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너'도 아닌, '나'의 해방
작금의 한국 컨텐츠에는 백마 타고 온 '초인' 내지는 '초현실'이 넘쳐난다.
이탈리아 마피아가 한국까지 와서 마피아보다 더한 악질 재벌과 맞서는가 하면,
'정의는 있었으나 세력이 없었던' 검사가 인생을 다시 살 기회를 얻고,
괄괄한 여검사가 재벌집 며느리의 자리를 대체하고 난동을 부린다.
혹은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어떠한가.
신원호 감독의 말대로 이것이 '좋은 사람들의 선한 이야기'라면, 그런 의도라면,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리얼리즘이지만 리얼리스틱하지 않은 기묘한 이야기다.
이 드라마의 캐릭터들이 '좋은 사람들'이기에 그런 것이 아니다.
그들이 당면하는 문제들이 시대 말단의 문제와는 철저하게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어떤 문제? 반문할지도 모른다.
내 집의 소유, 결혼하고 출산할 여유, 나날이 오르는 세금과 달리 떨어져만 가는 출산율.
일각에선 '국가 소멸의 위기' 혹은 '환경 재난이 코 앞'이라며 다가올 종말을 말하고,
세계 어딘가에선 부당한 침략전쟁이 자행되어 전근대의 비극이 재현되는 중이다.
쉽게 말하면 오늘날의 사람들에게서 행복이, 희망이 소멸되어 가고 있다.
그건 결국 현재와 미래가 모두 망가지고 있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일확천금의 욕망, 증오, 조바심, 조용한 절망감이 사방에서 죄어들고,
사람들은 고독사라는 이름으로 홀로 죽거나, 일터에서 죽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현재 대한민국의 한 해 자살자 숫자는 14,000명에 이른다.
나날이 늘어만 가는 이 죽음들은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만든다.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차라리 IMF 때는 낭만이라도 있었지'라고 토로하며
이야기의 시간을 과거로 되돌리고,
<사내맞선>과 <기상청 사람들>의 주인공들은
계산기를 내려두고 '우리에겐 사랑이 필요해!'를 외친다.
말하자면, 나는 근래의 한국 드라마에서 지금의 시대를 보지 못했다.
노희경 작가의 <우리들의 블루스>조차도
작금의 시대에 산적한 문제를 설명할 방법이 없어
먼 바다 건너의 제주도로 피난을 온 것처럼 보인다.
나는 이야기란 결국 인간을, 혹은 세상을 이해하는 가능성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100가지의 이야기가 존재한다는 것은 100가지의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오늘날 내 눈에 비친 드라마들 중에서
과연 몇 편이나 이 시대를 이해하려 고심하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나는 앞서 언급한 드라마들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왜냐하면 그 드라마들 또한 각자의 방법으로 이 시대에 대해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를 설명하기 위해 이 시대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끌어들이는 것 또한 화법의 한 방법이다.
그렇게 끌어들여진 대상은
이탈리아 마피아나 2회차 인생 같은 '판타지'일 수도 있고,
맑고 따뜻한 의사들과 사랑을 향해 뛰는 청춘들처럼 '희귀해진 무언가'일 수도 있으며,
철저한 방언이 살아 숨쉬는, 낯설지만 정겨운 마음의 고향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작금의 시대 자체와 뒤엉켜 있는 드라마가 없다는 사실이 아쉽기만 하다.
물론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혼란이 들끓는 이 시대를
질서정연한 이야기 속에 담아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만약 이 시대가 실패한 시대라면,
우리는 실패한 이야기로서 그 시대를 볼 기회가 있어야 한다.
영화 <1987>은 혁명 열기가 최고조에 이른 순간에 끝났고,
숱한 로맨스 드라마들은 사랑이 결실을 맺은 순간에 끝나지만,
우리는 혁명과 결실 이후에도 삶을 지속해야 하기 때문이다.
<옷소매 붉은 끝동>이 탁월한 이유도 그 사랑의 종말까지를 담아낸 까닭이다.
안타깝게도 지금 문화계의 많은 거울들은 그 시대를 정면으로 비추고 있지 않다.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이라는 사이드 미러의 경고문이 두렵게 느껴질지언정,
우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이 시대를 이해해야 하고
그 이해를 도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야말로 바로 이야기다.
드라마에서 판타지 혹은 도피란,
약의 하나이되 부작용이 강력한 약이라고 나는 믿는다.
우리가 그 달콤한 약에 중독된다면 쓰디쓴 현실을 더더욱 외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아편만큼 무서운 진통제다.
문화 생산물들이 그 시대에서 도피하고 있다면,
대체 무엇때문에 도피하고 있는지 사유해야만 한다.
'백마 타고 온 초인'을 기다리기 전에,
과연 어떤 결핍이 우리로 하여금 '백마 타고 온 초인'을 기다리게 만드는지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과거엔 고민을 위해 지성이 필요했다면,
오늘날에는 지성보다는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이 알았던 것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음을 되새기는 것.
영웅이라 믿었던 자가 악인일 수도 있었음을 상기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기피하고 싶은 무언가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
혹은 우리가 만들어야 할 것이 '유토피아'가 아니라 '그나마 덜한 디스토피아'일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것.
박해영 작가의 <나의 해방일지>를 보면서
매 화의 러닝타임이 줄어드는 것이 야속하게 느껴진 것은 그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드라마가 정말 오랜만에,
내가 몸담은 이 시대 자체를 응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나의 눈을 아프게 한다.
나아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거기엔 막연한 '연대' 혹은 '정의'라는 미명으로
'나'를 훼손시키려 하지 않는 작가의 치열한 통찰과 인간애가 있다.
그래서 <나의 해방일지>라는 제목은 의미심장하다.
'우리'도 '너'도 아닌, 일단 '나'를 긍정하고 해방하는 것.
산포시의 세 남매는 시간이 늦어지면 함께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차창 밖으로 야경이 흐르는 동안 택시 안에는 침묵이 감돈다.
휘황하게 흐르는 야경,
그와 상반되는 피곤한 침묵.
어쩌면 그것은 흘러가는 시대 속에 놓인
'나'들의 가장 핵심적인 이미지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 시대를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버텨내고 있는 것이다.
하루살이에 거덜이 나 피곤해진 몸과 마음으로,
한시바삐 집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면서.
그 풍경 속에 초인 따윈 없다.
다만 '고백도 카톡으로, 싸움도 카톡으로, 이별도 카톡으로' 하고,
말과 문자는 넘쳐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처절하게 외로운 이 시대가 있을 뿐이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남매는 이 거대한 아이러니와 맞설 능력이 없다.
그들에겐 사회악과 맞서는 것보단 귀갓길의 택시비 절감이 더 중요한 테마이고,
더 높은 연봉, 더 넓은 집, 더 빠른 차보다는
'서울'이라는 지정학적 '노른자'에 가까워지는 것이 어쩌면 이룰 수 없는 필생의 과업이며,
너무나 지치고 피곤해서 갑질과 부당 앞에서 '사이다'로 맞설 수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워지고 싶다'고 갈망하는 가녀린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를 추앙해요!"라는 염미정의 그 기이한 요구는
이 드라마에 담긴 가장 강력한 판타지인 것이다.
고작해야 한 마디 요구라는, 그 가녀린 판타지.
나는 <나의 해방일지>를 보면서 텔레비전이 외면해왔던 우리 삶의 미시성을 다시 깨닫는다.
그건 거악의 척결, 사회 시스템의 개선, 애정의 혁명이라는 구호가 아니다.
남매를 태워준 택시기사는 경기도를 나오면서 다른 손님을 태웠을까 싶은,
남매의 어머니는 매번의 끼니를 준비하는 것이 얼마나 고될까 싶은,
아버지의 어깨엔 어떤 짐이 얹어져 있기에 저리도 노동이 묵묵한가 싶은,
우리 삶에 지병처럼 달라붙어 있는 먹고 사는 문제들.
먹고, 산다.
좋은 드라마들은 그 당연한 문제를 보여준다.
먹고 사는 것은 인간을 유지시키는 토대이고,
그 일상을 지킬 수 있다면 인간은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다.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지켜져야 할 인간 존재의 조건.
박해영 작가는 '우리'를 부르짖기 전에 '나'를 지키고,
이념과 정의를 내세우기 전에 일상부터 지키라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나의 해방일지>는,
이미 걸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