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untaetae Nov 06. 2022

문제는 복잡하고 어렵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읽고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갈라파고스. 


  학 때, 우연히 통일교육에 빠졌던 적이 있다. 통일 교양 수업을 들었는데 운 좋게도 교수님 눈에 들어 시작한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통일교육 동아리를 만들었고, 동아리 백두산 답사를 총괄하였으며, 학술서적도 발행하였다. 그것은 내 활동적 성향과 학문적 관심이 잘 들어맞았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통일 교육을 할 때엔 언제나(그것이 설령 초등학생이 아닌 대학생일지라도) 고민되는 지점이 있었다. 항상 같은 지점이었다. ‘우리는 지금-여기에 살고 있다’는 것. 바로 지금 여기 말이다. 우리는 지금-여기에 살며 밥을 먹고 용변을 보며, 학교에 가고 직장에 간다. 특별한 날에는 누군가와 함께 혹은 혼자 맛있는 것을 밖에 나가 사 먹기도 한다. 바다가 보고 싶으면 우리는 바다에 갈 수 있다. 

  우리의 일상은 너무나 확고하다. 흔들리지 않는다. 가령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내일 아침에 눈을 못 떠 콱 죽어버리면 어떡하지, 내일 바다에 가고 있는 도중 기차가 왼쪽으로 넘어지면 어떡하지 등의 고민을 잘하지 않는다. 정해진 틀 안에서의 일상이 존재한다는 이야기이다. 

  그것이 나를 힘들게 하였다. 분명 전라남도 해남 땅끝마을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는 학생과 민통선 너머 강원도 고성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는 학생의 시각은 차이가 있다. 함경북도 길주군에 사는 아이의 삶과 서울특별시 관악구에 사는 아이의 삶은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 

  일상이라는 쳇바퀴는 아주 견고하다. 아무리 북한의 실상이 냉혹하고 북한이 미사일을 몇 발이든 싸대도, 견고한 일상은 그 틈을 허용하지 않는다. 물론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네 현실 또한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경쟁, 한정된 자리의 수, 차디찬 결과…  



  하나의 물음으로부터 이 책은 출발한다. 그리고 끝맺는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에 따르면 책의 초판 연도인 1999년 기준, 120억의 인구가 먹고도 남을 식량이 생산되는데, 하루에 10만 명 그리고 5초에 한 명의 어린이가 굶주림으로 죽어간다고 한다. 비록 시간이 흐르긴 했어도 현재와 큰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단다. 여전히 많은 어린이가 굶주림에 시달리다 천천히 죽어간다고 한다. 

  세계의 절반이 죽어간다는 말, 그리고 부연의 설명들은 사실 잘 가늠되지 않는다. 머릿속으로 파악하기 힘든 수일뿐더러 물리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체감되지 않는다. 이는 마치 급식을 남기는 초등학교 3학년 학생에게 지긋이 나이가 드신 교장선생님께서 “나 때는 말이야.. 흰쌀밥에 고깃국 먹는 게 소원이었어” 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에 대해 학생은 말한다. “어머나 힘드셨겠어요. 다음부턴 안 남길게요” 물론 그 학생은 다음에 똑같이 남길 것임이 분명하다.

   현실은 생각보다 냉혹했다. 지금도 굶주리고 있는 아이들을 구하고 싶었다. 잉태될 때부터 그럴 운명이었던 이들이 너무나도 불쌍했다. 그렇다면, 해결하면 되지 않는가?  인구의 두 배가 넘는 식량이 있다면, 미국이 생산할 수 있는 곡물 잠재량만으로도 전 세계 사람들이 먹고살 수 있다면, 프랑스의 곡물 생산으로 유럽 전체가 먹고살 수 있다면, 해결하면 되지 않는가? 다 같이 잘 먹고 잘 사는 그런 세계를 만들면 되지 않는가? 

  그러나 이는 객관식 문제처럼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인과관계가 명확치 않다. 결과는 하나, 어쨌든 굶고 있다는 것인데 원인이 무수히도 많다. 결과를 바꾸려면 응당 원인을 바꾸어야 하는데 모든 것이 꼬이고 또 꼬여있다. 즉, 이 문제는 아주 어렵다.



  이 명제에 대해 그는 ‘금융자본’, ‘신자유주의’ 등을 답으로 꺼내 든다. 사실 이 둘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금융자본이란 ‘독점적인 거대 산업자본과 은행 자본이 결부함으로써 성립한 독점 자본’을 말한다. 산업과 은행이 결부되어 있다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 

  농업 기술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과거엔 백 명이 해야 했던 일을 지금은 몇 명이면 거뜬하다. 특히 종자의 개량, 기계 및 설비의 발전은 비교할 수 없는 생산량의 증대를 가져왔다. 이에 따라, 농업 계열에 종사하는 인구는 대폭 감소되었지만 우리는 과거에 비할 수 없는 풍요를 누리고 있다. 즉, 일은 비슷한 강도로(혹은 더 약하게) 할 것이지만 더 많은 것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최빈국과 개발도상국의 경우는 이와 매우 다르다. 그들 또한 일은 비슷한 강도로(혹은 더 열심히)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수입의 증가, 다시 말해 기아의 해소는 어림도 없다. 역설적이지 않은가? 분명 기술의 발전을 이루어 생산량의 증대를 이끌었는데, 어느 나라는 비교할 수 없이 풍요로워진 반면 어느 나라는 똑같거나 오히려 상황이 더 악화되었다. 그러한 갭(gap)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환장할 노릇이다. 

  부익부(富益富)에 방점을 찍을 필요가 있다. 물론 부자들 또한 비슷하게(혹은 더 약하게) 열심히 일하고 있을 것인데, 근대와 현재에 들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수입을 올리고 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자본주의가 있기에 가능하다. 첨단 기술과 세계화 현상이 있기에 가능하다. 

  장 지글러는 농업 원자재가 투기의 대상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대규모 투기 세력이 농업 원자재 거래소(ex. 시카고 곡물 거래소)로 몰려들어 가격 조정을 통해 차익을 보는 형식으로 천문학적인 이득을 얻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금융 자본은 몸집을 더더욱 키우고 있다. 가격 조정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사람은 당연히 정해진 가격에 힘들게 일한 농산물을 팔아야 하는 이들일 것이다.

  이는 유럽 연합 등의 선진국도 예외는 아니다. 2008년, 유럽 연합 국가들은 자국 농민들에 대한 생산 및 수출 보조금으로 3,490억 달러를 지출했다. 그 결과 과잉 생산이 이루어졌으며 보조금으로 인해 아프리카 농산물의 절반 혹은 3분의 1 가격에 유럽산 농산물을 살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를 지글러는 ‘덤핑 정책’이라고 하는데 이 또한 피해는 오늘 당장 농산물을 팔아야 한 끼를 먹을 수 있는 농민들이 고스란히 받을 것이다(p.36). 

  그러나 위의 내용의 것들을 불법이라 할 수 있는가? 매우 합법적인 것들이다. 이는 신자유주의에 따르면 오히려 합리적인 것이라 여겨진다. 신자유주의(시장원리주의)는 이윤 극대화를 최우선으로 한다. 그것이 곧 정의이고 선善이다. 경제 합리성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면 행위의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손해 보는 장사는 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 원리는 아주 냉혹해서 꼭 누군가는 손해를 보아야만 한다. 내가 이득을 보면 어떤 이는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주식의 구조는 신자유주의에 바탕을 둔다. 그렇다면, 누가 손해를 볼 것인가?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러나 만약 위의 내용만이 문제였다면, 그것은 해결하기 힘들지라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구조’의 문제가 등장한다. 우리는 심심치 않게 아프리카 모 국가에서 내전을 하고 있다고 듣는다. 사실이다. 정말 많이 싸운다. 내전은 많은 경우 ‘군벌’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진다. 외부의 도움을 받아 민주주의 선거가 이루어져 대통령을 선출한다 하여도 방심하면 안 된다. 언제나 그 자리를 탐내는 군벌 우두머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바뀌고 또 바뀌고 그런 형식이다. 

  설령 누군가 다양한 공격들을 이겨내고 안정적으로 장기 집권한다 하여도 그 정부는 대부분 부패의 길을 걷는다. 부패한 정부의 국민들은 당연히 신음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깨끗한 물을 먹을 수도, 글을 배울 수도, 아이를 건강하게 길러 평화로운 가정을 꾸릴 수도 없다.  

  어찌 보면 식량 지원에 있어 딜레마는 필연적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최빈국의 경우 내전을 하고 있거나 독재자가 부패한 정부를 이끌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비록 선의로 지원하는 것이 분명함에도 그 나쁜 놈들은 그 몫을 자신들의 세력 강화에 이용할 수 있다. 특히 북한처럼 굶고 있는 이들에 군인도 포함되어 있다면 이는 더욱 애매해진다. 똑같이 굶고 있음에도 군인 빼고 식량을 준다는 것은 어딘가 이상하다. ‘햇볕 정책’을 비롯한 식량 지원 계획은 이런 딜레마를 안고 있다. 

  


  그렇다면, 줄 것인가 말 것인가. 당연히 줘야 한다. 주지 않으면 그들은 굶어 죽는다.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한 이들을 위해 김정은이 생각을 바꿀 리가 없다. 세상은 그렇게 정의롭지도, 드라마틱하지도 않다. 그러나 형태를 바꿀 필요가 있다. 장 지글러는 3가지 대책을 내놓는다. 1) 인도적 지원의 효율화(사회적 효용성을 고려한), 2) 원조보다 개혁이 먼저, 3) 인프라 정비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들은 아주 강력함과 동시에 유혹적으로 들린다. 이것들이 실현되고 금융 자본 및 신자유주의 문제가 조금이라도 해결된다면 기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게 들린다. 하지만 명확한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론과 실천은 다르다. 실천을 위해선 모든 것들이 바뀌어야 한다. 뼈를 깎는 개혁이 필요하다. 

  희망으로 불타오르다가 다시 절망에 빠진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역시 참으로 힘든 일이다. 여기서, 지글러는 ‘인간성의 회복’을 주문한다. 역사는 도약하고 있다. 고대의 인간은 같은 가족, 씨족 시간이 흐른 후엔 마을, 국가 정도의 사람들에 대해 연대를 느꼈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이렇게 지구 건너편의 이들을 걱정하기도 하며 다른 나라 사람들의 참사를 알곤 슬픔에 빠지기도 한다. 한 사람의 한 발자국은 미약할지 모르나 전 세계 사람들이 모두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간다면 지금보다 분명 상황이 나아질 것임은 확실하다. 

  장 지글러는 에필로그를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정의에 대한 인간의 불굴의 의지 속에 존재한다.”와 파블로 네루다의 “그들은 모든 꽃들을 꺾어버릴 수는 있지만 결코 봄을 지배할 수는 없을 것이다.”라는 말로 끝맺는다. 



  다시 들어가며 말했던 통일교육으로 돌아와 본다. 통일과 북한의 실상은 나와 상관없는(이득을 주지 못하는) 일이고 나 자신의 일상에 치여 그것까지 관심 가질 수 있는 여력이 되지 않는다는 이들에게 나는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를 말했다(변종헌, 2016). 우리는 인간으로서 태어난 이상, 윤리적 존재로서의 책임을 가진다고. 어찌 고통받는 타인을 외면할 수 있느냐고. 우리 하나하나는 작지만 뭉치면 분명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우린 할 수 있다고. 


참고문헌

변종헌 (2016). 통일 필요성 논거의 윤리적 접근. 초등도덕교육, 53, 121- 146.

작가의 이전글 99년생이 바라본 <90년생이 온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