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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ntaetae Nov 26. 2022

답사 가본 적 있으신가요?

왜 답사를 가고 답사기를 쓰는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3, 유홍준, 창비. 

 

  입대날이었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어제 미리 싸놓았던 짐을 들고 출발했다. 충남의 우리 집에서 경기도 연천은 멀고 멀었다. 다른 곳을 가기 위해 지나치는 곳이었던 연천에서 나는 우렁쌈밥을 먹었다. 왠지 모르게 목이 막혀 잘 들어가지 않았다. 원래였음 싱싱한 배추에 쌈장을 덕지덕지 발라 먹었을 텐데. 

   그날 태어난 이래 가장 많이 머리를 빡빡 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을 보았다. 젊은 남자들은 하나같이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 다른 배경을 가졌다는 점이 문득 느껴졌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났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이곳에서의 하루는 분명 이곳 밖의 하루와 다르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반전(反轉)적 하루. 그것이 군대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었다. 

  답답했다.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상의 모든 것들은 내가 당연하게 누려왔던 것들이 자유였다는 점을 깨닫게 만들었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을 갈 자유,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자유, 내가 공부하고 싶은 것을 공부할 자유. 

  이곳에서 앞으로 오백 며칠을 더해야 한다니. 답답함에 답답함이 포개져 밀려왔다. 시간이 멈추지 않고 동일한 속도로 계속 흐를 것이란 사실을 경험적으로 너무도 잘 알고 있었지만, 대한민국의 많은 남자들이 동일한 경험을 하고 사회에서 자유롭게 자신을 꽃피우며 살고 있단 점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답답했다. 그중에서도 나는 이동의 자유를 갈망했다. 그 당연한 것은 생각보다 내게 중요한 것이었다. 


  그때 읽었던 책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3>이다. 


  이 책은 나로 하여금 잠시 잃었던 자유를 되찾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유홍준 교수님의 손에 이끌려 나는 이리저리 대한민국의 여러 곳을 쏘다닐 수 있었다. 사실 대학에서 사회과교육을 심화 전공하고, 철학을 좋아하는 지리학자인 지도교수님 아래서 지내며 자연스레 인문학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그로 인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여러 편을 나는 이미 읽은 적이 있었다. 그때에도 물론 좋았다. 정말 많이 배웠고 깊게 감동한 적도 여러 번이다. 

  하지만 신교대에서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조금 다른 차원이었다. 그전엔 공부 그 자체를 위해서였다. 글이 멋져 글의 모양을, 논리가 부드러워 그 구조를, 독창적 생각이라 그 생각을 배우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신교대에서의 읽음은 그런 이유가 없었다. 단지 나를 위해서였다. 

  글은 간략하게나마 내게 인상을 주었던 부분에 대해 뭉텅이로 소개함으로써 진행하려 한다. 이번 책은 특정한 지역을 중심으로 하지 않고, 그렇다고 특정한 테마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 서산, 서산마애삼존불

  ‘불교’는 우리의 고유한 신앙인가? 이에 대해 선뜻 ‘그렇다’라고 하긴 힘들어 보인다. 아마 ‘전통’ 신앙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린다 생각된다. 왜냐하면 불교의 창시자는 인도의 석가모니고 중국을 거쳐 우리네 고대 국가는 이를 수용했기 때문이다. 즉, 오래되었긴 하지만 그것을 고유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불교는 이교도들의 신앙물이라 비판되어왔다고 한다. 이 때문에 주체성이 상실되었다고 하며 말이다. 하지만 유홍준 교수는 이를 주체성의 상실이 아닌 ‘문화적 포용력의 개방성’으로 바라본다. 그에 따르면 불교미술은 결코 이교도들의 신앙물이 아니다. 우리 조상들이 살아온 방식의 정직한 표정이고 사상의 산물이다. 마치 중세 기독교 문화를 이스라엘의 아류라고 하지 않는 것처럼. 

  그는 “필요하면 얼마든지 갖다 쓰는 것”이라 말한다. 물론, 맹목적 모방인지 주체적 수용을 통한 재창조인지는 중요하다. 그래서 백제의 미학은 빛난다. 그들은 우리 고대 국가의 세련된 고전미를 창출해냈다. 인도, 중국, 일본에서 볼 수 없는 우리만의 독창적인 화강암의 건축과 조각들! 서산마애불의 잔잔한 ‘백제의 미소’는 그런 뜻이 서려 있다. 마애불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저 잔잔한 미소를 보내며 위로를 건넸을까.

(서산마애삼존불, 국가문화유산포털)


- 안동, 봉정사

  한옥은 마당을 가진다. 유홍준 교수는 우리 건축의 본질은 마당에 있다고 말한다. 마당을 눈여겨볼 줄 알 때 비로소 한옥을 제대로 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안동 봉정사엔 세 개의 마당이 있다. 대웅전, 극락전 그리고 영산암 마당이 그것이다. 그는 영산암 앞마당을 다음과 같이 사실묘사한다. “일부러 가산을 만들고 거기에 괴석과 굽은 향나무를 심고 여름꽃도 갖가지, 관상수도 갖가지다. 툇마루도 있고 누마루도 있고 넓은 정자마루도 있으며 뒤뜰로 이어지는 숨은 공간도 많다. 뭔가 부산스럽고 분주하면서 그런 가운데 질서와 묘미를 찾으려고 한 흔적이 역연하다.” 

  이는 기도처인 대웅전과 극락전의 정연한 앞마당과 비교했을 때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영산암 앞마당은 “일상의 편안함이 깃들어”있다. 어찌 보면 이는 당연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당연히 쓰임이 다르니 다른 마당을 갖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하며 말이다. 하지만 마당은 단순한 쓰임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에 대해 그는 건축가 승효상의 말을 빌려 설명한다. 우리의 전통음악에서 음과 음 사이, 전통회화에서는 여백을 더욱 소중하게 여겼던 것처럼 전통건축에서는 건물 자체보단 방과 방, 건물과 건물 사이를 중요하게 여겼다. 즉, 단일 건물보단 집합으로서의 건축적 조화를 위하여 집합의 중심이 되는 비워진 공간인 마당은 우리 건축의 가장 기본적 요소이자 개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서양의 집과 대립적 요소로 사용되었던 정원, 관상의 대상으로서 사용되던 일본의 정원과 차원을 달리한다. 결론적으로, “마당은 이처럼 건물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면서 또 유기적으로 분할하고 건물의 성격과 표정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p.129). 

  마당을 통해 우리는 건물의 성격과 표정을 읽어냄과 동시에 이 공간을 향유했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는 이 책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3>의 부제인 ‘말하지 않는 것과의 대화’ 임이 아닐까. 


(안동 봉정사 영산암 마당, 오마이뉴스)


- 공주, 공산성

  엄청난 문장이 있어 소개해본다. 비록 공산성 자체와의 관련은 없지만 심금을 울렸기에 옮긴다. 조선초 대문장가 서거정은 공주 관아의 정자에 ‘취원루(聚遠樓)’라는 현판을 붙이고 그 이유를 <공주 취원루기>에서 말했다. 

  “누각을 세우는 것은 다만 놀고 구경하자는 뜻만이 아니다. 이 누각에 오르는 사람으로 하여금 들판을 바라보면서 농사의 어려움을 생각해보게 하고, 민가를 바라보면서는 민생의 고통을 알게 하며, 나루터와 다리를 볼 때에는 어찌하면 내를 잘 건너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정치가 그렇게 원만하기를 기대해보고), 나그네를 바라볼 때는 어찌하면 기꺼이 들판으로 나오기를 원하게 할 것인가를 궁리하며, 곤궁한 백성들의 생업이 한두 가지가 아님을 보면서 죽은 자를 애도하고, 추운 자를 따스하게 해 줄 것을 생각하게 한다. 산천초목과 새, 짐승, 물고기에 이르기까지도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리니 이는 멀리 있는 사물에서 얻어낸 것을 누각에서 모으고, 누각에서 모은 바를 다시 마음에 모아서, 이 마음이 항상 주가 되게 한다면 이 누각을 취원루라고 이름 지은 참뜻에 가까울 것이요 목민자의 책임과도 멀지 않으리라.”

  앞으로 정자에 오를 때마다 이 구절이 떠오를 것 같다. 멀리 있다는 것이 모으지 못할 이유가 되진 않는다. 


  유홍준 교수는 미학자이다. 그는 역사학이나 지리학을 전공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노라면 미학 평론을 읽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객관적 분석과 주관적 감상이 조화를 이루는. 하나의 그림에 대한 그런 거 말이다. 하지만 그의 글에 분석과 감상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미학’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다양한 것이 있을 수 있다.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현대미술 작품에 대해 어려운 철학 용어를 써가며 설명하는 그런 것, 혹은 미술의 역사에 대한 길고 방대한 내용의 것 등이 있다. 그렇다면 ‘미(美)적인 것’라는 단어에 대해선 무엇이 떠오르는가? 많은 이들이 예쁘고 멋진 것들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위의 떠오름 들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지만 미학과 미적인 것에 대해 좁게 바라보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17세기, 칸트에 의해 자아와 대상이 확연히 구분되고 대상은 자아에 의해 경험되어야 할 대상 그 자체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러며 우리의 감각들 중 가장 강력한 ‘시각’은 그전보다 더욱 중요하게 여겨지게 된다. 다시 말해, 시각을 중심으로 대상으로서의 작품을 감상하고 미추판단에 의해 그것의 쓸모를 가려내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미학’은 순수하고, 일반적이지 않은 특별한 것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접할 때 시각 이외의 감각 또한 사용하는 것은 분명하다. 감각뿐만이 아니다. 감성과 이성도 사용하는데, 이때 감성만을, 혹은 이성만을 사용하는 것 또한 아니다. 즉, 아름다움에 대한 학문인 미학을 단순히 미술 작품에 대한 시각적 판단 속에 가둘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미적인 것’은 단순히 시각적으로 예쁘고 멋진 것을 너머 조금 더 총체적인, 아름다움에 관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아름다움에 대해 더욱 자세하게 논의하며 글을 아름답게 끝내면 좋겠지만, 나에겐 그럴 여력과 실력이 없다. 그러나 분명하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있다. 아름다움은 우리네 삶과 긴밀히 연관되어있다는 것이다. 답사를 간다는 것은 단순히 유적이 오래되었다거나 독특하고 예뻐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과학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성장을 이루고 더 나아가 나와 우리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에 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답사의 이유는 ‘나아감’에 있다. 이 책을 통해 유홍준 교수가 말하고자 했던 것 중 하나는 ‘당신이 어떤 공간에 있더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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