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가디슈라는 또 다른 광주
감독 : 류승완
각본 : 이기철, 류승완
촬영 : 최영환
출연 : 김윤석, 조인성, 허준호, 구교환, 김소진, 정만식
이 영화가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혹은 기이하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한국영화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모가디슈>는 91년 대한민국의 시선으로 제3세계를 바라봅니다.
세계 영화에서 이런 시선은 할리우드의 전유물이었습니다.
미국이 세계 제1의 패권국가이듯, 그 영화시장인 헐리우드 또한
패권을 쥔 자들의 입장에서 제3세계를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모가디슈>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는 <블랙 호크 다운>과 <아르고> 역시 그러하며,
이 세 영화 모두 제3세계를 서사적 위기를 제공하는 배경으로 쓰고 있습니다.
장훈 감독의 <택시 운전사>가 타자의 시선으로 독일의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를 끌어들이고,
그를 바라보는 택시 운전사 김사복의 시선을 따라가며 광주 민주화 운동을 조명했다면,
<모가디슈>는 타자의 시선으로 우리의 비극을 바라보는 대신,
'91년 대한민국의 우리'로써 타자의 비극을 바라봅니다.
물론 광주의 참상을 세계에 알린 힌츠페터와 달리
그들이 이 비극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목적은 탈출 뿐.
달리 말해 이 영화에서 소말리아 내전은 주인공들에게 탈출에의 의지,
그리고 남북의 단합을 부여하기 위한 극적 장치입니다.
<아르고>에서 미국 대사관 직원들은 이란 국민들의 분노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블랙 호크 다운>에서 세계 최강의 육군인 레인저와 델타 포스는
끝도 없이 쏟아지는 민병대의 총탄 세례에 고전을 면치 못합니다.
이 중 <블랙 호크 다운>이 <아르고>에 비견했을 때
결코 뒤떨어지지 않은 완성도를 가졌음에도 가치적으로 공허했던 이유는
모가디슈 전투가 촉발된 원인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르고>는 오프닝 애니메이션을 통해
미국에 대한 이란의 증오가 미국 스스로 자초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이 영화의 '테러리스트'는 아랍인이나 공산주의자가 아닌 패권주의 미국 본인이며,
주인공인 토니 멘데스는 국가가 지은 죄를 떠안게 된
대사관 직원들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결국 실체가 없는 '국가'의 잘못으로 인해 희생되거나 책임을 지는 것은 인간들 개개인인 것입니다.
<아르고>가 탁월한 영화인 것은, 그 서사적 아이러니(자초한 재앙)를 그대로 떠안음으로써
실화에 대한 윤리의식을 저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러니를 짊어진 탓에 역으로 순수하게 탈출의 스릴과 서스펜스에 집중할 수 있었고,
영화적 쾌감과 윤리적 여운을 동시에 안겨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르고> 후반부의 공항 탈출 시퀀스는 그 단순한 테크닉에도 불구하고 손에 땀을 쥐게 만듭니다.
반면 <블랙 호크 다운>은 미국이 소말리아 내전을 촉발시킨 바레 정부의 악행을 알면서도 묵인해왔으며,
그것이 아프리카에서의 영향력 강화를 위한 것이었음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이런 역사적 지엽말단을 외면한 채 아이디드 패거리의 악행만을 조명하며 극을 이끈 결과,
영화가 보여주는 '전우애'라는 가치조차 군인들의 희생을 강요한 국가의 욕망을 떠올릴 때
공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실화를 바라보는 <아르고>와 <블랙 호크 다운>의 시선은 완전히 다릅니다.
관객들이 윤리적 훈계를 싫어하거나 따분해한다고 여기는 창작자들도 있습니다만,
관객들이 윤리적 훈계보다 더 싫어하는 것은 윤리의 부재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컨텐츠를 향유하는 동안에도 윤리에 대한 감각은 결코 잠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더욱 예민하고 총명하게 피어납니다.
너무나 복잡한 현실과 달리, 픽션 속의 세계는 윤리적으로 판가름하기가 훨씬 간단하기 때문입니다.
뛰어난 작품들은 그를 이용해 우리에게 윤리적 딜레마를 체험케 하지만,
미숙한 작품들은 창작자들의 윤리를 관객에게 강요하며,
위험한 작품들은 윤리의식 자체를 결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히치콕 같은 위대한 감독들은
절묘한 내러티브로 우리의 윤리감각을 마비시키고 무너뜨려
인간에겐 선악을 구별할 능력이 애초에 없음을 일생동안 꾸준히 증명해왔습니다.
또한 모든 문명인에겐 역사의식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윤리의식입니다.
결국 역사적 의미를 가진 실화를 영화화할 때 가장 어려운 것은
역사를 다루는 윤리의식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픽션의 쾌감을 구현하는 것입니다만,
실패한 작품들은 그 두 가지를 양자택일해야 하는 선택지로 여깁니다.
그러나 <아르고> 같은 걸출한 작품들은 윤리적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할 때
도리어 픽션의 쾌감도 증폭할 수 있음을 증명해냈습니다.
한편으론 역사를 각색한 것을 넘어서 아예 파괴하고 있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이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헐리우드>도 있습니다.
이 영화들이 그 파괴적 재창조에도 불구하고 윤리적 불쾌감을 안겨주지 않는 이유는,
윤리가 상실된 역사의 한 페이지에 윤리를 써 넣었기 때문입니다.
세계대전의 주범이자 대량학살자 히틀러는 유대인들의 총알에 난자당해 죽고,
극악무도한 연쇄살인마들은 역사 속의 살인을 저지르기도 전에 통쾌하게 죽어나갑니다.
결국 타란티노는 영화가 역사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느냐라는 질문 앞에서
가장 포스트 모던한 답을 던진 것입니다.
다시 <모가디슈>로 돌아오면,
이 영화는 <아르고>의 스릴과 <블랙 호크 다운>의 스펙터클은 가졌으되,
역사를 다루는 영화로서 자신만의 역사관이 없다는 인상을 줍니다.
소말리아 내전은 서사적 인과로도, 역사적 인과로도 남북 대사관 직원들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그건 남북한 사람들의 입장에선 갑자기 발생한 재앙입니다.
이를테면 이 영화에서의 소말리아 내전은
<백두산>에서 백두산의 폭발이라는 자연재해와 다를 바 없다고까지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소말리아 내전은 동포끼리 총구를 겨누었던 한국전쟁, 거기서 이어진 분단의 역사와 유사하며
바레 정권의 군사 경찰들이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모습은 광주의 참극과도 닮아 있습니다.
실제로 류승완 감독은 바레 정권의 군사 경찰들이 시위대를 진압하는 대목을
차량 내부의 시점을 이용한 트래킹 쇼트로 훑으며 우리 역사의 비극이 연상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지극히 호의적으로 평가하자면 <모가디슈>는
91년 대한민국의 '평범한 사람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 동족상잔의 비극이 있었던 대한민국의 역사를 경유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소말리아인들은 '과거의 한국인들'이 아닌 '검은 피부의 타자들'이지만
류승완 감독의 카메라는 분명히 관객들이 그렇게 보아주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과하게 얘기하자면 류승완 감독은
재앙 속에서 남과 북이 손잡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모가디슈>를 찍은 것이 아니라,
한국인들의 눈으로 소말리아 내전을 보여주기 위해 <모가디슈>를 찍은 것 같습니다.
저는 여기까지는 동의할 수 있습니다.
다만 반대로 말하면 이 영화에서 오직 그것만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는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카체이스 씬이 따분하게 느껴졌습니다.
<모가디슈>가 완전히 새로운 공간에서 한국영화로써의 서사를 펼쳐내는 데다,
놀랍도록 탁월한 외적 완성도를 지녔음에도
극장을 나서는 순간 그 쾌감이 증발되어 버리는 이유는
'과거를 경유하는 시간'이 아닌 '회귀'하는 순간 때문인 듯합니다.
천신만고 끝에 전쟁터에서의 탈출에 성공한 남북 대사관 일행은 마지막 문제와 마주해야만 합니다.
그들이 탄 비행기는 장르적 쾌감이 지배하던 공간(모가디슈)을 벗어나
정치적 현실이 지배하는 공간(남북 당국이 마중을 나와 있는 케냐 몸바사 공항)에 도착합니다.
남북 대사관 직원들은 총탄이 빗발치는 소말리아에서 이념과 터부를 넘어 살아남기 위해 손을 잡았지만,
남북 당국이 눈을 부라리고 있는 분단 현실 역시 총성 없는 전쟁터인 것은 마찬가집니다.
한신성 대사는 말합니다.
"이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우리는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한때 동포였고, 함께 사선을 넘어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서로를 주적으로 둔 국가 체제 하에서 살아가고 있음도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남측 생존자들과 북측 생존자들은 그 냉엄한 현실을 살아가야 하기에 서로를 외면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합니다.
남한 대사관 담장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바라보던 그 눈빛들을.
한신성 대사는 결국 림용수 대사와 북한 사람들을 돕기로 결정했었다는 것을.
자신의 생존이 위태로워질 수 있음을 알고도 그들을 도왔다는 점에서,
한신성 대사는 그 순간만큼은 <쉰들러 리스트>의 오스카 쉰들러에 비견할 만했습니다.
그러나 오스카 쉰들러는 나치라는 절대악이 '패배'한 뒤 영웅으로 추대되었지만,
현재 진행형인 남과 북의 이념 대립 앞에서 한신성 대사는 (공식적인) 영웅이 될 수 없습니다.
끝내 서로를 외면해야 하는 현실에 몸담고 있음에도 영웅적인 결정을 내렸던 한신성 대사.
저는 (실존인물로서의) 그의 인간애를 존경합니다.
하나 그렇기에, 이 영화가 엔딩에서 보여주는 갑작스러운 순응주의는 존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가디슈>는 엔딩을 제외하곤 내내 (현실이 아닌) 장르 안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명백히 소말리아에서의 카체이스 시퀀스를 클라이맥스로 설계했지만,
최후의 몸바사 공항 시퀀스는 표현될 정서의 기댓값에서 앞선 카체이스 시퀀스를 압도하고 있습니다.
공항에 도착한 이후 ‘국가의 적을 도왔다’는 매서운 추궁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며,
그로 인해 인간적인 감정과 체제의 명령 사이에서 갈등해야 하니까요.
이건 (분단 현실에 여전히 몸 담고 있는) 한국 관객들에겐 유독 당연합니다.
비행기에서 내린 인물들은 서로를 필사적으로 외면하며 각자의 버스에 오릅니다.
인물들의 그 ‘모른 척’을 보여주는 카메라를 통해
류승완 감독은 결국 그 스스로 현실을 ‘모른 척’합니다.
일각에서는 이 ‘모른 척’을 통해 과도한 정치성을 피해 간 것이 탁월한 선택이라 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떠한 형태든 정치적 연상을 피해 가고 싶었다면
애초에 몸바사 공항 시퀀스는 필요가 없습니다.
말하자면 류승완 감독은 하나의 토픽을 도마에 올려둔 채 되려 침묵함으로써
'대답없는 대답'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파를 피해 간 용기'가 아니라
실컷 저질러진 장르적 서사를 어떻게든 현실 안에서 봉합하기 위한 무책임한 외면처럼 보입니다.
장르와 현실의, 미처 화합하지 못한 이율배반이지요.
저는 여기에서 눈물 겨운 신파가 존재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굳이 '91년 소말리아 내전에서 남북 대사관 직원들이 극적으로 탈출했다'는 역사적 실화를 소환한,
그 의미에 대한 답이 내려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냥 그 실화가 극적이라서'라고 한다면,
그 답을 내려야 하는 줄 몰랐다고 한다면,
그건 역사의식이 전혀 없는 자의 대답일 것입니다.
그래서 <모가디슈>의 엔딩은 관객들을 묘한 공허에 휩싸이게 만듭니다.
<군함도>가 실화를 장르로 착취하고서 아무런 문제의식도 보여주지 못했다면,
<모가디슈>는 실화를 장르로 착취하고서
'이게 다는 아니지?'라고 묻는 순간 묵비권을 행사합니다.
그 묵비권이 암시하는 것이 반성인지 외면인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말 그대로 묵비권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역사 앞에서의 침묵이란 외면이라 생각될 뿐입니다.
결국 <모가디슈>는 <아르고>와 <블랙 호크 다운>을 레퍼런스로 삼았을 것임에도,
정치적 판단을 온전히 관객들에게 맡겨둔 <아르고>의 용기와
차라리 스펙터클 일변도로 밀어붙이는 <블랙 호크 다운>의 뚝심은 닮지 못했습니다.
<모가디슈>의 엔딩이 공허한 것은 91년에 비해 나아진 것이 없는 분단 현실 때문이 아닙니다.
그 침묵이 현실에 대한 픽션의 비겁함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이 필요해, 이게 우리 현실인데 어쩔 거야?
저는 이런 것을, 현실에 대한 영화의 패배라고 부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