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은 현실과 맞서는 방법이다
1950년, 이란 국민들은 모하메드 모사데크를 민주 총리로 선출했다.
모사데크는 영국과 미국의 정유 시설을 국유화했고,
이에 영미는 쿠데타를 계획해 모사데크를 축출하고 레자 팔레비를 황제, 즉 '샤'로 앉혔다.
팔레비 왕조는 사치를 일삼았고, 비밀경찰을 동원해 무자비한 탄압으로 정권을 유지했다.
친미파였던 팔레비 왕조는 이란을 점차 서구화시켰고, 이에 시아파 국민들은 분노는 극에 달했다.
결국 1979년, 이란 국민들은 팔레비 정권을 몰아냈고,
추방됐던 성직자 호메이니가 다시 권력을 잡았다.
이에 암으로 죽어가던 팔레비는 미국으로 망명했고,
성난 이란 시민들은 미국 대사관으로 몰려가 그를 내놓으라고 시위를 벌였다.
<아르고>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대사관 직원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한 CIA 공작관 토니 멘데스의 이야기를 다룬다.
앞서 서술된 이란의 상황은 <아르고>의 오프닝이다.
이 영화는 시작부터 자백하는 셈이다.
당시 미국 대사관 직원들을 위협한 이란의 상황은 사실상 미국이 자초한 거라는 자백.
이건 탈출 과정에 방점을 찍어야 하는 영화로서는 자충수가 될 수도 있다.
우리가 그들의 탈출을 순수한 장르적 관점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예로, 소말리아 내전 당시의 모가디슈 전투를 다룬 <블랙 호크 다운>은 그 참혹한 전투가
아프리카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고자 했던 미국의 이익 추구에서 비롯됐다고 말하지 않았다.
혹은 한국영화 <모가디슈>는 그 위기의 장으로 남북에게 아무런 책임소재가 없는 소말리아 내전을 택했으며,
정치적 토픽에 대해 언급하기보단 차라리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혹은 타란티노는 'X같은 역사'를 재현하느니 차라리 픽션의 힘을 빌려
역사를 다시 쓰는 쪽을 택했다(<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 <원스 어폰 더 타임 인 헐리우드>).
그러나 <아르고>는 실화를 가급적 과장없이 재현했으면서도(단, 문제라 할만한 각색들은 있다),
실화 자체가 가진 윤리적 복잡성을 외면하지 않았다.
영화 속의 재앙을 초래한 것은 미국이며, 위기에 처한 것은 미국인인 대사관 직원들이고,
그들을 구해야 하는 것은 별다른 지원도 받지 못한 CIA의 미국인 공작관이다.
말하자면 국가가 저지른 일로 죽음의 위기에 처한 개인들, 그들을 구해야 하는 개인의 이야기인 것이다.
<아르고>를 본 이들은 누구나
놀라운 스릴을 안겨주는 탈출 시퀀스를 극찬하곤 한다.
이 영화의 탈출 시퀀스는 그 조용한 전개에도 불구하고 정말이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그건 단순히 서사가 효과적으로 설계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장르적 쾌감을 위해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거나 침묵하지 않고,
되려 역사의식을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말했듯이 이 영화 속의 위기란 사실 미국이 자초한 것이며, 그것은 옳지 못한 일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영화를 보며 가지는 질문은
'저들이 살벌한 이란에서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까?'가 아니다.
'저들이 국가가 저지른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인 것이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는 동안,
아무런 죄가 없는 저들이 국가의 죄를 대속해서 죽게 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한다.
국가의 죄를 국민이 치르는 것은 옳지 않다. 그래선 안된다.
그래서 우리는 저들이 끝내 탈출에 성공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게 영화를 보는 순간조차도 유지되는 세상에 대한 우리의 윤리감각인 것이다.
그 간절한 바람이 있기에, <아르고>가 안겨주는 탈출의 스릴은 단순한 장르적 쾌감의 차원을 넘어선다.
많은 창작자들은 실화를 다루고자 할 때 그 역사적, 윤리적 무게 때문에 부담감을 느끼곤 한다.
더 극단적인 경우엔 역사성와 윤리의식을 족쇄처럼 여긴다.
그러나 역사에 대한 윤리관과 픽션적 상상력은 양자택일해야 하는 선택지가 아니다.
역사적 실화를 다룬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감동과 쾌감이란
그 실화에 대한 윤리적 태도와 픽션적 전략이 상호 조응할 때 생겨나기 때문이다.
많은 한국영화들이 실화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아르고>만큼 윤리의식과 픽션적 전략의 탁월한 경합을 보여준 사례는 드물다.
보통은 실화적 소재의 재현에 매몰되거나, 혹은 지나친 장르적 가공으로 실화를 착취할 뿐이다.
왜 한국영화는 실화를 그리도 좋아하면서, 정작 접근하는 태도는 서툰 것일까.
우리가 실화를 픽션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이유는
세상 모든 것이 기록되는 역사서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역사란 안개 속의 기록이다.
하지만 나는 우리의 역사가 그 어떤 픽션보다도 선연하다고 믿는다.
조각난 뼈를 펜대로 삼고, 피를 잉크로 찍어 쓴 역사가 어떻게 흐릿할 수 있겠는가.
숱한 비명과 눈물로 낭독되는 역사가 어떻게 나직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핏빛 역사서로 가득한 도서관의 복도를,
여전히 과거의 망령들이 당당히 활보하고 있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영화 <서울의 봄>은 그 대상들이 죽고 나서야 우리를 찾아올 수 있었고,
광주의 피해자들이 전두환 암살을 감행한다는 내용의 <26년>은 제작 과정에서 숱한 외압에 시달렸으며,
혹은 그보다 전의 <그때 그 사람들>은 아직도 살아있는 권력에 의해 일부분을 잘렸다.
<아르고>가 보여준 역사와 픽션의 출중한 경합,
혹은 <바스터즈>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헐리우드>가 보여준 역사의 과감한 재창조는
이 역사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날인이 찍혀야만 가능하다.
지금의 이란을 반미국가로 만든 건 미국이라는 사실.
히틀러와 찰스 맨슨이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질렀다는 그 선명한 사실들.
결국 우리가 그런 작품들을 가지지 못한 이유는
그 선명한 역사조차 부정하는 과거의 망령들이 횡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날인되지 못한 역사.
곳곳을 떠도는 날조된 역사서들.
그래서 우리는 전두환이 저지른 짓에 대한 영화에서조차
전두환이라는 이름을 들을 수 없었다.
작가라는 직업은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을 등진 채 세상에 대해 쓰는 사람이다.
그래서 자주 덧없음을, 혹은 무용함을 느끼곤 한다.
지난 경악할 사태 앞에서 이야기를 끄적이고 앉아 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런 심란함 속에서 세상을 서성이다가도,
끝내 이야기를, 더 나은 이야기를 적어내기 위해 자리에 앉게 된다.
이야기를 이해하는 감각이란, 역사를 이해하는 감각과 다르지 않다고 믿기 때문이다.
좋은 이야기가 창작되고 향유되는 사회란, 그 역사관도 결코 타락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역사도 결국 하나의 장대한 이야기니까.
삼엄한 이란에서 대사관 직원들을 빼낼 작전을 궁리하던 토니 멘데스는
헐리우드를 떠돌던 싸구려 SF영화 '아르고'에서 탈출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때론 픽션이 참혹한 현실과 맞설 무기가 된다는 은유.
결국 더 나은 이야기를 쓰는 것만이, 해야 할 말을 하는 이야기를 쓰는 것만이,
내가 그 망령들과 맞설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