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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이 Dec 30. 2021

모가디슈 Escape from Mogadishu

모가디슈라는 또 다른 광주



감독 : 류승완

각본 : 이기철, 류승완

촬영 : 최영환

출연 : 김윤석, 조인성, 허준호, 구교환, 김소진, 정만식


<모가디슈>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 영화가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혹은 기이하게 느껴지는 것은 한국영화가 늘 다루던 시선의 토픽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모가디슈>는 91년 대한민국의 시선으로 제3세계를 바라봅니다. 세계 영화에서 이런 시선은 할리우드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은 세계 제1의 패권국가이며 할리우드는 세계 영화계 제1의 패권 시장이기 때문이죠. 그들이 3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은 항상 콩키스타도르적이었습니다. <모가디슈>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는 <블랙 호크 다운>과 <아르고> 역시 그러하며, 제3세계를 통해 우리 스스로를 돌아본다는 가치적 관점의 작동 역시 유사합니다. 장훈의 <택시 운전사>가 타자의 시선으로 독일의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를 끌어들이고, 그를 바라보는 택시 운전사 김사복의 시선을 따라가며 광주 민주화 운동을 조명했다면, <모가디슈>의 주인공들은 타자의 시선으로 우리의 비극을 바라보는 대신 타자 그 자체가 되어 그들의 비극을 지켜봅니다. 물론 광주의 참상을 세계에 알린 힌츠페터와 달리 그들이 이 비극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이 영화에서 소말리아 내전은 주인공들에게 생존에의 의지와 탈출의 명분, 그리고 남북의 단합을 부여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아르고>에서 미국 대사관 직원들은 이란 국민들의 분노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블랙 호크 다운>의 (세계 최강 수준의 육군인) 레인저와 델타 포스는 끝도 없이 쏟아지는 민병대의 총탄 세례에 고전을 면치 못합니다. 이 중 <블랙 호크 다운>이 <아르고>에 비견했을 때 결코 뒤떨어지지 않은 완성도를 가졌음에도 가치적으로 공허했던 이유는 모가디슈 전투가 촉발된 원인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르고>는 오프닝 애니메이션을 통해 미국에 대한 이란의 증오가 미국 스스로 자초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이 영화의 '테러리스트'는 아랍인이나 공산주의자가 아닌 패권주의 미국 본인이며, 주인공인 토니 멘데스는 국가가 지은 죄를 떠안게 된 대사관 직원들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아르고>가 탁월한 영화인 것은 그 서사적 아이러니(자초한 재앙)를 그대로 떠안음으로써 도덕적 가치판단을 관객들에게 강요하지 않으면서 통속적인 휴머니즘을 탈피하고, 덩달아 탈출 스릴러로서의 서사적 작동을 완벽하게 구현해냈기 때문입니다. <아르고> 후반부의 공항 탈출 시퀀스는 그 단순한 테크닉에도 불구하고 손에 땀을 쥐게 만들죠. 반면 실제 역사에서의 미국은 중동 지역에서의 영향력 강화를 위해서 소말리아 내전에 참전한 것임에도 <블랙 호크 다운>은 그 역사적 지엽말단을 외면한 채 아이디드 패거리의 악행만을 조명하며 극을 이끌었습니다. 그 결과로 남는 '전우애'라는 가치도 그 희생을 강요한 국가의 욕망을 떠올릴 때 공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미국을 바라보는 <아르고>와 <블랙 호크 다운>의 시선은 완전히 다릅니다. 


 <모가디슈>는 <아르고>의 스릴과 <블랙 호크 다운>의 스펙터클은 가졌으되, 영화가 스스로를 지탱하는 가치적 중심이 없습니다. 소말리아 내전은 서사적 인과로도, 역사적 인과로도 남북 대사관 직원들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그건 남북한 사람들의 입장에선 갑자기 발생한 재앙이죠. 이를테면 이 영화에서의 소말리아 내전은 <백두산>에서 백두산의 폭발이라는 자연재해와 다를 바 없다고까지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소말리아 내전은 동포끼리 총구를 겨누었던 한국전쟁, 기나긴 분단의 역사와 유사하며 바레 정권의 군사 경찰들이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모습은 광주의 참극과도 닮아 있습니다. 류승완 감독은 바레 정권의 군사 경찰들이 시위대를 진압하는 대목을 '이거 어디서 본 듯하지 않아?'라고 묻듯이 보여줍니다. 


 지극히 호의적으로 평가하자면 <모가디슈>는 91년 대한민국의 '평범한 사람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 동족상잔의 비극이 있었던 대한민국의 역사를 경유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소말리아인들은 '과거의 한국인들'이 아닌 '검은 피부의 타자들'이지만 류승완 감독의 카메라는 분명히 관객들이 그렇게 보아주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과하게 얘기하자면 류승완 감독은 재앙 속에서 남과 북이 손잡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모가디슈>를 찍은 것이 아니라, 한국인들의 눈으로 소말리아 내전을 보여주기 위해 <모가디슈>를 찍은 것 같습니다. 저는 여기까지는 동의할 수 있습니다. 물론 반대로 말하면 제가 이 영화에서 그것만이 인상적이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카체이스 씬이 따분하게 느껴졌습니다. 


 <모가디슈>가 완전히 새로운 공간에서 한국영화로써의 서사를 펼쳐내는 데다, 놀랍도록 탁월한 외적 완성도를 지녔음에도 극장을 나서는 순간 그 쾌감이 증발되어 버리는 이유는 '과거를 경유하는 시간'이 아닌 '회귀'하는 순간 때문인 듯합니다. 천신만고 끝에 전쟁터에서의 탈출에 성공한 남북 대사관 일행은 마지막 문제와 마주해야만 합니다. 그들이 탄 비행기는 장르적 쾌감이 지배하던 공간(모가디슈)을 벗어나 정치적 현실이 지배하는 공간(남북 당국이 마중을 나와 있는 케냐 몸바사 공항)에 도착합니다. 남북 대사관 직원들은 총탄이 빗발치는 소말리아에서 이념과 터부를 넘어 살아남기 위해 손을 잡았지만, 남북 당국이 눈을 부라리고 있는 분단 현실 역시 총성 없는 전쟁터인 것은 마찬가집니다. 한신성 대사는 말합니다. "이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우리는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한때 동포였고, 함께 사선을 넘어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서로를 주적으로 둔 국가 체제 하에서 살아가고 있음은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남측 생존자들과 북측 생존자들은 그 냉엄한 현실을 살아가야 하기에 서로를 외면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합니다. 남한 대사관 담장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바라보던 그 눈빛들을. 한신성 대사는 결국 림용수 대사와 북한 사람들을 돕기로 결정했었다는 것을. 자신의 생존이 위태로워질 수 있음을 알고도 그들을 도왔다는 점에서, 한신성 대사는 그 순간만큼은 <쉰들러 리스트>의 오스카 쉰들러에 비견할 만했습니다. 그러나 오스카 쉰들러는 나치라는 절대악이 '패배'한 뒤 영웅으로 추대되었지만, 현재 진행형인 남과 북의 이념 대립 앞에서 한신성 대사는 (공식적인) 영웅이 될 수 없습니다. 끝내 서로를 외면해야 하는 현실에 몸담고 있음에도 영웅적인 결정을 내렸던 한신성 대사. 저는 (실존인물로서의) 그의 인간애를 존경합니다. 하나 그렇기에, 이 영화가 엔딩에서 보여주는 갑작스러운 순응주의는 존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가디슈>는 엔딩 직전까지 (현실이 아닌) 장르 안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가디슈>의 시각적, 정서적 스펙터클은 카체이스 시퀀스에서 끝났어야 합니다. 그러나 최후의 몸바사 공항 시퀀스는 표현될 정서의 기댓값에서 앞선 카체이스 시퀀스를 압도하고 있습니다. 공항에 도착한 이후 ‘국가의 적을 도왔다’는 매서운 추궁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며, 그로 인해 인간적인 감정과 체제의 명령 사이에서 갈등해야 하니까요. 이건 (분단 현실에 여전히 몸 담고 있는) 한국 관객들에겐 유독 당연합니다. 


 비행기에서 내린 인물들은 서로를 필사적으로 외면하며 각자의 버스에 오릅니다. 인물들의 그 ‘모른 척’을 보여주는 카메라를 통해 류승완 감독은 결국 그 스스로 현실을 ‘모른 척’합니다. 일각에서는 이 ‘모른 척’을 통해 과도한 정치성을 피해 간 것이 탁월한 선택이라 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떠한 형태든 정치적 연상을 피해 가고 싶었다면 애초에 몸바사 공항 시퀀스는 필요가 없습니다. 말하자면 류승완 감독은 하나의 토픽을 도마에 올려둔 채 되려 침묵함으로써 '비겁하게 발언'했습니다. 이것은 (대다수 관객들의 이상한 지적대로) '신파를 피해 간 용기'가 아니라 실컷 저질러진 장르적 서사를 봉합하기 위해 변명하듯 소환된 현실일 뿐입니다. 장르와 현실의, 미처 화합하지 못한 이율배반이지요.


 <모가디슈>는 <아르고>의 스릴과 <블랙 호크 다운>의 스펙터클은 닮았으되, 정치적 판단을 온전히 관객들에게 맡겨둔 <아르고>의 용기와 차라리 우파적 스펙터클을 밀어붙이는 <블랙 호크 다운>의 뚝심은 닮지 못했습니다. <모가디슈>의 엔딩이 씁쓸한 것은 나아질 기미가 없이 여전한 분단 현실 때문이 아니라, 그 영화적 순간의 공허함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것을 현실에 대한 영화의 패배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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