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환이 Dec 30. 2021

공동경비구역 JSA Joint Security Area

우리의 소원은... 


<공동경비구역 JSA>에 대한, 시나리오 작법적 견해입니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의문의 총격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로 인해 북한 병사 2명이 사망하고 남한 병사 1명이 부상당합니다. 사건의 진상을 두고 남북은 첨예하게 대립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중립국 감독위원회에서 스위스군 소령 소피 장을 파견합니다. 관객은 <양들의 침묵>의 클라리스 스탈링을 연상케 하는, 연약하지만 씩씩한 소피를 통해서 사건의 진상을 쫓아가게 됩니다. 

 쉽게 말해 <공동경비구역 JSA>는 미스터리 장르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미스터리 장르에서 주인공이 사건이 일어난 '원인'을 쫓는다는 것은 흔한 동선입니다. 수많은 추리소설, 추리만화들이 사건의 진상과 함께 결국 그 '동기'를 밝히면서 끝납니다. <공동경비구역 JSA> 또한 그 진상이 드러나며 영화가 끝나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영화의 작법적 완성도가 다른 미스터리에 비해 유독 출중한 것은 남과 북의 이념 대립이라는 까다로운 테마를 끌어들여 놓고서도 '왜?'라는 단순한 탐정 놀음에만 치우치진 않는다는 점입니다. 근래의 추리 미스터리 장르들 또한 '기발한 트릭의 고갈'에 직면한 뒤로는 '왜 죽일 수밖에 없었나'라는 인물의 사연에 천착하고 있기는 합니다. 베스트셀러인 <용의자 X의 헌신>이나 도진기 작가의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도 비슷한 경우입니다. 출중한 추리소설 작가들이 각자의 만신전을 이루면서, 순전한 트릭만으로 독자들의 엔터테이닝 한 기대감을 만족시키기는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결국 추리 미스터리와 감정적인 드라마를 결합하는 것은 장르의 매너리즘을 벗어나기 위한 시도입니다. 그러나 추리 미스터리는 지극히 이성적인 장르이고, 드라마는 반대로 감정적인 장르라는 점에 이 스토리텔링의 난제가 숨어 있습니다. 복합장르가 거의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현대 스토리텔링에서, 서로 다른 장르의 법칙을 가지고 저글링을 하는 것은 관객의 시선을 끌기에 좋지만, 동시에 실패하기도 쉬운 방법입니다. 예컨대 이충현 감독의 <콜>은 스릴러와 가족 드라마의 밸런스 유지에 실패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치밀한 구성을 통해서 그 난제를 극복하는 데에 성공한 몇 안 되는 한국영화입니다. 이는 박찬욱 감독이 깊은 이성과 풍부한 감수성을 모두 가진 감독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공동경비구역은 영어로 Joint security area인데, 첫 장의 제목은 Joint가 아닌 Area입니다. 장의 제목처럼 1장은 판문점이라는 '구역'을 보여줍니다. 


 1,2,3장으로 나뉜 영화는 얼핏 보면 정공법으로 진행됩니다. 소피가 스위스군 관할의 캠프 보나파스에 도착하고, 남북 모두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사건의 진상을 밝히라는 어려운 임무를 떠맡게 됩니다. 소피는 당장 '납치당했다가 탈출했다'라고 주장하는 남한 측의 이수혁 병장과, '습격당했지만 살아남았다'라고 주장하는 북한 측의 오경필 중사를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소피에게 전혀 협조적이지 않습니다. 즉, 소피의 앞에는 그저 미궁이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완전히 상반되는 '사실'과 비협조적인 당사자들이 놓여 있습니다. 즉, 시작부터 '진실을 찾는 행위' 속에 '강력한 갈등'이 자연스레 내포되는 것입니다. 소피는 증거의 파편들을 모아가며 숨겨진 진실을 밝히려 합니다. 이것이 3개의 장으로 나뉜 <공동경비구역 JSA>의 1장의 줄거리입니다. 1장의 주인공은 명백하게 소피이며, 1장은 조사를 받던 남성식 일병이 느닷없이 투신하면서 끝납니다. 우리는 남성식 일병이 사건에 연루된 인물이 아니라고 알고 있었으므로, 그의 투신은 여기에 상상 이상의 진실이 숨어 있으리라는 단서가 됩니다. 일단 남측과 북측의 진술 모두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겁니다. 의문의 폭이 도리어 넓어지면서, 영화는 시간을 거슬러 갑니다.

2장의 제목은 security, 즉 보안, 경비, 안보입니다.

 2장은 느닷없이 과거를 보여줍니다. 이 과거는 누군가의 진술로 이루어진 주관적 플래시백이 아니라, 전지적 시점으로 보이는 객관적 플래시백입니다. 이 플래시백을 통해 우리는 이수혁과 오경필이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를 알게 됩니다. 1장은 여러 증거들을 파편적으로 흩뿌리면서 우리에게 물음표를 던졌다면, 2장은 사건의 시작을 차근히 설명하는 드라마의 방식을 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2장은 세 개의 장 중에 가장 긴 러닝타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1장은 약 29분, 2장은 약 42분, 3장은 35분이지요. 무엇보다 2장의 주인공은 소피가 아니라 이수혁입니다. 이수혁은 실수로 작전에서 낙오되고, 지뢰로 인해 곤경에 빠졌다가 오경필, 정우진을 만나 위기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들과 편지까지 주고받으며 점차 가까워지던 이수혁은 마침내 군사분계선을 넘어가 북측 초소를 방문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그게 가능했던 것은 오경필과 정우진이 이빨 달린 괴물이 아니라 이수혁과 똑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이 '체제의 터부'를 범하는 과정을 대단히 신중한 설득력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수혁이 북한 초소를 방문했을 때, 남북 측 병사 모두에겐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수혁은 큰 마음을 먹고 초소로 들어서고, 그와 마주친 오경필과 정우진도 총을 겨누며 경계합니다. 박찬욱은 편집을 통해 그들 사이의 심리적 경계선이 무너지는 과정을 쉽사리 건너뛰는 듯하다가도, 그들이 '체제에 의해 규정된 적'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긴장감을 꾸준히 이용하고 있습니다. 총을 뽑는 속도를 과시하는 이수혁의 기를 죽이기 위해 오경필이 소총을 들고 와서 겨눌 때 긴장감이 발생하는 것도 그들이 아직은 적군이기 때문입니다. 꽤 오랜 시간을 함께 한 뒤, 2장의 후반부에서 이수혁이 전향을 제안할 때도 장면 안에는 갑작스레 긴장감이 감돕니다. 박찬욱은 유머와 긴장을 오가는 탁월한 솜씨로 인간성과 체제 사이의 갈등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수혁이 여기에 남성식까지 끌어들이면서 비극의 단초가 마련되지요. 

 남성식이라는 캐릭터는 근본적으로 두려움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박찬욱은 남과 북의 이념 대립이 근본적으로 인간의 두려움을 이용하고 있다는 주장을 위해 남성식이라는 캐릭터를 적극적으로 이용합니다. '인간은 나약하기 때문에 사악해질 수 있다'는 오랜 명제입니다. 이수혁의 전역이 다가오면서 그들은 이 밀월을 끝내기로 하고, 마지막 밤에 예상치 못한 방문자가 찾아오며 2장은 끝납니다.

3장의 제목이 Joint가 됩니다. 즉 각 장은 Joint security area를 거꾸로 뒤집어 진행됩니다.


<공동경비구역 JSA>가 서사의 단절이라는 위험성을 무릅쓰고 각 장을 분리한 것은 서사 줄기마다의 주인공을 명확하게 나누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3장이 시작되며 주인공은 다시 소피가 됩니다. 그러나 2장의 주인공이 이수혁과 오경필이었기 때문에, 3장은 진실을 밝히려는 소피와 진실을 감추려는 이수혁, 오경필 사이의 각축전이 됩니다. 캐릭터들이 가진 각기 다른 목표에 의해 3장의 갈등이 임계점에 이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날 밤에 결국 무슨 일이 있었는가?'라는 호기심을 가지지만, 이번엔 전적으로 소피의 입장에서만 영화를 따라갈 수는 없게 됩니다. 진실이 밝혀지면 이수혁과 오경필 모두에게 불리해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소피는 관객과 심리적으로 가장 먼 거리에 있는 인물입니다. 분단국가 남한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 혹은 이수혁과 달리 소피는 결국 이방인이자, 제삼자이기 때문입니다. 박찬욱은 소피에게 사건을 주도적으로 파헤치는 수사관의 포지션을 맡겼으면서도, 이 심리적 거리를 절묘하게 유지하고 1,2,3장을 분리하는 방법으로 우리가 어느 캐릭터만을 전적으로 지지할 수 없게 만듭니다. 이 지점에서 관객은 속수무책의 태도가 됩니다. 진실은 궁금하지만, 그 내막은 두렵습니다. 박찬욱 감독은 어쩌면 이런 이율배반적인 딜레마야말로 분단의 본질임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소피는 어떠한 연유에선지 사건을 조용히 덮기보다는 기어코 진실을 파헤치기를 원합니다. 남성식의 죽음으로 이수혁이 폭발해 가녀린 목이 졸리고, 대질심문에서는 오경필이 폭발해 이수혁을 폭행하는 지경에 이르는데도 말입니다. '안락의자 인류학자'로 불리는 보타 소장은 일련의 사고들을 빌미 삼아 소피를 보직 해임하면서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진실을 들려줍니다. 이방인이던 그녀의 아버지 '장연우'는 거제도 포로수용소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한국전쟁이 휴전된 이후, 남과 북 모두를 버리고 제3 국인 아르헨티나를 선택했고, 스위스 여인과 만나 소피의 아버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장연우가 과거 인민군이었다는 것이고, 소피를 못마땅해하던 남측의 표장군이 그 사실을 알게 됐다는 것입니다. 후임자가 결정되는 대로 수사 책임자에서 물러나야 하는 소피에게는 이제 명분이 없습니다. 그녀는 고이 접어둘 정도로 외면했던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하게 됩니다. 자본주의 남한과 사회주의 북한 모두를 선택할 수 없었던 '광장의 인간', 아버지를. 그제야 소피는 '중립국'이 아닌 한 명의 '인간'으로서 진실을 밝히기로 합니다. 진실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그래야 이들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철저한 이방인이었던 그녀가 도리어 이들의 보호자로 돌변하는 순간이고, 그와 동시에 영화는 감춰진 비극의 시간을 드러냅니다. 놀라운 완성도로 이루어진 '비밀의 씬'이 모습을 드러내고 나서야, 그들이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 진실을 숨길 수밖에 없었음을 관객도 알게 됩니다. 

 여기에 <공동경비구역 JSA>라는 미스터리의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진실은 구원을 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 사이를 가로막은 분단 현실이 너무나 냉엄하기 때문입니다. 이수혁에게서 시작된 플래시백이 오경필에게서 끝나고 나면, 이 영화의 엉킨 실타래는 완전히 풀리고, 베일은 사라집니다. 얼핏 미스터리와 드라마가 하나의 궤로 마무리된 듯합니다. 그러나 박찬욱은 이 영화를 죄의식이라는 테마로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불이 꺼진 재를 다시 타오르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박찬욱은 그것을 '진실의 작은 파편'에서 찾아냅니다. 정우진을 쏜 최초의 총알은 남성식이 아닌, 이수혁의 총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물론 대단한 사실은 아닙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비로소 이수혁이 알았으며, 소피는 그 말을 오경필이 해준 말로써 전달했다는 겁니다. 이수혁이 그것을 알았지만 부정해온 것이었는지, 자신조차 혼동스럽다가 비로소 확신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어지는 그의 행동을 보아선 후자일 것입니다. 게다가 직전에 소피는 오경필이 돌려준 지포 라이터를 이수혁에게 전달했습니다. 어쩌면 이수혁은 그것을 "용서할 수 없다"는 메시지로 받아들였는지도 모릅니다. 그걸 알게 된 순간, 그 스스로도 그를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이수혁이 정우진에게 방아쇠를 당기게 만든 것은 체제가 부여한 공포이고, 이수혁이 자기 자신에게 방아쇠를 당기게 만든 것은 인간성이 부여한 죄의식이었습니다. 목숨을 끊은 이수혁을 보여줄 때, 뒤집혀 있던 카메라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은 하나의 염원입니다. 뒤집혀 있는 세상. 즉 인간이 체제를 위해 존재하는 세상. 이 죽음을 통해서라도 우리가 그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공동경비구역 JSA>는 냉엄한 체제의 장벽 앞에서 인간성이 어떻게 짓밟히고 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수혁의 자살은 서사의 완결성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는 아니었습니다. (실제로도 박찬욱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또 다른 엔딩 버전도 '생각은 해 두었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이수혁이 죽지 않고 나이로비에서 군사교관으로 복무하는 오경필을 만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박찬욱 감독은 이 영화에 잊히지 않을 만큼 아픈, 가슴 절절한 고통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저는 그 판단을 지극히 존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어지는 흑백 엔딩 샷이 가슴을 저미게 만듭니다.

 정성일 평론가는 <공동경비구역 JSA>를 평가하면서, "이보다 더 구슬프게 통일을 노래하는 우리 시대의 영화를 알지 못한다"라고 썼습니다. 문제는, 저 글이 2000년에 쓰였다는 것입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시대에는 <공동경비구역 JSA>만큼이나 절절하게 통일을 노래하는 영화가 없으며, 아직도 우리 시대에는 굳건한 체제의 대립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동경비구역 JSA>는 아직도 탄식을 부르는 걸작으로,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스파이 게임 Spy Game, 200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