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경계의 이야기
한 여자가 있습니다.
그녀에게 삶은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세상엔 온갖 기이하고 잡다한 생물이 가득하고,
1분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조차 알 수 없으며,
지금의 내 선택이 예상치 못한 비극으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질서가 아니라 혼돈이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소녀 시절에 아름다운 '곱슬머리 남자'와 사랑에 빠졌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에메랄드 눈을 가진 소녀'에게 충동적으로 입을 맞추게 됐습니다.
그 모습을 들켰을 때, 곱슬머리 남자와의 사랑은 끝났습니다.
이제 그녀에게 두려운 것은 세상만이 아닙니다.
그녀 자신조차 그녀에게 두려운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동성인 소녀에게 입을 맞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대체 무엇인가,
나는 대체 무엇인가.
나는... 비정상인가.
그녀는 이토록 이상한 세상에서,
이토록 이상한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답을 얻고 싶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옛날에 세상을 떠난 한 위인에 주목하고,
그를 연구하여 삶의 나침반을 얻어내고자 합니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
스탠포드 대학 창립 총장이자, 물고기의 분류학에서 선구적인 업적을 남긴 위인입니다.
조던은 집요하게 물고기를 낚아 올렸고,
그 수많은 물고기에 각각의 분류와 명칭을 부여했습니다.
갑작스레 닥친 지진이 그동안 모아왔던 표본들을 박살내고,
아내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는 비극도 있었습니다.
그는 다시 표본들을 모았고,
새로이 맞은 아내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는 강철같은 의지로 온갖 삶의 난관을 극복해가면서
목적을 향해 달려나간 인물이었습니다.
그 목적이란, 혼돈으로 가득한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었습니다.
조던의 그런 의지와 혼돈과의 사투는
여자로 하여금 본받아 마땅하다 싶은 감동을 안겨주었습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여자, 룰루 밀러가
그 남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에 대해 쓴 책입니다.
하지만 이 책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 대한 평전이 아닙니다.
오히려 룰루 밀러의 삶에 대한 수기이자,
그녀가 삶을 긍정하는 과정에 대한 드라마입니다.
밀러는 모두가 존경하는 위인인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을 연구하면서,
그 빛나는 업적에 감춰진 깊고 어두운 심연을 발견합니다.
밀러가 조던의 삶에 매료되는 과정은 아름다운 동화이지만,
그 심연이 드러나는 과정은 미스테리 저널리즘처럼 펼쳐지고,
삶을 긍정하기 위한 밀러의 그 집요한 추적은 하나의 캐릭터 드라마를 이룹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처럼 다채로운 장르를
변화무쌍한 필치 안에서 하나로 꼬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그 자유분방한 서사 구조는
마침내 삶을 긍정하게 된 밀러의 희망이 반영된 결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 대한 호기심으로 시작된 이 책은,
그의 업적에 대한 존경을 지나,
그의 이면이 안겨주는 두려움과 분노를 경유하고,
결국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마무리됩니다.
조던의 삶을 말하며 자신의 삶을 이해시켜 가는 밀러의 자유화법은 너무나 탁월하고,
물흐르듯 자연스러운 그 이행은
'경계를 긋지 말라'는 밀러의 깨달음을 그대로 반영한 극적 구조이기도 합니다.
주제가 곧 구조를 결정한다는 격언의 이상적이고도 모범적인 사례라 할 수 있겠습니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심연에 빠지면서까지 평생을 연구해온 '물고기(어류)'란
실은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었습니다.
'물고기'라는 틀은 분류학의 광기에 빠진 조던이 '믿어왔던' 개념일 뿐,
현대 생물학은 '물고기'를 근본적으로 구분짓는 조건은 없다고 결론짓고 있었습니다.
조던의 단단한 의지는 달리 말해 맹목성이었고,
혼돈과의 처절한 사투는 삶의 다양성을 거부하는 폭력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밀러는 제목을 통해 선언합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서 생략된 뒷말은 아마도 이런 내용일 겁니다.
'사랑받아 마땅한 무수한 생명들이 존재할 뿐.'
그것을 인정한 순간,
그녀는 여자가 여자를 사랑할 수도 있음을,
옳은 선택에 목을 매는 것은 인생을 낭비하는 것임을,
경계를 긋지 말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모든 생물은 사랑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덩달아 인정할 수 있었습니다.
경계를 부정함으로써 존재를 긍정하게 된 것입니다.
삶의 빛이 되어주리라 믿었던 조던의 업적은
실은 걷어내야 마땅한 짙은 어둠이었고,
그녀를 두렵게 했던 삶의 지난한 혼돈은
도리어 청량한 자유의 증거였던 셈입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선언을 통해,
그녀는 자신이 두려워하던 것들을 끌어안고, 마침내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을 덮은 저는, 잠시 연보라색 표지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메모장을 꺼내서 휘갈겨 적었습니다.
'이야기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잠시 펜을 멈췄다가,
이어서 신중하게 적었습니다.
'오직 인간에 대한, 무수한 긍정이 존재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