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환이 Dec 07. 2024

작가와 공감능력

무엇에 공감해야 하는가

몇년 전, 제 후배 중의 하나가 드라마를 쓰게 되었습니다.

그 후배는 대본이 나오면 제작사에 넘기기 전에 보여줄테니 리뷰를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한 번 고친 뒤에 넘겨서 더 좋은 평가를 받고 싶다고 말이지요.

제가 배워야 할 정도로 성실한 모습이었고,

저도 후배의 글이 궁금했으니 리뷰를 해주기로 했습니다.


대본이 나온 뒤 1,2화를 읽었을 때, 저는 매력적인 글이라고 생각했지만 한가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극 중 중요한 포지션을 차지하는 어떤 캐릭터에 대한 묘사였습니다.

저는 그 캐릭터의 극 중 행동들이 잘 이해가 안 됐습니다.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거지? 뭘 의도하는 거지? 이 캐릭터의 쓰임새는 뭐지?

기획안을 먼저 읽은 입장이었는데도 이해가 안 가서,

저는 “혹시 대본을 쓰면서 캐릭터 설정을 바꿨냐”고 물었습니다.

후배는 그대로라고 답했습니다.

그래서 “이 캐릭터가 어떻게 보이기를 바라고 쓴 거냐”고 물었더니

멋있고 애틋해 보이길 바라고 썼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멋있지도 않고 애틋하지도 않다.

‘찌질’해 보일 뿐더러 이해도 잘 안 된다(라는 내용을 극히 정성스럽게 순화시켜서), 라고 말했습니다.

몇번 갑론을박이 오간 끝에 후배는 기분이 상한 듯 했고,

제가 공감능력이 너무 떨어지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저는 내심 ‘암만 봐도 내가 맞는 것 같은데…’라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제 생각일 뿐이지요.

너는 틀렸고, 내가 맞다를 객관적으로 논증하는 건 불가능하니까요.

그래서 저는 나머지 부분은 별 문제가 없으니, 확신이 있다면 이대로 제작사에 보여주라고 했습니다.

며칠 후, 후배는 우는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와선

제작사에서 제가 한 얘기랑 똑같은 얘기를 했다고 했습니다.

그제야 고집을 조금 내려놓은 후배와 저는 다시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후배는 극중에서 문제의 그 캐릭터에게 가장 애착이 깊었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이해하기가 좀 어려웠습니다.

대체 어떻게 쓰길래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캐릭터를 가장 해괴하게 그려놓지? 싶었습니다.

후배는 그 캐릭터만 생각하면 너무 가엾어서 눈물이 난다고까지 했습니다.

저는 결국

“니가 그 캐릭터를 어떻게 생각하든 제대로 그리지 못하면 아무 소용 없단다.

그 캐릭터가 어떤 캐릭터냐를 따지기 전에 그 캐릭터가 어떻게 보일지부터 생각하렴”

하고 몇가지 방법을 일러 주었습니다.


그 후배 이후로, 저는 캐릭터에 과몰입하는 작가들이 꽤 많다는 것을 알았고, 

캐릭터에 대한 지나친 몰입이 도리어 캐릭터를 해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저는 성향상 제 캐릭터에 빠져드는 타입이 아니어서 타인을 통해서야 배웠던 셈입니다.

저 또한 아주 오래 고민하고 쓴 이야기보다,

짧게 생각하고 쓴 이야기가 훨씬 좋은 평가를 얻은 적이 많았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고, 딱 두 번만 생각하자’라는 원칙으로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제 경험으로는

10분 동안 고민해서 A라는 대사를 썼는데, (이 캐릭터는 이런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할 거야)

좀 더 고민해보니 B라는 대사가 나왔고, (아, 좀 더 생각해보니 이 반응이 더 어울리겠다)

더더 고민해보니 C라는 대사가 나왔다면, (아니다, 더 깊게 생각하면 이 반응이 딱이네)

필시 C의 대사는 읽는 입장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대사입니다.

그 안에 너무 많은 고민의 궤적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엔 작가 혼자서만 이해하고 있는 캐릭터의 내면이 있습니다.

그러니 읽는 입장에서는 ‘엥?’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B에서 더 이상 나아가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이건 대사든 행동이든 장면 구성이든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캐릭터든, 이야기든 심사숙고가 지나치면 문제가 생깁니다.

미디어 학자 마샬 맥루한은 “메시지란 받는 사람에 의해 수정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내가 아무리 어떤 캐릭터, 어떤 주제, 어떤 서사에 대해 탁월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 한들,

그것을 대본에 구현하지 못하면 ‘보는 사람에 의해 수정될 뿐’입니다.

달리 말해서 과몰입과 과잉공감을 피해야만 좋은 이야기를 쓸 수 있겠지요.

물론 캐릭터에 과몰입을 했다고 해도, 그만큼의 캐릭터 묘사력이 있다면 상관없는 문제일 것입니다.

허나 그만한 묘사력이 있다고 해도 캐릭터 과몰입은 서사의 균형을 해칠 수 있을 겁니다.

일부 드라마들이 '특정 캐릭터 편애'로 비판을 받은 것처럼 말이지요.


언젠가부터 '공감'이 중요한 사회적 이슈가 되면서,

저는 '진정한 공감이란 뭘까?' 를 오랫동안 생각해왔습니다.

몰입 또한 공감의 다음 단계이므로 궤를 같이 하는 문제겠지요.

그러면서 공감을 중요시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생각 외로 타인에게 공격적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공감을 중요시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공격적일 수 있지? 가 저에겐 오랜 의문이었습니다.


제가 읽었다는 글은 잘못된 공감이 어떤 문제를 야기하는지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라크전 당시 포로를 상대로 고문과 가혹행위를 저질러 문제가 된 미군들을 상대로

심리조사를 실시했더니, 그들은 사이코패스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오히려 자기 집단-미군에 대해 과잉공감한 평범한 사람들일 뿐이었다고 합니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주인공인 진태는 양민을 학살하는 인민군에게 분노하면서

잔인무도한 반공주의자가 되어갑니다. 비슷한 예일 것입니다)

결국 지나친 공감이 타인에 대한 철저한 배척으로 이어진 사례일 것입니다.

'공감영역 바깥에 있는 타인들을 배척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면 그건 '잘못된 공감'일 것입니다.

오늘날은 온라인에서의 타인에 대해 너무나 공격적입니다.

그 분쟁만큼이나 타인에 대한 혐오가 생겨나기도 쉽습니다.

‘공감’이란 그런 세상을 치유하는 도구로 자주 소환되고 있지만,

어쩌면 과잉 공감은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 원인이라고 봐야 하겠지요.

그 공감이 자기 집단에만 머물고 있다면 그건 해결책으로서의 공감이 아니라 그저

‘팔이 안으로 굽는’ 현상에 불과할 것입니다.

‘혐오’의 다른 말이 결국 ‘선택적 공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창작자에게 공감이란

창작 이전에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의 태도로서

조금은 더 조심스럽게 발현되어야 하는 조건일 것입니다.

제가 읽은 글은 “중요한 것은 공감의 깊이가 아니라 반경이다” 라는 말로 끝맺고 있었습니다.

그 말을 통해서 저는 충분한 반경으로 세인들에게 공감하고 있었는지, 를 다시 고민해보게 됐습니다.

당연한 연민의 대상만이 아니라,

가장 싫고 짜증나는 사람에게도 공감을 나눠주려 애쓸 때

세상은 좀 더 나아지는 것이 아닐까, 하고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