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었으면 하는 '님'
마음을 다잡고 다잡고 다잡고 또 다잡는다. 부탁하고 부탁하고 또 부탁한다.
이 정도 했으면 적당히 할 법도 한데, 남편이라는 인간은 꿈쩍도 않는다.
지난 주 주말에 시댁에 다녀오면서 라하 자동차 장난감을 트렁크에 두고 꺼내오지 못했다. 돌아온 다음 날 부터 계속 매일 "그 자동차 좀 꺼내다 줘"라고 암만 부탁해도 일주일이 꽉 차도록 매번 "아 까먹었다. 저녁에 꺼내올게"다. 어째서 "아, 까먹었다. 지금 가져올게"가 안 되는건지 이해는 안되지만, 나는 지금 당장 애 먹이고, 씻기고, 기저귀를 갈고, 또 이유식을 준비하고, 애가 놀고 어지른 거실을 청소해야하고, 빨래를 개고, 세탁기를 돌려야 하기 때문에 차마 그것까지 "내가 할게!"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게다가 집 밖에 나갈 틈이 없는 나와는 달리, 그는 담배피러 밖에 수시로 나가지 않는가.
온 세상 피곤함은 죄다 본인 것인지 퇴근하면 입버릇처럼 '피곤해'. 늘 퇴근하면서 '피곤해' 혹은 주식얘기 말고는 할 줄 모르는 이 바깥양반의 회사생활의 고됨을 이해해 보고자, 오늘도 어제도 나는 '오늘은 내가 마음을 잘 붙들고, 힘들어도 밝게 웃으면서 퇴근하는 신랑을 맞이해 줘야지!'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팔다리에 붕대를 감고 보호대를 착용하고 물리치료를 받으러 다니는 아내가 하루 종일 애 보면서 쓰러지기 직전까지 힘들었어도 밝게 웃으며 퇴근하는 신랑을 반기기 위해 얼마나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있는지 상상도 못하는 이 남편은 여전히 '아, 피곤해'로 응대한다. 나의 각고의 노력도 무의미해지는 순간이다.
내가 애 목욕시키는 동안 설거지를 부탁해도 "이것만 하고 나중에 할게." 퇴근하고 피곤하다고 방에 들어가서 꿈쩍을 안 해도 혼자 애를 보면서 참고 또 참는데도 본인 피곤한 사정만 눈에 들어오는가 보다. 피곤해서 방에서 쓰러져 있나 싶어서 들어가 보면, 게임을 하거나 유튜브를 보거나 TV를 보거나 주식방송을 보거나 중 하나다. 그렇게 피곤하다면서도 밤 늦도록 유튜브를 보고, 게임을 하고, 주식방송을 본다. 그러면서도 나의 피로가 '애 잘 때 자지 않아서'라고 하는 양면성을 보인다. 나는 뭐 내 개인 생활도 못 즐기는 보모니?
이번주 내내 피곤해 했다. 재택근무를 하면서도, 틈새 틈새 산책도 다녀오면서도 그는 그렇게 내내 피곤해 했다. 어제는 출근을 했는데, 퇴근하면서 "오늘은 간만에 출근했더니 정말 피곤해서 그런데 물리치료 다음에 가면 안돼?"라고 하기에 물리치료 일정도 바꿨다. 그리고 저녁식사시간까지 계속 나는 쉬지않고 애를 봤다. 저녁식사 후에도 나는 애를 씻기고, 재우고... 그제서야 하루가 끝났다. 설거지도 다 하고 식탁도 치워놓은 후에, 저녁에 생긴 애기 젖병만이라도 그에게 씻어 달라고 부탁했건만. "나중에 꼭 할게"라고 하고는 쓰레기도 안 버리고(마당까지는 또 내가 다 내다놨다), 부탁한 설거지는 새벽에 방에 들어오더니 "오늘은 내가 너무 피곤하니까 내일 아침에 할게"라며 미안하시단다.
그리고 그는 오늘도 내내 피곤하시단다. 나는 피곤하지 않은 철인이라도 된단 말인가? 오죽 몸이 아프면 어깨에는 염증이 석회가 되어서 통증이 있고, 어깨 근육이 탈구가 되고, 팔꿈찌도 손목도 허리도 통증 때문에 물리치료를 받고, 발목은 갑자기 인대 파열이 온 건지 왜 떠올리지를 못하는 걸까. 매번 "아프면 쉬어. 내가 할게" 말은 참 잘 한다. 어디 나가서도 늘 그런 말은 참 잘 한다. "내가 집안 일은 다 하지" 거기에서 '다'는 '내가 피곤하지 않으면'이라는 말이 생략된 것이었을까?
결국, 밀린 설거지는 오늘 저녁식사때까지 그대로 남아서 결국 내가 했다. 이 시점에서 결국 나는 폭발했다. 지긋지긋한 이 남편이 차라리 '남'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 질긴 인연을 가위로 싹둑 잘라서 "우리 따로 살아"라고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속 시원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