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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락교 Nov 15. 2020

나답게 산다는 것

가치에 헌신하는 삶

<나다운 삶. 시대적 가치>

우리는 흔히 가수들을 두고 ‘시대를 노래하는 자’라고 표현한다. 이는 노래가 대중이 추구하는 일련의 가치와 맞닿아있으며, 또 맞닿아있어야 함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가요를 본다면 1020 세대가 추구하는 가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젊은 세대가 추구하는 가치란 단연 ‘나다운 삶’이다. 대표적으로 BTS, ITZY, 마마무 등의 아이돌 그룹이 음원 시장에 내놓은 노래들이 그러하다. BTS가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데는 음악 자체가 흥미롭고 세련되기 때문일 수 있지만, 가사 안에 ‘Love your self’라는 메시지가 담겨있음을 무시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ITZY의 ‘wannabe’는 타인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이기적으로 보일지라도 자기답게 살아보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그리고 마마무의 ‘WANNA BE MYSELF’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즉, “나를 굳이 타인의 기준에 맞추지 않아도 문제없어!”가 오늘날 젊은이들이 추구하는 삶의 한 측면인 것이다.      


"누가 뭐라 해도 난 나야
난 그냥 내가 되고 싶어 (I wanna be me, me, me)
굳이 뭔가 될 필요는 없어
난 그냥 나일 때 완벽하니까"

ITZY – wannabe 中     


<나다운 삶과 얽혀있는 사회 현상과 갈등>

어쩌면 현재 사회문제로 드러나는 수많은 이슈의 중심에는 ‘나답게’ 살길 원하는 근본 욕구가 자리 잡고 있을 수 있다. 이를테면 ‘꼰대’는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이 응축된 단어로서, 젊은이들이 나다운 삶을 추구하는 데서 비롯된 반작용일 수 있다. 회사에 충성하느라 가정에 소홀한 부모, 자신이 살아온 삶의 형식을 강요하는 어른, 어른에 대한 예의범절과 복종을 강요하는 어른, 시도 때도 없이 쏟아내는 잔소리와 조언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들이 가하는 제약에 복종하기에는 나답지 않다는 것. ‘페미니즘’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없다는 것, 또는 더 큰 노력을 쏟아야 한다는 점이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그 밖에도 개인과 개인이 갈등하고, 조언이나 충고가 오히려 관계를 악화시키고, 특정한 라이프스타일을 요구할 수 없는 경향들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남들과 다른 고유하고도 유일한 존재인데, 이 사회는 왜 나를 그들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로 만들려는가?”     


<나다운 삶, 또 다른 이름>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현상은 비단 2020년 지금에서야 갑자기 출현한 현상일까? 그렇지 않다. 이미 서구사회에서는 사상가들과 사회운동가들의 지적 저항으로 표출된 바 있다. 키에르케고르, 사르트르, 하이데거로 대표되는 실존주의 사상의 어떤 핵심적 단어는 ‘실존, 주체성, 독립성, 반복 불가한 인간 존재, 결단 등’을 꼽을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주체성이 진리’,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등의 명제가 있다. 그들의 주장은 한마디로 ‘한 개인의 삶은 그 자신의 몫으로 온전히 남겨있다는 것’이다. 이제 한 인간, 곧 개인은 스스로 결단하고 책임지는 존재가 되었다. 한 인간은 단 한 번의 탄생과 죽음을 경험하며, 그의 삶은 반복되지 않고 유일하기에 ‘나는 다른 사람의 가면과 옷을 걸치고 부자연스럽게 살 수 없다.’      


<나다운 삶, 그 실천의 어려움>

그렇다면 이미 오래전부터 논의되고, 서구사회를 사로잡은 지성적 경향이 왜 지금 한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것일까? 이는 어쩌면 나답게 사는 일이 대단히 실천하기 어려우며, 큰 용기가 필요한 그 무엇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즉, 모두가 자기의 실존에 걸맞은 삶을 추구하며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주장이 실현되기 어려운 일종의 이상향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 사람들은 지금에 와서야 그 필요성을 진지하게 깨닫고, 자기 다운 삶을 비로소 갈망하고 있다. 그와 더불어 사회가 더 이상 개인의 삶과 직접 연결되기 어려워진 이유도 있을 것이다. 저성장, 취업난, 기업의 해고, 평생직장 개념의 붕괴, 워라벨 추구 등. 이제 사람들은 나의 욕구를 포기하고 사회와 조직의 이익을 위해 사는 일이 더는 유효하지 않음을 깨달아버렸다. ‘헌신하다 헌신짝 된다’는 말보다 동시대의 조직과 개인의 관계를 더 잘 설명하는 말이 있을까?

  (물론, 모두가 알다시피 본래 대한민국 사회는 개인주의를 이기주의와 혼동 또는 혼용하여 사용할 정도로 개인보다 집단을 강조하는 경향이 짙다. 한국에서 태어난 아이는 출생과 동시에 그가 살아가야 할 이상적인(?) 길이 사회에 의해, 또 사회적 요구를 충실히 내면화한 부모에 미리 정해진다. 영어유치원, 사립학교, 영재학교, 과학고, 명문대, 대기업, 공기업, 결혼 등. 우리는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이 단어들이 한국 사회에서 의미하는 바를 단숨에 알 수 있으며, 이 단어가 하나의 힘으로서 국민 개개인에게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렇듯 삶의 형식이 정해져 있고, 그것에 순응하기를 강요하는 사회에서 개인은 자기답게 살기 대단히 어렵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주위에서 자기답게 살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현실을 한탄하는 사례를 많이 관찰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나답게 살 수 있는가? 나답게 산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나다운 삶? 경제생활?>

많은 이들이 나다운 삶을 희망하지만, 구체적으로 나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 과연 나다운 삶이 ‘원하는 직업에 종사하며, 원하는 물건을 구매하고, 원하는 집에서, 원하는 사람과 어울리고, 원하는 음식을 먹고, 원하는 곳으로 여행하는 일’ 등을 의미할까? 생각보다 나다운 삶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위에 서술한 내용을 뒤집어보면 이는 어쩌면 ‘자본주의에 충실한 노예적 삶’ 일 수도 있다. 온갖 광고와 미디어에서 떠들어대는 것들에 현혹되어, 그것이 외부로부터 유도된 필요성인지도 모르고 자신의 고유한 욕구인 양 생각하며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위의 사안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욕구하는 것을 따라 사는 일은 어딘가 불편하고, 꽤 불만족스럽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나 자신을 찾는다며 해외여행을 떠난다. SNS에서 일러주는 관광지와 맛집을 방문하고, 사진을 찍고, 사치스러운 호텔에 머물고, 나에게 주는 선물로 쇼핑을 즐긴다. 여행 당시에는 너무도 즐겁고, 힘겨운 일상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맛보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급격히 우울해지며 또다시 나다운 삶을 찾아야 한다고 외친다. 그러나 관광과 소비는 본래 즐거운 것으로서, 그것은 나의 고유한 것이라기보다는 인류 전체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사항이다. 내가 아니라 그 누구를 그 장소와 일정에 가져다 두어도 그는 마찬가지로 즐겁고 만족스러울 것이다. 그렇다면 관광과 소비는 ‘나다운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그런 것’ 일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나답다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내 안에서 샘솟은 욕구도 내 것이 아니라면, 무엇을 충족시켜야 만족할 것인가?      


"나다운 삶이란 음식, 쇼핑, 여행, 직장 등의 이미 주어진-현실적 조건 속에서 나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제한적 선택과 소비 행위가 아니다. 나답게 산다는 것은 가치를 추구하는 삶과 긴밀히 연결된다."


<나다운 것, 개인적인 것>

(여기서는 조금은 복잡한 얘기를 해보려고 한다. 건너뛰어도 좋다.) 사실 나답다는 말은 과거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던 사고방식이었다. 서양의 역사를 살펴본다면, 개인으로서의 나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은 18세기 이후의 일이다. 그럼 18세기 이전에 인간들은 무엇이었냐고 묻는다면, 교회와 전제군주의 지배 아래 놓인 수동적 존재 혹은 피지배자였다. 쉽게 설명해보자. 군대에서 군인으로 존재할 때 그 구성원들은 개인으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물론 여기에서 '나'라는 사람은 존재한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나'는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정해진 규칙에 맞게 수동적으로 움직이며 살아가는 존재이지,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인간이 아닌 것이다. 엄밀히 말해 군인으로서의 나는 나답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군인답게' 살아간다. 왜냐하면, 군대라는 조직의 집단적 강제력(처벌)이 매우 강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교회와 전제군주 아래 놓인 이들에게는 그들이 따라야 할 규범과 삶의 형식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피지배자답게' 그것을 충실히 따르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달라져버린다. 교회와 절대왕정이 무너지고, 그러한 삶의 형식이 거부되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이 등장한 시민 계급은 지배와 복종의 개념을 버리고 '자유롭기에 평등한 개인(J.-J. Rousseau)'들이 연결되는 형식의 사회를 이룩하고자 한다. 누군가 하루 일과를 정해주지도 않고, 삶의 규범을 강요하지도 않는다면? 사람들은 누군가의 지배를 받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사유하고, 선택하고, 책임지는 존재'가 되어야만 했다. (물론, 현대적 의미에서의 개인이라기보다는 개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18세기가 이성을 중심으로 하는 계몽의 시대라고 불리는 이유는 모든 개인들이 자신에게 본래 주어진 이성적 능력을 개발시켜서 스스로 사유할 줄 알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교육의 기회 역시도 확장되었다.



<나답게 살고 싶다면, 스스로 사유하고, 선택하고 책임질 것!>

나답게 사는 일은 편한 길이라기보다는 불안하고 어려운 길이다. 왜냐하면, 자유의 길이기 때문이다. 위 내용을 쉽게 말하면 이런 것이다. '특정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시키는 대로 살래?' 아니면, '스스로 생각하고 책임지며 살래?' 전자는 자유를 내려놓는 대가로 속 편하게 사는 것이고, 후자는 불편하지만 자유롭게 사는 것이다. 물론, 전자가 포기하는 것이 자유라는 점에서 한 없이 속 편한 일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자유가 없다면 목숨조차 짐이 되기 때문이다(J.-J. Rousseau)."



이런 질문들을 결론으로 던지며 글을 줄이고자 한다.


당신은 지금 살아 숨 쉬며 감각하고 사유하는 '나'라는 존재로 태어났다.

'어떤 조직의 일개 구성원으로 둘 것 인가?' 아니면 '조직에는 속하지만 그것과는 구별되는 고유한 개성을 느끼고 표현하도록 이끌 것인가?'

'국가와 사회가 제시하는 가치(취업, 성공, 부유함, 큰 집, 고급 승용차 등)를 삶의 목적으로 둘 것인가?' 아니면 '나에게 꼭 필요하고 의미 있는 삶을 현실에서 실현하기 위해 노력할 것인가'

'현실에서 누군가의 입맛대로 조정해 놓은 가치의 표현방식에 따라 살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특정 가치의 본질을 묻고, 스스로 그것을 정의하며 나의 삶의 맥락에 맞게 독창적으로 표현하며 살 것인가?'

'이익에 매몰되어 홀로 살 것인가?' 아니면 '나답게 희생하고 베풀며 더불어 살 것인가?'

'여성과 남성에게 주어진 역할에 갇혀 살 것인가?' 아니면 '여성과 남성의 다름을 고려하면서도 성별에 갇히지 않는 나의 고유함을 발견할 것인가?'

'법과 처벌을 두려워하는 객체로 살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옳음에 대해 사유하고 실천하며 책임지는 도덕적 주체로 살아갈 것인가?'

'남들이 그렇다고 하는 일에 휩쓸릴 것인가?' 아니면 '시대의 경향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오히려 거슬러 올라갈 것인가'

'백성이자 군인으로 복종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자 나로 사유하며 살 것인가'


나답게 산다는 것은 "삶에 대해 그 누구보다 진지해지는 일이고, 한없이 숭고한 가치를 짊어지는 것이며, 세상과 다른 길을 걷는 일이고, 용사가 되는 일이다. 그러나 그 결과로 얻는 삶은 그 누구보다 경쾌하고, 가벼우며, 세상이 필요로 하고, 어린 아이와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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