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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이 Dec 30. 2021

나의 아저씨 My mister

마침내 웃는 두 얼굴




여기, 무당벌레 한 마리 못 죽이는 남자가 있다.

그 곁에는 사람을 죽인 소녀가 있다.

사람도 죽여봤으니, 무당벌레 한 마리 죽이는 것쯤이야 우습다.

그녀에게 지상의 가치는 오직 살아남는 것이고,

삶은 낭만으로 치장하기만 버텨내기조차 어렵다.

그러니 약간의 돈을 위해 남자의 삶을 파탄으로 몰아가는 것도 간단하다.

문제는 그 남자도 누군가를 죽여봤다는 것이다. 바로 자기 자신.



<나의 아저씨>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소녀와,

타인을 위해 자기 자신까지 죽이고 살아가는 한 남자를 다룬다.


제목인 '나의 아저씨'가 증명하듯,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이유가 연기한 이지안이다.

<나의 아저씨>는

'아저씨' 앞에 '나의'라는 접두어가 붙기까지의 긴 여정이고,

이지안과 박동훈의 얼굴에 마침내 웃음이 깃들기까지의 모험이자,

가혹한 겨울을 지나 편안한 봄에 다다르는 이야기다.



나는 <나의 아저씨> 방영 당시 떠들썩했던 논란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이다.

왜냐하면 이 드라마는 로맨스 드라마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지안은 박동훈을 남자로 생각할지언정,

박동훈에게 이지안은 한 동네에서 살아가는 이웃이자

할머니의 장례식으로 마침내 맺어지는 가족이다.

이야기란 때때로 거울과 같아서,

우리가 그 안의 음흉한 속내를 비난할 때

정작 드러나는 것은 우리의 속내이다.

똑같이 거울을 보았는데

한쪽은 그 안에서 죄만을 보고,

한쪽은 그 안에서 구원을 본다.

<나의 아저씨>를 '너의 아저씨'로 남겨둘 때,

성별의 장벽은 위엄을 드높이고 인간의 실존은 빛을 잃는다.

남자여서, 여자여서 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이니까, 의 문제다.



박해영 작가의 탁월한 대본은

그 하드보일드 한 풍경에 숨이 막힐 때쯤,

박동훈의 가족과 이웃들을 등장시켜 이것이 겨울의 냉기에 인간이 맞서는 이야기임을 상기시키고,

그 삭막한 풍경에 마음이 울적해질 때쯤 오후 햇살 같은 촌극으로 웃음을 준다.

이선균의 묵직한 저음은

이 세상의 바닥에 깔린 한 남자의 괴로움을

더할 나위 없이 절절하게 전달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김원석 감독의 철저한 연출은 아이유의 스타성을 소실시키고

그녀를 이지안이라는 캐릭터로 고정시킨다.

커리어에 비해선 어두운 작품에 출연한 용기를 보여준 아이유는

어린 시절 가혹하도록 겪었던 가난의 고통을 그 낯빛으로 여실히 보여준다.

그야말로 대본, 연출, 남녀 주연배우가 이뤄내는 환상의 삼박자.



이지안은 박동훈을 파멸시킬 정보를 얻기 위해 그의 핸드폰에 도청앱을 설치한다.

둔한 남자 박동훈은 장장 10화 분량이 넘어가도록 도청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지안은 눈으로 볼 때는 놀랐던 '인간 박동훈'에 대해 귀로 들어 알게 된다.

눈으로 봐야만 하는 겉모습은 한 인간에 대해 알아가기엔 적당하지 않다.

지안은 몰랐다.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이런 사람이 결국 '사람'이었다는 것을.

박동훈에 비할 바 없이 박복한 삶을 살아왔던 이지안은

그의 구질한 삶에서 구원을 얻고,

이지안의 어둠을 이해하지 못했던 박동훈은

그녀의 음험함으로 구원을 얻는다.

구원을 성당이나 불상에서 찾지 않고,

집안의 설거지통, 지긋지긋한 가족들, 결코 이해될 수 없었던 누군가에게서 찾아내기에

<나의 아저씨>는 위대하다.

누구나 알지만, 누구나 무시하는 삶의 아이러니.


결국 <나의 아저씨>는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아저씨의 자리,

하지만 그러지 못했던 이 세상 아저씨,

결국엔 되돌려 둔 아저씨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다.

때론 술을 사주거나,

너무 어려워 몰랐던 세상에 대해 알려주거나,

홀로 감당키 어려운 문제를 당연히도 돕거나,

이 가혹한 세상에서 '인간'으로 남기 위해 꾸역꾸역 버티는.


나는 <나의 아저씨>가 판타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판타지란 현실에서 포기한 것을 한번 저질러 보는 것이다.

<나의 아저씨>는 그렇게 무대책하지 않다.

오히려 박동훈처럼 신중하고 사려 깊게,

우리가 잃어버린 '바램'을 말한다.


우리가 한때 가졌지만 어느새 잃어버린 것,

그러나 다시 되찾을 수 있는 어떤 것.

우리가 이 드라마를 오래도록 기억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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