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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설한장 Nov 14. 2022

주간 씀 모음 20

태평함


  점심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렸지만, 하나는 여전히 운동장 구석에 있는 벤치에 누워 있었다. 시끄러운 종소리 같은 건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저 천연덕스러운 태평함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나는 하나를 볼 때마다 늘 그런 의문을 품었지만, 답을 얻을 날은 요원해 보였다.

  “야, 저거 좀 봐. 포도 같지 않아? 아니, 사과인가?”

  누워서 뭘 하나 했더니, 하늘에 떠다니는 하얀 과일에 한창 빠져있는 모양이었다. 어서 교실로 들어가자고 재촉해야 했지만, 당당한 그녀의 태도 덕분일까. 안 하느니만 못한 허망한 말처럼 느껴졌다. 멍하니 떠가는 구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없애다


  이름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다. 이름에는 사람의 혼이 깃든다, 와 같은 주술적인 말은 썩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름에는 확실히 무언가가 담겨 있다.

  그렇기에 공책에 남아 있는 네 이름을 지워 없앴다. 마치 그렇게 하면 너와 관련된 모든 걸 지울 수 있다는 듯이.



강물


  강물은 잔잔하지만 힘 있게 흘렀다. 한강 다리 중간에서 서은은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찔한 높이였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 난간 너머로 몸이 넘어갈 것 같았다. 공포가 피부 밑에서 움찔거렸다. 서은은 그 감정을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곳은 그녀가 매일 오는 장소였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서은은 그저 이곳에 서서 강물 아래로 몸을 던지는 상상을 했다. 그리곤 그 발끝이 저려오는 공포를 곱씹으며, 다시 분주한 사회 속으로 돌아갔다.

  언젠가 이 공포감이 사라지는 날이 올까. 서은은 강물을 보며 늘 그런 생각을 한다. 그리고 왠지 그날이 오면 자신은 강물을 향해 뛰어내려야 할 것 같다고, 어렴풋이 상상한다. 그것을 그녀가 바라고 있는지는 그녀 자신도, 흐르는 강물도 모르는 일이었다.



경계선


  그런 날이 있다. 언뜻 보면 평소와 크게 다를 것 없고, 무언가 특별한 일 하나 없는 평범한 하루. 모든 것이 지금까지 그래왔던대로 존재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 분명한 시기. 당신은 그저 평소 하던 대로 시간을 보냈으리라. 익숙하고, 무료하게. 기억에 무엇 하나 제대로 남기지 않고 그런 날은 지나간다.

  그러나 때로는 그런 날이 인생의 경계선이 되는 경우가 있다.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하지만, 후에 돌이켜 생각해보면 확연히 알게 된다. 그럴 때면 우리는, 낮과 밤이 한순간에 뒤집힐 정도로 인생이 극명하게 갈리는 그 경계선을 제대로 깨닫지도 못한 채 지나쳤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하며 실망감을 표출하곤 한다. 당신도 분명 그랬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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