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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이 Dec 07. 2024

추천하기 싫은 소설

새로운 시대의 또 다른 사가 Saga


전율. 탄식. 희열. 찬탄. 감열...

이 소설에 대한 내 감상을 어떤 단어로 형언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했다.

'다른 작가에게 추천하기 싫다.'

이미 많은 작가들이 알 테지만, 이 소설을 본 작가들이 더 늘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건 내 작가로서의 이기심이다.

가능하다면 나 혼자만 두고두고 곱씹으며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모든 이들에게 읽으라 추천하고 싶었다.

독자라면 어쩔 수 없는, 걸작에 대한 전도에의 욕망.

추천하지 말라는 목소리와 추천하라는 목소리의 싸움. 

오랜 싸움 끝에, 내 안의 독자가 이겼다. 


작년에 친구에게서 날아든 카톡.

"혹시 <...>라는 소설 알아?"

한달에 한번씩은 대형 서점에 가는데다,

인터넷 서점과 중고 서점엔 수시로 방문하는 편인데도

처음 들어보는 제목과 작가였다.

친구는 그 소설이 실사 드라마화 된다는 소식을 들었다면서,

혹시 읽어봤으면 감상이 어떤지 물을 참이었다고 했다.

제목으론 도무지 장르나 내용을 종잡을 수 없는 소설이었기에,

검색을 통해 소설의 줄거리를 대강 찾아본 나는

그야말로 섬광같은 촉을 느꼈다.


'이건 반드시 읽어야 한다.'


당시엔 E-북으로 출간되지 않은 책이라

서둘러 인터넷 서점에 주문을 하고서 배송을 기다렸다.

평소엔 이틀이면 도착하는 책이 

출고에 문제가 생겨 닷새가 지나서야 도착했고,

나는 걸신 들린 것처럼 포장을 뜯고 표지를 펼쳐보았다.

당시 마감 중이었기에,

대충 오프닝이 어떤지, 문체가 어떤지만 확인하고

일단 덮어둘 요량이었다.

그러나 그건 방심이었다.

나는 이 소설이, 이 캐릭터들이, 이 이야기가

작업 중인 내 이야기조차 밀어내고 머릿속을 점령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결국 나는 앉은 자리에서 한권을 전부 읽어버리고 말았다.


영화든 드라마든 소설이든,

어떤 작품들은 너무나 비범하고 탁월한 나머지

그 이후에 마주하는 대부분의 작품들을 범상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곤 한다.

예컨대 <브레이킹 배드>를 보고 나면 대부분의 미드는 따분하게 느껴지고,

<더록>의 흥분을 기억하는 사람에게 대부분의 액션 블록버스터는 방만할 뿐이다.

혹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읽은 뒤부터 나는 추리소설에 만족할 수 없게 됐으며,

<하얀 거탑> 이후엔 메디컬 드라마를 보면서 감동받을 수가 없었다.

근래 접한 작품 중에선 이 소설이 그랬다.

나는 이후에 이와 동일한 장르의 어떤 소설을 읽든

이 소설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임을 직감했다.


이 소설은 어떤 유명인의 서평대로

”백악관의 일상사가 사소하게 느껴질 정도의" 엄청난 스케일을 보여준다.

동시에 그건 작업의 시작에서부터 위험성이 내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사의 규모가 커질수록 캐릭터는 깊이를 상실하기 쉽고,

설득력과 개연성이 표류하기도 쉬운 탓이다.

또한 이야기가 하늘로 치솟아 갈수록, 땅에 발 딛고 있는 독자는

이야기가 던지는 화두에 관심을 잃기도 쉬운 법이다.

그래서 흔히 초보 작가들에겐 규모가 큰 이야기를 쓰지 말라고들 한다.

규모가 커지면 이목을 끌기도 쉽지만, 창작의 어려움은 급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가는 방대한 물리학, 천문학, 생물학, 수학 등의 이과적 지식과

깊은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이 거대한 이야기를 굳건하게 지탱하고 있었다. 

한가지 더 놀라운 것은, 이야기와 지식을 기워붙인 흔적이 없다는 것이다. 

범상한 작가들은 자신이 쓰고자 하는 이야기를 위해 무언가를 공부하고, 

그 결과 이야기와 지식이 맞닿은 지점에 어설픈 간극을 드러내게 된다. 

진지한 작가들은 그것을 알기에 이미 알고 있는 경험과 감정을 깊게 파내려간 작품을 쓴다. 

하지만 이 소설은 개인적인 이야기도 아니고, 

또 엄청나게 많은 실체적 지식이 동원되었음에도 그 간극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이 작가는 이야기를 쓰기 위해 그 지식들을 공부한 것이 아니라, 

그 지식들을 알고 있었기에 이 이야기를 창조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탐구력을 가진 작가들은 많고, 또 상상력을 가진 작가들도 많지만

그 두가지를 흠결없이 섞어내는 이 창조력은 쉬이 찾아볼 수 있는 재능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이야기가 안겨주는 쾌감과 공포, 흥분은 어떠한가? 

이 소설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을 허황된 망상으로 보이게 만들고,

테드 창의 소설을 경직된 과학철학실험처럼 보이게 만들며,

필립 K. 딕의 소설을 아이디어만 남는 용두사미로 보이게 만든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한다. 나는 위의 세 작가들을 매우 좋아하며, 그들의 작품에서 항상 배움을 얻는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베르나르 베르베르, 테드 창, 필립 K. 딕의 소설들을 읽을 때마저 느꼈던

나의 묘한 갈증을 탁월하게 채워준 것이다.


왜 넷플릭스가 이 SF 소설을 사들였는지,

왜 거액을 주고 왕좌의 게임 총제작을 맡았던 D&D 콤비(데이비드 베니오프와 D.B.와이스)를 영입해

실사 드라마로 만들고자 했는지 이해가 됐다.

허나 이 소설이 나를 탄식하게 한 가장 큰 이유는

은하수처럼 넓고 깊은 작가의 압도적인 지식도 아니었고,

이야기 매체 전체를 통틀어서도 손에 꼽힐 만큼 거대한 스케일을 짜임새 있게 엮어낸 뚝심도 아니며,

아이디어를 극적 구성과 절묘하게 엮어낸 소설적 상상력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나를 강타한 것은 인류 문명에 대한 절망적 허무주의와,

그 두터운 허무의 콘트리트를 뚫고 기어이 돋아난 작은 희망의 싹이다.

이 소설은 인간을 넘어, 인류에게 질문을 던진다.

인류의 석양이 머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떤 미래를 살아야 하느냐고.

그 질문을 던진 작가의 이름은 바로 류츠신이고, 그 소설의 제목은 바로 <삼체>다.

여기부터 약간 스포일러.


나노과학 분야의 우수한 연구자인 '왕먀오'의 연구실로

한 무리의 군인과 경찰들이 찾아온다.

본디 군경이 함께, 그것도 비밀리에 움직인다는 건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증거다.

그들을 따라간 왕먀오는 수상쩍은 밀실회의장에 도착한다.

그곳엔 중국군 장성부터, 미군, 영국군, CIA까지 자리하고 있고, 

왕먀오는 영국군 장성이 심각한 얼굴로 중얼대는 소리를 듣는다. 

"To be, or not to be."

사느냐 죽느냐, 무언가의 존망에 관련된 일임은 분명하다. 

그들은 왕먀오에게 최근 과학자들이 의문의 자살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한다. 

왕먀오가 흠모했던 여성이자, 가장 최근에 자살한 과학자 '양둥'은 의문의 쪽지를 남겼다.

“물리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수백년에 걸쳐 정립되고 발전해온 물리학이 존재하지 않는다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각국의 정보기관과 군인들로 이루어진 의문의 대책위원회는

왕먀오에게 '과학의 경계'라는 과학자 집단에 잠입해 그들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정보를 캐낼 것을 요구한다.

내키지 않는 미션에 발을 딛게 된 왕먀오는 예원제라는 노년의 천문학자와 만나게 되고,

이어 ‘삼체’라는 이름의 수상쩍은 게임에 접속하게 된다.

진실을 캐려는 그 과정 속에서 왕먀오는 미지의 존재로부터 협박을 받는다. 

밤하늘 전체를 고장난 형광등처럼 깜빡이게 만드는, 

인간의 상식을 초월한 존재로부터. 

그리고 마침내 드러나는 예원제의 비밀, 그리고 삼체의 비밀은

왕먀오와 독자에게 전율을 안긴다.


<삼체>는 결코 완전무결한 걸작은 아니다. 

처음엔 연작으로 계획하지 않았다는 작가의 인터뷰 내용대로 

1,2,3편의 구성적 완결성은 아쉬운 수준이며, 

문체는 너그럽게 보아도 좋다고 할 수준은 못된다. 

하지만 그 모든 단점을 상쇄하는 것은 이야기가 가진 막강한 힘. 

메모장을 끼고 읽어야 할 만큼, 상상력을 자극하는 다채롭고 폭발적인 상상과 질문들이 홍수처럼 쏟아진다. 

과학자라는 존재의 나약한 육체와 강인한 호기심의 대비, 

삼체 게임 속에서 마주쳐 각자의 지혜를 겨루는 동서고금의 역사적 위인들, 

문학적 상상과 사랑에 빠져 세상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린 뤄지, 

면벽자들이 짜낸 인류 최후의 지혜와 그것을 부수려는 파벽자들의 음모.

예원제가 석양을 바라보며 인류의 종언을 고하는 대목은 

강렬한 인상으로 독자의 의식을 침공해온다. 

그야말로 창작자에게 영감을 주는 소설.


<삼체>는 읽는 이에 따라 묵시록으로 보일 수도, 

혹은 계시록, 어쩌면 창세기로 보일 수도 있다. 

그건 우리 각자가 인간 문명에 어떤 기대와 희망을 걸고 있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래서 <삼체>는 우리의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게 만든다. 

만약 당신이 야심만만한 창작자라면, 

<삼체>는 그 위력적인 이야기로 심장을 뒤흔들며 부추길 수도 있다. 

당신도 새로운 시대의 사가(Saga)에 도전해보지 않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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