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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이 Dec 07. 2024

<밀회>, 2014

진실한 사랑이 구원한다

나는 클래식에는 문외한이다. 

그러나 클래식은 순수예술로써 대우받으며, 

그렇기에 고상을 원하는 권력자들의 트로피가 되기도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인간에게 가지지 못한 것을 채우려는 갈망은 필연이다. 

그러나 그 갈망이 텅 빈 진열대에 트로피를 채우려는 과시욕에 불과하다면 꼴사나워지기도 한다. 

역으로 그 갈망이 가장 아름다워지는 순간이 있다. 

마치 마작처럼, 그 하나를 위해 자신이 쌓아온 모든 것을 걸어볼 때다. 


정성주 작가가 쓰고 안판석 감독이 그려낸 <밀회>는 

그라는 청춘과 그녀라는 불혹에게 찾아온 경천동지할 사랑의 이야기다. 

그 사랑은 청년의 창창한 하늘을 찢어놓고, 

불혹이 발딛은 굳센 대지를 뒤흔든다. 

심장을 두들겨 대는 건반의 선율은 그 불륜의 사랑을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이처럼 은밀하게, 혹은 불온하게, 다만 순수하게, 

불타올랐던 적이 있었는가. 

그야말로 치명적인 은총. 


블랙코미디의 대가인 정성주 작가는 우리가 알던 통념을 슬쩍 뒤집어 놓는다. 

재벌집 공주 서영우는 자신을 휘감은 재물과 명예에도 불구하고 소녀적인 사랑을 갈구할 뿐이고, 

회장과 동침한 조선족 여인은 돈봉투를 거부하곤 오혜원을 지배하는 물질주의에 코웃음을 친다. 

철저하게 자연체로 일관하는 안판석 감독의 매끄러운 연출은

미묘한 뉘앙스를 통해 <밀회>의 저변을 흐르는 불온함을 빚어낸다. 

카메라는 곳곳에 숨어 인물들을 훔쳐보고, 인물들은 아주 작은 행동으로 마음의 파장을 드러낸다. 

혜원이 처음으로 선재의 집을 방문했다가 돌아갈 때, 

그녀는 자신의 차 안에서 안전벨트를 찾느라 손을 더듬거린다. 

이는 명감독과 명배우의 만남이 만들어내는 내러티브 디테일이다. 

늘상 잡아당겼던 안전벨트를 찾지 못한다는 것. 

그녀를 지탱하던 일상의 감각이 흔들린 것이다. 


김희애가 열연한 오혜원은 자신의 삶과 감정을 정교하게 통제하는 듯 보이지만, 

선재가 뛰어든 순간부터 그 견고한 삶이 허울에 불과했음을 인정한다. 

이 화려한 인생이 공주의 시녀를 자처해 얻어낸 것이며, 

자신은 망석중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오혜원은 마지막 화의 최종변론에서 말한다. 

나조차 나를 출세와 호강의 수단으로 소모하고 있을 때, 

오직 한 사람만이 나에게 깨끗한 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도 걸레질을 했노라고. 

그는 그저 걸레질을 열심히 했을 뿐이라고. 

결국 선재의 작은 방은 혜원의 마음에 대한 은유이다.  

그래서 선재는 그 공간에 쌓인 먼지들을 열심히도 닦아낸 것이며, 

그녀를 안아들어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왔던 것이다. 

높은 곳에서 내려와, 맨발로 돌아가는 것. 

그건 결국 '여신' 혹은 '여자'도 아닌 '인간 오혜원'을 끌어안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혜원의 최후변론은 재판을 위해 준비한 것이 아니다. 

지치고 닳아버린 스스로의 영혼에게 건네는 진실된 고백이다. 

마작판에서 늘상 돈을 따왔던 혜원이지만, 

마지막 순간에서야 잃어주는 법을 배우는 셈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 단 하나의 순수를 지켜내는 결단.  

잃어야만 얻을 수 있는 삶의 아이러니. 


결국 <밀회>는 '밀회'에 대한 욕망이 '재회'에 대한 갈망으로 변모하는 과정이고, 

그를 통해 한가지 사실을 증명한다. 

진실된 사랑이 있다면 인간은 타락하지 않는다는 것. 

의심의 여지 없이 불온하면서도, 

의심의 여지 없는 걸작인 <밀회>는 아르튀르 랭보의 싯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더 이상 내일은 없으니

사틴결의 잉걸불이여. 

당신의 열기는 의무이다. 


결국 <밀회>가 그리고자 한 것은 그 사라져 버린 내일. 

다만 랭보와 다른 것은 이 드라마가 기어코 발견한 내일의 모습이다. 

화려한 궁전이 아닌, 선재의 빈 집. 

휘황하진 못해도 인간의 온기가 있는, 

누군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그 진실한 삶의 풍경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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