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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이 Dec 30. 2021

종이의 집 LA CASA DE PAPEL

응원하고 싶어지는 주인공에 대해 생각하다




 편식이 심한 저는 (한국을 제외하곤)비영어권 외국 컨텐츠들에 대한 적응력이 낮은 편이어서, 아무리 좋다는 말을 듣는 작품이어도 생소한 음성 언어로 말해지는 작품을 보기 어려워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넷플릭스 최고의 인기작 중 하나인 <종이의 집>도 이제야 봤습니다. 이 작품은 스페인 조폐국을 타겟으로 범죄사에 남을 만한 한탕을 벌이는 강도단을 중심에 놓고, 그 사건을 해결하려는 경찰과 운 나쁘게도 인질로 잡힌 이들의 서사를 씨줄 날줄로 교차합니다. 스파이크 리의 <인사이드 맨>에서 영감을 받았음이 분명해 보이는 이 작품은 절대 방만해져선 안되는 '범죄극'이라는 장르 안에서 탁월한 '선택과 집중'을 보여주죠. 


 어떤 작품이든 시청자/관객이 스토리를 끝까지 따라가게 하기 위해서 '핵심적 의문'을 던집니다. '핵심적 의문'이란 그 작품에 종반에 접어들 때까지 우리를 쥐고 놓아주지 않는 강력한 호기심을 말합니다. <종이의 집>의 경우에는 '이들의 강도짓은 성공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으로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물론 서사가 진행되면서 누군가는 경찰에게 더 이입될 것이고, 누군가는 인질에게 더 이입될 겁니다. 그에 따라서 '경찰들은 과연 이 희대의 강도질을 막을 수 있을까?'라거나 '인질들은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라는 의문으로 번져나갈 순 있어도, 이야기를 지면에서 솟구치게 만드는 핵심적인 추진체는 강도짓의 성공 여부입니다. 


 강도단은 자칭 '교수'라 불리는 브레인을 중심으로, 도쿄, 베를린, 리우, 모스크바, 나이로비 등 도시명으로 호명되는 멤버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중 서사에서 가장 큰 지분을 가진 주인공은 도쿄입니다. 하나의 상황을 중심으로 하되 다양한 목적을 가지는 인물들을 다루고 있으니 '원탑 주인공 서사'라 할 수는 없지만 <종이의 집>의 초반부는 우리가 도쿄의 눈으로 이 사건을 바라보도록 쓰여지고 연출되어 있습니다. 그 증거로 <종이의 집>은 도쿄의 나레이션으로 시작되죠. 나레이션이란 결국 작가 혹은 감독이 관객의 인식에 씌우려는 색안경입니다. 이 드라마의 시작에서는 도쿄의 감정과 시선을 따라가라는 말이죠. 


 탁월한 작품들일수록 관객의 정보적, 정서적 시각을 하나의 인물에 국한시킴으로서 서사의 몰입감을 극대화하고 있으니, 이것이 결코 잘못된 선택은 아닙니다. 예컨대 초보 작가들은 규모가 큰 이야기를 다룰수록 개개인의 시점을 다루기보다 사건에 대한 3인칭적 해설에 몰두해서 '이해하긴 쉽지만 더할 나위 없이 따분한' 이야기를 쓰기 마련입니다. 관찰자적 입장 혹은 중립적 입장이란 서사를 끌어나가기 편리한 도구이지만 동시에 양날의 검이기도 합니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경우엔 중립자인 소피(이영애)를 1장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킴으로서, 이미 복잡한 미스테리가 펼쳐져 있는 영화의 초반부를 쉽게 이해하도록 이끌어주고 있습니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경우도 '프리 크라임' 시스템의 합법성을 감찰하기 위해 파견된 법무부 직원 위트워(콜린 패럴)를 등장시켜 해당 시스템의 범위와 한계를 우리에게 명료하게 해설하죠. 위의 두 작품이 '중립적 인물'의 패착에 빠지지 않은 이유는 이야기가 1장을 넘어가면서 인물들이 스스로의 입장을 명확히 갖기 때문입니다. 소피는 남북의 아버지에 대한 증오 때문에 남북의 유불리에 관계없이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데 목을 매고, 위트워는 프리 크라임 시스템의 위험성을 인지하곤 주인공인 앤더튼과 노골적으로 적대하죠. 아무런 입장도 갖지 않는 인물은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게 되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인물은 가장 따분한 주인공이 되는 법입니다. 


 저는 지금 <종이의 집>을 시즌1 중반까지 본 뒤에 이 글을 써고 있습니다. 1,2화가 매우 흡인력 있게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부터 <종이의 집>은 제게 너무 큰 짜증을 안겨줬습니다. 작전을 망치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처럼 보이는 도쿄의 행동들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은 캐릭터 자체가 그렇게 설정된 것이고, 그녀가 사랑이라는 미망에 얼마나 사로잡힌 인물인지를 초반부터 보여줬기 때문에 캐릭터의 개연성에 어긋나는 문제는 아닙니다. 다만 '캐릭터의 개연성'에 목을 매는 작가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문제는 '개연성의 수호'와 '그런 캐릭터를 시청자/관객이 좋아하겠느냐'는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겁니다. 많은 작가들이 특정 캐릭터의 행동이나 성격에 대해 지적을 받으면 '그 캐릭터는 원래 그런 캐릭터예요'라고 답변합니다. 원래 그런 캐릭터임을 몰랐기에 나오는 지적이 아닙니다. 그 캐릭터성 자체가 극적 흥미도를 저해한다고 판단되기에 나오는 지적이죠. 


 오해가 없길 바랍니다만, 저는 <종이의 집>의 극작술을 폄훼할 의도가 없습니다. 다만 계획을 위협하는 도쿄의 행동들이 지극히 짜증스럽게 다가왔으며, 기존의 수많은 리뷰와 별점평가를 뒤져본 결과 나와 같은 짜증을 느낀 이들이 적지 않았기에 그들의 입장을 대변해보고자 이 글을 적는 것입니다. 결국 어떤 캐릭터의 캐릭터성에 호응하느냐 마느냐는 전적으로 취향의 문제입니다. 저는 '주어진 일을 구상한 계획대로 깔끔하게' 끝내려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현실에서도 도쿄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을 정말 싫어하는 편입니다. 물론 시즌이 진행될수록 도쿄가 성장하면서 이런 시한폭탄 같은 성향이 점차 누그러진다는 평도 읽었습니다.  다만 지금 제가 도쿄라는 캐릭터에 대해 느끼는 짜증스러움으로 봤을 땐, 시즌1이라도 끝까지 볼 수 있을지 의구심은 듭니다. 결국 저는 도쿄같은 캐릭터를 '응원할 수 있는' 성향이 아닌 셈이지요. 이것은 캐릭터성 자체보다는 그 캐릭터와 충돌하는 서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비슷하지만 약간 다를 수 있는 사례로 <브레이킹 배드>를 보면, 이 작품의 주인공인 월터 역시 돌발적인 행동으로 위험을 자초하는 짓을 여러번 저지릅니다. 월터에게 내재된 '발작 버튼'은 바로 자존심이지요. 그는 생존이 위협받을 때보다 자신의 자존심이 상처받았을 때 더욱 격렬한 반응을 보입니다. '돌발행동으로 위험을 자초한다'는 측면은 도쿄든 월터든 비슷하고, 그 돌발행동의 원인이 정서적 충동이라는 점도 유사하지만 저에게 월터는 짜증스러운 캐릭터가 아닙니다. 그 차이는 '선택의 대가'에서 나옵니다. 예컨대 도쿄는 그 스스로의 선택에 대한 대가를 팀원들과 나누어서(혹은 온전히 팀원들만) 지지만, 월터는 스스로의 선택에 대한 대가를 스스로 치러냅니다. 선택의 대가란 결국 '주인공이 그것을 취함으로써 대신 무엇을 잃었는가'를 말하죠. 우리는 가상의 이야기를 볼 때 현실을 아득히 벗어난 가능성을 보길 갈망하지만(<반지의 제왕>, <E.T> 등), 그 이야기에 내재된 삶의 질서는 현실의 연장선이길 바랍니다(<쇼생크 탈출>, <포레스트 검프> 등). 그렇지 않으면 이야기란 공허한 현실에 빛을 부여하는 횃불이 될 수 없고, 극장의 불이 켜짐과 동시에 사라져버리는 허망한 촛불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우리는 삶에서 어떤 것을 손에 쥐게 되면, 반드시 잃어버리는 것도 생긴다는 것을 인생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만들기 위해선 그가 얻어낸 무언가의 환희만큼이나 잃어버린 무언가의 눈물도 진하게 그려내야 합니다. <브레이킹 배드>의 월터는 막대한 돈과, 재능에 대한 인정과, 볼품없는 것들을 찍어누르는 카리스마를 얻게 되지만 가족의 사랑과, 제시와의 우정과, 일상의 평온함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종이의 집>의 도쿄는 선택의 대가를 치르지 않았고, 수렁으로 빠져든 작전의 치다꺼리는 교수와 팀원들의 몫입니다. 그럼으로서 저에게 도쿄는 '응원할 수 있는 주인공'이 아니라 '기대하는 서사의 진행'을 방해하는 짜증스런 스파이에 불과하게 됐죠. 


 저는 하이스트 장르, 케이퍼 장르란 결국 엔트로피에 대한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온갖 변수와 장애물이 난무하는 와중에 '완벽한 계획'을 이루기 위해 모두가 각자의 포지션에서 분투하는 겁니다. 세상의 엔트로피가 항상 요동치고 있기에, 끝끝내 그 계획이 성공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깨어진 세상의 파편이 흠 하나 없이 맞춰진 듯한 쾌감을 느낍니다. 저는 <종이의 집>에서 엔트로피와 맞서는 인간들의 집요한 욕망을 보길 기대했지만, 남은 것은 스스로 엔트로피가 되어 날뛰는 도쿄의 지지할 수 없는 훼방질 뿐이었습니다. 강도짓의 성공 여부를 가장 큰 서사의 지향점으로 놓았으면서도, 감정에 이끌려 계획을 파탄으로 몰아가는 주인공을 배치함으로서 <종이의 집>은 이율배반적인 선택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종이의 집>은 그 선택에 대한 대가를 치렀지요. 보다 다층적인 서사의 변수를 얻어내고, 대신 저와 같은 취향을 가진 시청자들의 지지는 잃었습니다. 그것이 결코 나쁜 선택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종이의 집>은 넷플릭스에서 손 꼽힐 만한 글로벌 시청순위를 기록했으니까요. 다만 저(를 비롯해 비슷한 취향을 가진 이들)의 기대에서 어긋났을 뿐이며, 아쉬운 쪽 또한 모처럼 초반이 흥미로웠던 컨텐츠에서 '하차'를 고민하게 된 저 스스로일 뿐입니다. 그래도 <종이의 집>이 종반으로 가면서 심화시킬 테마를 체험하기 위해, 도쿄에 대한 짜증을 조금은 억눌러 가며 버텨볼 요량입니다. 이 안타까운 길티 플레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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