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히치콕의 <싸이코>를 평가하면서,
히치콕을 혹독하게 비판했던 이들은 우리의 기억에서 잊혀졌지만,
히치콕과 그의 영화들은 "시간의 시련을 견디어 내고" 기어코 승리하고 말았다고 썼다.
나는 그 구절을 좋아한다.
'시간의 시련을 견디어 낸다'는 것.
이 우주의 영속에 비해 찰나를 살아가는 인간이,
그 기나긴 시간 속에서 이뤄낸 슬픈 승리.
영속적인 생명력을 갖기 위해,
반드시 영화적으로 위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에 있어서 사람을 매료시키는 매력과 예술적 성취란,
일치할 때도 있지만 불일치할 때도 있다.
어떤 영화들은 분명히 평작임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에 머물렀던 관객들에게 영원한 최면을 건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그래서 '예술성을 평가하는 영화제'의 리스트에 집착해선 안된다고 말한 바 있다.
영화는 스포츠가 아니고, 국내외 유수의 영화제들 또한 그 기량을 겨루는 올림픽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란 자본의 산물이지만 동시에 성취의 기록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한, 예술의 영역인 것이다.
따라서 어떤 영화들을 '평작'이라고 말하는 것 또한 주관적 기록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수많은 세인들의 입에 끝없이 오르내리며 영속성을 구가하는 영화들이 있는 한편,
시간의 풍화를 못 이기고 잊혀지는 영화들도 있다.
그러나 분명 평작(혹은 걸작이라 하기엔 아쉬운)임에도,
내 기억 속에서 오래도록 살아남고 있는 영화들이 있다.
나에겐 그 초라한 리스트가 세계영화제의 수상작 리스트보다 소중하다.
1. <라스트 캐슬> - 군번줄을 건 <쇼생크 탈출>
개봉년도 : 2001년
감독 : 로드 루리
미군의 전설인 유진 어윈 중장은 전투지휘 실패라는 죄목으로 군 형무소인 트루먼 교도소로 수감된다.
트루먼 교도소는 결국 철근과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성이다.
그가 수감되는 날, 죄수들은 유진이 이 끔찍한 곳에서 얼마나 버틸지를 가지고 내기를 벌인다.
이곳의 죄수들도 한때 투철한 군인이었으나,
과오를 범했다는 자책감과 더불어
이곳을 지배하는 사디스트 윈터 대령의 압제 아래 놈팽이들로 전락한지 오래다.
유능한 지휘관인 유진은 '실전 경험 없는 군인'인 윈터의 열등감,
그로 말미암은 트루먼 교도소의 병폐를 단숨에 파악한다.
그러나 계급장도 박탈당한 일개 죄수인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
바로 이들이 잊어버린 '군인 정신'이라는 케케묵은 가치를 되새겨 주는 일이다.
그 투철한 의지는 쓰레기에 불과했던 죄수들의 마음에 불을 지피고,
윈터가 지배하는 이 난공불락의 성에서 일대 반란이 벌어진다.
로버트 레드포드는 그 신중한 연기로 유진 어윈을 <더록>의 험멜 장군과 비견할 만한 캐릭터로 만든다.
유진은 자신이 일개 죄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한때는 군인이었기에 부당한 명령과 비열한 원칙을 거부한다.
한 명의 인간이 타락한 집단을 바꾸어 나간다는 점에서 <라스트 캐슬>은 <쇼생크 탈출>과 유사하다.
그러나 클라이맥스에서의 선택은 과연 군 형무소를 배경으로 한 영화답다.
유진은 '탈출'하기보단 '점령'하려 한다.
유진은 그 조용한 카리스마와 지휘력으로 실탄과 헬리콥터, 물대포로 무장한 교도소측과 맞서
중앙 깃대에 '성조기를 거꾸로 게양하는' 국제 공인 구조신호를 보내려 한다.
그건 이 감옥의 폭군인 윈터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다.
동시에 국기의 반전 게양이란 한때 그 성조기 아래 경례를 바쳤던 그들 스스로의 정신에 대한 모독.
그야말로 우파적인 딜레마와 아이러니.
유진은 스스로의 선택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그럼으로써 그가 긍지를 잃지 않은 군인임을 증명한다.
<더록>의 주인공인 메이슨은 험멜 장군과의 그 유명한 설전에서,
"애국심은 사악한 자의 미덕이다"라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인용했다.
그러나 <라스트 캐슬>은 '사악한 자의 미덕'으로 머물지 않는,
조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웠던 진정한 애국심과 군인정신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포스트 모던이 활개치는 이 혼란스런 세상에서,
<라스트 캐슬>은 우리가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되새겨 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가치와 이념이 아니라, 우리가 한때 거기에 걸었던 희망과 의지라는 것을.
그래서 이 영화는 매해 나를 다시 찾아오는 영화다.
2. <레인 오브 파이어> - 스킨헤드 마초와 드래곤
개봉년도 : 2002년
감독 : 롭 보우먼
과거 공룡을 멸종시켰던(!) 전설 속의 드래곤이 부활한다.
강철같은 비늘과 화염의 숨결, 초월적인 번식력 앞에 인간 문명은 순식간에 몰락하고,
잿더미가 된 세상에서 인간들은 '전설의 먹잇감'으로 전락한다.
요새에 숨어 방어적 태도를 고수하던 영국인 생존자 집단의 리더 퀸(크리스찬 베일)은 어느날
미국인 해병대 리더 벤젠(매튜 매커너히)과 마주한다.
'생존을 위한 방어'를 내세우는 퀸은
'생존을 위한 공격'을 부르짖는 벤젠과 팽팽한 기싸움을 벌인다.
<레인 오브 파이어>는 거대 제작비를 투여한 B급 공상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탁월한 특수효과로 창조된 드래곤의 무자비한 공격성과,
자살특공대를 던져가며 신화 속의 괴수와 맞서는 인간들의 처절함은 남자의 가슴을 끓게 만든다.
이 허무맹랑한 발상에 놀라운 박진감을 불어넣는 크리스찬 베일, 매튜 매커너히의 협연은 덤.
그 중에서도 이 영화를 지배하는 것은 스킨헤드로 등장해
압도적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해병대장 벤젠의 캐릭터다.
그는 영국을 지배하는 드래곤의 왕, 유일한 수컷을 사냥함으로써 '화염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자 한다.
수컷의 아가리에 쑤셔박기 위해 준비한 폭탄화살이 빗나가자,
벤젠은 손에 남은 유일한 무기인 도끼를 치켜들고 놈의 아가리로 돌진한다.
세상 다시 없을 처절한 포효를 내지르며.
이 영화는 엔터테이닝한 산술과 계산만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것이 아무리 유치하고 촌스럽더라도,
영화란 어른들조차 소년으로 되돌려 놓는 '꿈과 판타지'의 무대여야 함을 되새겨 준다.
우리가 한번쯤은 멸망으로부터 세상을 구하는 '용사'의 꿈을 꾸었던 것처럼.
3. <데이라잇> - 햇살을 향해
개봉년도 : 1996년
감독 : 롭 코헨
당대의 야심만만한 블록버스터였으나 어느새 잊혀진 수준급의 재난영화.
우연이 겹친 지독한 사고로 뉴저지와 맨하탄을 연결하는 해저터널 '데이라잇'이 붕괴한다.
과거 구조자들을 죽게 만든 트라우마를 가진 응급구조대 대장 키트(실베스타 스탤론)는
수많은 반대와 만류를 무릅쓰고 생존자들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데이라잇의 막장으로 들어선다.
지반이 침하되며 물이 차오르고, 산소가 결핍되는 위기 상황 속에서
생존자들조차 키트를 믿지 못하고 자중지란을 일으킨다.
<클리프 행어>에서 맨몸으로 록키(!) 산맥을 기어올랐던 스탤론이 이번엔 지하로 기어들어간 셈이지만,
<데이라잇>은 '밀폐된 터널에서 탈출하는 영화'라기보단
'죄책감의 어둠에 갇혀 있던 한 남자가 다시 햇살(Daylight) 속으로 나아가는' 이야기에 가깝다.
껍데기만 보아서는 터널을 무너뜨리는 무자비한 수압과
스탤론의 터프한 근육이 맞짱(!)을 뜨게 하려는 얄팍한 기획임에도 불구하고,
감독인 롭 코헨은 스탤론의 외적인 강인함보다 내면적 나약함에 초점을 맞추며 극을 뚝심있게 끌고 나간다.
무엇보다 <데이라잇>이 안겨주는 최고의 슬픔은 엔딩에서 찾아온다.
무저갱과 같던 지하 터널에서 탈출한 키트와 생존자 메들린은 뉴욕 앞바다에서 솟아오른다.
이 장면은 도입부 이후 등장하지 않았던, 사방이 탁 트인 낮 장면이다.
거기에 이르러 비로소 관객들 또한 해방의 한숨을 내쉬게 된다.
2시간 동안 관객들마저 옥죄는 '밀폐의 블록버스터'라고 칭할 만 하다.
물론 <베리드>와 같은 한층 지독한 '밀폐극'을 겪어본 오늘날의 관객들에겐 시시할 수 있지만,
<데이라잇>은 다시 나올 수 없는 부류의 영화이기에 더욱 그리워지는 영화다.
<데이라잇>을 찍을 당시 존재했던 것이, 이제는 없기 때문이다.
바로 탈출한 키트와 메들린 너머의 뉴욕에 자리한, 거대한 쌍둥이 빌딩.
9.11 테러 이후, 더 이상 '대참사 속의 영웅'은 없다.
<제로 다크 서티>의 마야나, <조디악>의 그레이스미스처럼
자신이 영웅이라 믿는 희생자들이 있을 뿐...
4. <좀비오> - 가장 인간적인 좀비영화
개봉년도 : 1985년
감독 : 스튜어트 고든
환상의 삼박자로 불려야 마땅한 H.P.러브크래프트 원작에 스튜어트 고든 감독, 브라이언 유즈나 제작.
이들은 1년 뒤 <지옥인간>을 제작함으로써 그들의 콤비 플레이는 실패하지 않음을 증명했다.
스튜어트 고든은 원작에 단 몇페이지로 존재하던 광기의 과학자 '허버트 웨스트'에 더할 나위 없이
고딕적인 옷을 입혔고, 호러 매니아들의 명배우 제프리 콤즈는 그 캐릭터에 숨결을 불어넣었다.
취리히 대학에서 끔찍한 만행을 일으키고 쫓겨나듯 미스케토닉 의과대학에 오게 된 허버트 웨스트는
자신의 광기 어린 연구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의 룸메이트 케인은 냉장고 속에서 죽은 고양이가 발견되고,
얼마 뒤 그것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본 뒤에야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어 감을 깨닫는다.
허나 괴이하게도 케인은 허버트 웨스트의 순수한 광기에 넘어가 그의 연구를 돕기 시작한다.
<좀비오>를 흔해 빠진 공포영화로 치부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그들이 '장난삼아' 금기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그것이 금기임을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러브크래프트적인 광기가 넘쳐 흐른다.
허버트 웨스트와 그를 질투하는 힐 박사만이 광기에 젖어 있는 것은 아니다.
해머 프로덕션의 고딕 양식과 살벌한 좀비영화, 절절한 멜로드라마를 조각조각 이어 붙인
감독 스튜어트 고든 또한 단단히 미쳐 있다.
그 미친 연구가 기어코 성공했다는 점에서, 스튜어트 고든은 허버트 웨스트와 다를 바 없다.
젊은 의대생 케인은 허버트 웨스트의 '순수한 집착'에 매료되어 그를 돕고,
홀시 학장은 '다시 움직이는 자(Re-animator)'로 전락하고서도 딸인 메건에 대한 부성애를 드러낸다.
허버트 웨스트는 자신의 손으로 만든 괴물을 끝장내기 위해 기꺼이 케인과 함께 사지로 들어서고,
속편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비극을 낳는 것은 메건에 대한 케인의 절절한 사랑이다.
이들의 사랑과 우정, 존경과 가족애는 광기로 가득한 이 세계에 따스한 피를 흘려보낸다.
그래서 <좀비오>는 그 끔찍한 고어에도 불구하고, 가장 '인간적인' 좀비영화라고 불릴 만하며
우리가 세월이 흐른 뒤에도 다시 찾게 되는 영화들은
결국 생동하는 캐릭터와 인간미를 담고 있음을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