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력이란 무엇일까
저는 어릴 때부터 창작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외롭고 따분하던 제 삶의 유일한 위안은 여러 창작물들 뿐이었고,
저는 영화나 만화, 소설,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내는 삶이 너무나 멋지다고 믿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인간실격>을 읽고 충격을 받았던 이유는
다자이 오사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저와 너무나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고백하자면 나도 도피를 하고자 했습니다.
왜냐하면 어린 내가 보기에 세상은 너무나 이상했기 때문입니다.
이 나라를 다스린다는 위치에 있는 늙은 아저씨들은 항상 누군가에게 욕을 먹었고,
참된 교육을 실천한다는 표어를 건 학교에서는 온갖 불편 부당한 일들이 무시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어른들은 이토록 이상한 세상에 대해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았습니다.
아마 나 또한 나의 자식들에게 결코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창작물에의 탐닉은 기괴한 세상의 구조에 대해 답을 얻고자 하는 머나먼 여행이었습니다.
나는 <터미네이터2>를 보고서 아이에게는 아버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으며,
<에일리언>을 보고서 인간이 미지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배웠고,
웅진의 <20세기의 큰 인물> 시리즈를 보고서 위대한 삶은 대부분 불행으로 끝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창작물이 세상의 반영이라면,
나는 세상이라는 실물을 겪고 그 반영의 결과인 창작물을 본 것이 아니라,
이미 반영된 이미지를 체험하고 그 원인을 거꾸로 경험했습니다.
아, 이런 감정은 어떤 영화에서 느껴보았던 거야.
아, 이런 상황은 어떤 소설에서 보았던 거야, 라고 말입니다.
결국 나에겐 세상보다 더 큰 존재가 여러 창작물이었고,
세상이란 그 창작물을 길러낸,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기괴한 뿌리였습니다.
박찬욱 감독은 자신의 평론집 <박찬욱의 오마주>에서 말했습니다.
그러나 영화광들이여, 잊지 말라.
당신의 영화가 인생의 모든 것을 가르쳐주지는 못한다.
창 너머로 보기보다는 직접 몸을 담글 때
바다는 더 잘 이해되는 법.
이 말을 보았을 때 공교롭게도 저는 고3이었습니다.
그제야 저는 영화를 통해 세상을 배우려는 태도를 버리고
세상이라는 사바세계와 뒤엉키며 살아갈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결심에 맞추어 세상 또한 한 젊은 영혼을 시험해볼 작정이었나 봅니다.
제가 진학한 대학은 기괴한 악습으로 무장한 곳이었습니다.
저는 나중에 군대에서도 겪어보지 않았던 다양한 기합과 가혹행위를 대학에서 겪었습니다.
이곳은 분명 예술대학이었지만, 실은 군사대학, 아니 '부조리 학교'에 가까웠습니다.
덧붙이자면 저는 본론과는 벗어나 있는 이 내용을 고발의 심정으로 적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당시 학생들에게 부당을 강요했던 권력들은 이미 달아나 버렸기 때문입니다.
붕괴된 것이 아니라 달아났다고 표현한 이유는
그 부당의 권력들이 말단 부역자들만을 징벌의 먹잇감으로 던져주고 숨어버린 까닭입니다.
즉 이것은 고발이 아니라 그 체제에 순응했던 자의 비겁한 자백에 불과합니다.
체제는 영리하게도 원칙과 규율을 내세워 학생들을 억압하다가도,
누군가가 그 부당함에 이의를 제기하면 재빠르게 탈을 바꾸어 인간의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한번은 우리 학년이 특정한 수업에 줄지어 결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기말작품 제작 시즌과 맞물려 낮밤이 바뀐 학생들이,
영화만 틀어놓고 두 시간을 때우는 교수의 수업에 굳이 들어갈 필요를 못 느낀 것입니다.
그 일이 누군가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서 전 학년에는 집합이 걸렸습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모든 학생들이 모여야 했고,
이미 모인 학생들은 모두가 모일 때까지 가혹한 기합을 받았습니다.
기합을 받던 학생들은 끝까지 오지 않았던 학생들을 원망했습니다.
분노의 대상을 엉뚱하게 돌려버리는 것은 부당한 체제라면 어디를 막론하고 즐겨 쓰는 수법이었습니다.
체제를 원망하면 자신의 무력감과 모순성이 부각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또다른 피해자에게 '무책임'의 오라를 씌워 원망하는 것이 합리적인 도피책이었습니다.
부당한 체제란 무서울 만큼 인간성의 나약함을 잘 이용하는 법입니다.
그때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기합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항할 수 없는 용기의 부재였습니다.
강의실 벽면의 전면 거울이 땀에서 나온 성에로 뿌옇게 될 지경이 되어서야
기합은 마침내 끝이 났습니다.
땀에 푹 젖은 티셔츠에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어오자, 몸도 마음도 오싹해졌습니다.
기합이 끝나고 기차역으로 가는 동안, 동행이었던 학생들은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아마 모두들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부당한 체제를 유지시키고 있는 침묵.
그러나 침묵 밖에는 할 것이 없는 무력한 양심.
처참한 것은 이것이 저를 비롯한 극소수만이 겪은 특수한 비극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엔 다양한 강도와 형태로 이루어진 부당의 요새들이 구석구석 자리잡고 있었고,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그 부당의 권력을 순진하게 수혜 중인 사람들 밖에 없었습니다.
군대에 갈 즈음이 되었을 때, 저는 학교 도서관에서 한 단편소설을 읽었습니다.
그 소설에서 귀향 열차에 탄 제대 군인들은 같은 열차에 탄 현역 특전사들로부터
돈을 각출하라는 요구를 받게 됩니다.
특전사들은 '후배들 용돈이나 주시라'며 포장하고 있지만 결국 갈취에 불과합니다.
어떤 제대 군인은 부당하다며 거부하지만, 매서운 군홧발 타작이 날아듭니다.
수백 명에 달하는 제대 군인들이 스무명도 안 되는 특전사들에게 속수무책으로 상납을 이어갈 무렵,
어떤 익명의 목소리가 외칩니다.
"이 답답한 친구들아, 3년간 당한 것도 억울한데 집에 가는 날까지 당하고 있을 거여!"
그 소리를 신호탄으로 제대 군인들이 분기탱천 일어서고,
특전사들은 독기를 품고 저항하지만 상황은 역전됩니다.
무수히 쏟아지는 군홧발 타작으로 특전사들은 죽을 지경까지 얻어맞습니다.
아니, 누군가는 죽을 것 같기도 합니다.
폭력적인 부당의 무리는 저항으로 무너지고,
저항은 곧장 도를 지나친 폭력으로 이어집니다.
거기에 정의는 없습니다.
그저 열띤 광기가 흘러넘칠 뿐입니다.
순순히 돈을 내주었고, 응징의 폭력에도 가담하지 않은 채
상황을 관망하던 주인공은 '필론의 돼지'를 떠올립니다.
철학자였던 필론은 배를 타고 항해하다가 폭풍우를 만났습니다.
심한 폭풍우 속에서 금방이라도 배가 부서질 듯한 와중에,
누군가는 탈출을 꾀하고, 누군가는 물을 퍼냈고, 누군가는 기도했습니다.
마침 그 배에는 새끼 돼지가 한 마리 있었는데,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을 아랑곳 않고
유유히 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필론은 이를 가리키며
"현자는 언제나 이 새끼 돼지처럼 흐트러짐 없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현자라는 필론 또한 돼지와 다를 바 없었고,
그 상황을 그저 지켜만 보는 주인공도 돼지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부당을 강요하는 부조리하고 폭력적인 체제.
저항과 응징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무분별한 폭력의 광기.
그것을 속수무책으로 방관하는, 돼지와 다를 바 없는 현자.
그 단편소설의 제목이 <필론의 돼지>였습니다.
이 소설을 읽고 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느꼈습니다.
여전히 세상은 80년대와 크게 다를 것 없이 부당하고 기괴할 뿐 아니라,
나 자신도 결국 작가가 말하는 돼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문열이 쓴 이 소설은 80년에 발표되었습니다.
이후 94년에 이문열은 시인 고은의 행적을 고발하다시피 쓴 단편소설 <사로잡힌 악령>을 쓰게 됩니다.
<사로잡힌 악령>을 통해 이문열은 문단 내부와 외부로부터 엄청난 공격을 당해야했고,
끝내 스스로 작품을 봉인하기에 이릅니다.
국민 시인으로 추앙받은 고은을 감히 헐뜯었을 뿐 아니라,
고은의 행적을 알면서도 침묵한 자들까지 비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문열도 이 소설을 통해 자신이 문단 내에서 고립될 수도 있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기어코 <사로잡힌 악령>을 발표하고 말았습니다.
고은의 온갖 추문들이 터지고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된 저는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기어코 돼지의 삶을 거부하기로 했군요.
작가는 모두가 홀린듯이 외치는 말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하고,
모두가 두려워 피하려는 말을 외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저는 이문열 작가를 보고 배웠습니다.
이문열 작가의 행적 중에, 저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들도 있습니다만
<필론의 돼지>와 그의 대표작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한국사회 병폐의 핵심을 꿰뚫는 걸작이라는 것만큼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더럽고 간교한 영웅 엄석대.
그에게 무너지고 굴복하는 타락한 영웅 한병태.
엄석대를 무너뜨리는 냉엄한 영웅 김 선생.
응징을 명분으로 엄석대를 줄지어 고발하는 비겁한 영웅, 급우들...
등장인물 모두가 일그러진 영웅이었습니다.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지만, 그 앞의 수식어야말로 영웅이라는 허망한 가면보다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처음 보았을 때만큼의 충격을 안겨준 단편소설을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그 짧은 소설적 형식 안에, 이 대한민국이라는 요지경의 소우주가 씁쓸하게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필력이 가장 탁월한 소설가가 누구냐?"라는 질문을 받으면
이문열 작가 이외의 다른 사람을 떠올릴 수 없습니다.
저에게 필력이란 문장력이나 상상력 혹은 어휘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필력은 활자의 오케스트라로 보는 이를 빨아들이는 힘도 아니며,
매 문장에 밑줄을 긋게 만드는 깊디 깊은 철학적 사유도 아닙니다.
가장 단순한 필력이란 자신의 글에 대한 믿음의 힘일 것입니다.
지금의 세상에 반드시 이 글을 보여야만 한다는 믿음.
그 믿음이 있기에 글은 굳건해지고, 간절해지며, 때론 심장을 울리는 것입니다.
저는 그 믿음이 이문열 작가만큼 절실해보이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매 페이지마다
이문열 작가의 처절한 외침이 들리는 듯 합니다.
"제발 이 문제에 대해 함께 생각합시다!!"라는.
그 간절한 필요가 낳은 간절의 필력.
오늘날의 드라마와 영화들 속에는 각양각색의 영웅들이 넘쳐나고 있지만,
그 감춰진 수식어에는 대부분 관대합니다.
이신화 작가의 <스토브리그>를 보았을 때 감동 받았던 것은
사회에 제각각의 얼굴로 만연하는 부당과 부조리를 그려낸 용기 탓도 있었지만,
주인공인 백승수가 철저하게 '폭력 앞에선 무능한 존재'로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숱한 대한민국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들과 달리, 백승수는 싸움을 못 합니다.
그는 드라마 내내 누군가에게 손찌검 한번 하지 않고,
극도로 분노했을 때마저 테이블 위의 텀블러를 쳐서 넘어뜨리는 정도로만 경고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한치의 흔들림 없이 부패, 무능, 부조리와 싸워 나갑니다.
그 행보에서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반드시 폭력이 필요한 건 아니에요'라는 이신화 작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여기엔 단순히 쾌감을 위해 피상적 트랜드와 타협하지 않은 신인작가의 신념과 용기가 있습니다.
필시 그러한 신념과 용기가 <스토브리그>를 써낸 필력을 낳았을 것이며,
그 덕분에 백승수는 빈센조나 김도기와 달리 '일그러진 영웅'이 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초등학생이었던 시절이나, 혹은 대학 신입생이었던 시절이나 세상은 여전히 이상합니다.
다만 나는 이 기묘한 세상을 '돼지'나 '일그러진 영웅'이 되어서 살지 않아야겠다고 늘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있었기에 나는 군대의 부조리와 맞설 최소한의 용기나마 얻을 수 있었고,
부당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반드시 정당은 아닐 수도 있음을 늦게나마 깨달았습니다.
글을 써서 밥벌이를 하는 사람으로써, 저는 가끔 상념에 빠집니다.
나는 나를 넘어서, 이 세상에 필요한 글을 쓰고 있는가 라는 생각을.
그리고 그 글은 이 세상을 조금이나마 낫게 만들 수 있는가 라는 허망한 생각을.
결국 필력을 쌓는 일이란
온갖 미혹에 묻혀버린 이 필요의 외침을 듣는 일일지도 모를 일이며,
진정한 필력이란, 신념을 관철하는 작가의 용기인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