리우드 자본력과 제작기술의 황금기였다 해도,
이 걸작들을 한 해 동안 찍어버리는 창조력은 초인적이라고 밖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쉰들러 리스트>가 최초 시사회 당시 감독의 이름을 숨겼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당시만 해도 상업주의에 매몰된 감독 취급을 받던 스티븐 스필버그는
헐리우드의 고상한 평론가들이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 선입견을 지운 채 정면승부할 작정으로 크레딧을 숨겼다.
그 결과 <쉰들러 리스트>는 시사회에서의 호응에 이어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까지 총 7개 부문을 수상했고,
자신이 지나치게 평가절하된 감독임을 증명해냈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제작사인 유니버설 픽쳐스와의 일화.
스필버그는 오래 전에 이미 <쉰들러 리스트>의 원작 소설인 <쉰들러의 방주> 판권을 사들여
시나리오 작업을 마쳐두었지만, 감독 적임자를 찾지 못해 제작까지 난항을 겪었다.
이때 스필버그가 감독직을 제안하기 위해 만났던 유대계 감독 빌리 와일더는
도리어 스필버그에게 직접 메가폰을 잡으라고 설득했다.
그 말에 용기를 얻은 스필버그는 유니버설에 <쉰들러 리스트>의 제작기획서를 제출하지만,
유니버설 수뇌부는 달갑지 않았다.
<쉰들러 리스트>는 막대한 제작비가 들 것임은 분명하면서도, 흥행하기는 어려워 보였으니까.
하지만 스필버그가 계속해서 고집을 부리자 유니버설은 한가지 조건을 내민다.
그건 예정되어 있던 <쥬라기 공원> 작업을 <쉰들러 리스트>보다 먼저 끝낸다는 것.
어쩌면 유니버설은 스필버그가 <쉰들러 리스트>를 만들고 나면
다시는 <쥬라기 공원> 같은 영화를 만들지 못할 것임을 예견했는지도 모른다.
'공룡이 되살아난다면 어떨까?'라는 소년적 판타지가 담긴 <쥬라기 공원>에 비해,
또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모험과 상상으로 가득했던 그의 전작들에 비해,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을 다룬 <쉰들러 리스트>는 어둡고, 현실적이며, 또 참혹했기 때문이다.
스필버그의 초기 관심사가 우리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판타지였다면,
<쉰들러 리스트>부터의 관심사는 그 판타지 너머의 현실이었다.
말하자면 <쉰들러 리스트>는 소년 스필버그가 어른 스필버그로 나아가는 관문의 영화였던 셈이다.
이후 <잃어버린 세계 : 쥬라기 공원>과 <아미스타드>라는 또다른 양극단을 거쳐,
스필버그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로 돌아온다.
철저히 감춰졌던 제2차 세계대전의 심연, 즉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을 다뤘던 스필버그가
이번엔 '비교적 잘 알려진' 제2차 세계대전의 겉면, 그 전쟁의 모습을 비추기로 한 것이다.
어쩌면 처음에는 화려한 전쟁 스펙터클을 담은 오락영화로 기획됐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제작 과정에서 종군기자 로버트 카파의 사진들,
그리고 참전용사들의 경험담을 수집한 스필버그는 한가지 결론을 얻었다.
'전쟁은 오락이 아니다.'
그래서 스필버그는 종래의 전쟁영화들처럼 전쟁을 '중계'하는 방식을 버리고,
관객을 전쟁 한복판에 던져놓는 스타일을 고안해냈다.
그는 전장을 조망하듯 비추는 설정샷이나 화려한 크레인샷을 버리고,
카메라가 당시의 병사들처럼 전장을 직접 누비게 만든 것이다.
이건 '카메라가 반드시 땅에 발 딛고 있어야 한다'는 <쉰들러 리스트>의 촬영 철학과 동일했다.
완성된 영화를 본 참전용사가 눈물을 흘리며 "그때와 다른 건 냄새 뿐이었다"고 말한 건 유명한 일화이며,
일부 참전용사들은 PTSD로 극장을 뛰쳐나가기까지 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창조한 스타일은
<메달 오브 아너> 같은 걸작 게임 뿐 아니라 <블랙호크다운>, <태극기 휘날리며>, <위 워 솔져스>, <고지전> 같은 후대의 전쟁영화들에 영감을 주거나 영향을 끼쳤고,
<쥬라기 공원>이 공룡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창조했다면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이들의 전쟁에 대한 인식을 창조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전쟁을 바라보는 방식을 '발명'해낸 것이다.
영화는 국립묘지를 찾아와 '그날'의 파도소리를 듣는 한 노인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그날이란 바로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벌어졌던 D-day.
긴장한 병사들을 태운 상륙정이 파도를 부수며 해안으로 향하고 있다.
이때 유명 배우인 톰 행크스가 맡은 밀러 대위의 얼굴이 먼저 비춰지기 때문에,
우리는 노인의 정체가 노년의 밀러 대위일 것이라 짐작한다.
이후 카메라는 상륙정에 탄 다른 병사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비춘다.
마치 이들이 이 영화의 주인공이라고 소개하는 듯 하다.
하지만 해안에 도착한 상륙정의 문이 열리면, 그들은 쏟아지는 기관총탄에 난자당해 육편이 되고 만다.
어안이 벙벙해진 우리는 곧 깨닫는다.
이 영화에 '총알이 피해가는 주인공' 따윈 없다고.
우리는 지금 '전쟁영화'가 아니라 '전쟁'을 보고 있다고.
그 참혹함에 혀를 내두를 새도 없이,
영화는 생지옥을 구현한 듯한 전쟁의 참혹한 면면을 끝도 없이 펼쳐낸다.
한 병사는 자신의 떨어져 나간 팔을 들고 헤매이고,
하반신이 떨어져 나가거나 총탄에 얼굴이 사라진 주검들이 즐비하며, 포말은 핏빛으로 물든다.
무력하게 부서지는 육체들의 공포, 끝도 없는 죽음의 혼돈과 허무.
이전의 다른 영화들이 전쟁의 비윤리성을 하염없이 설명할 때,
스필버그는 그 참혹함을 그저 체험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다시 본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유독 눈에 띤 부분은
그 처절하고 참혹한 전쟁 리얼리즘이 아니라, 이 영화의 단순한 이야기였다.
밀러 대위는 휘하의 대원들을 데리고 제임스 프랜시스 라이언 일병을 찾아
집으로 돌려보내라는 사령부의 명령을 받는다.
라이언의 다른 형제들이 이 전쟁에서 모두 전사했기 때문에,
누군가의 단 하나 남은 아들인 라이언이라도 반드시 생환시켜야 한다는 명목.
밀러 대위와 그 대원들에게 이 명령이 합리적으로 보이진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도 누군가의 아들들이고,
전쟁 한복판에서 라이언을 찾으려다가 이들 모두가 죽을 수도 있으니까.
한 명을 위해 여덟 명의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아이러니.
대원들 중 저격수를 맡고 있는 잭슨은 말한다.
"신은 저에게 전쟁에 적합한 재능을 주셨죠.
만약 저를 히틀러가 잘 보이는 곳에 데려가 주시기만 하면
딱 한방으로 전쟁을 끝낼 수 있어요."
그의 말대로 라이언을 구하는 일은 이들에게 어울리지 않을 뿐더러,
비효율적이거나 혹은 무의미한 일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겨우 찾아낸 라이언은 전우들을 버리고 갈 순 없다며 버티고,
그 때문에 밀러 대위 일행도 몰려드는 독일군과 맞서 최후의 전투에 임한다.
수적으로 열세인, 어쩌면 죽음이 예정된 전투.
그들이 짊어진 임무의 아이러니는 극에 달한다.
냉소적인 일부 평론가들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싸구려 휴머니즘 혹은 팍스 아메리카나를 담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임무에 동의를 구하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라이언을 구하려는 사령부-조지 마셜 육군참모총장의 '선한 의도'가 보여지긴 하지만,
그건 그 임무를 직접 수행해야만 하는 병사들의 푸념 속에 묻혀버리고,
스필버그는 그 공허한 '책상머리 휴머니즘'이 그냥 묻히도록 놓아둔다.
다만 이어지는 것은 이 지옥 속에서의 끝없는 질문이다.
'이 임무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
단 한명을 위해 여덟 명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이 임무가.
클라이맥스에서는 초반의 상륙전이 잊혀질 정도로 처절무비한 전투가 이어지고,
전투는 승리로 끝나지만 밀러 대위는 중상을 입는다.
그는 회한이나 분노 속에서가 아니라, 웃으며 숨을 거둔다.
그건 자신이 이 지옥을 탈출하지 못했을지언정,
단 한명의 사람만큼은 이 지옥에서 구해냈다는 안도의 웃음이다.
잭슨의 말대로 전쟁을 끝낼 수 있는 결국 총탄일지언정,
그들의 진짜 사명은 전쟁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전쟁 이후에도 이어가야만 하는 삶에 있기 때문이다.
결국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참혹한 전쟁 리얼리즘을 통해 깨닫게 하는 것은
고작 한 명의 목숨을 구하는 일의 무용함이 아니라
단 한 명의 목숨이라도 구해야 하는 절박함이다.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은 곧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
<쉰들러 리스트>에서 인용된 탈무드의 구절처럼.
총탄이 빗발치진 않더라도, 오늘날의 생존경쟁은 자주 전쟁터에 비교되곤 한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의 이유로 각자의 전쟁터에 내몰린다.
그 속에서 인간애란 낡은 위선이나 무의미한 관념이라며 외면되기도 한다.
<오징어 게임>이 참가자들이 어쩔 수 없이 내몰리듯이,
전쟁이 우리에게 냉혹하고 이기적인 선택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당신이 지금 전쟁터에 있다고 생각된다면,
부디 전쟁 이후의 삶을 생각해달라고 말한다.
우리가 전쟁이라는 지옥을 겪어서라도 지키고자 하는 것은,
그 보잘 것 없고 비효율적이지만, 결코 잃어선 안 되는 인간애의 세상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