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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설한장 Dec 19. 2022

주간 씀 모음 23

이끌다


  삶을 이끌어갈 자신이 되어 있느냐고, 누군가 물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는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시간을 좀 더 달라고 소리칠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결국엔 준비가 되지 않은 채 삶에 내던져질 것이다. 그런 각오는 미리 해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삶은 나를 이끌었다. 처음엔 모두가 그랬듯이, 나는 끌려갔다. 하지만 이 지난한 과정 속에서도 선택의 순간은 찾아온다. 그때는 그 어떤 나약함도 도움이 되지 않으며, 잔인하리만치 냉혹한 결정을 내려야 함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누가 무엇을 이끌어갈지. 하찮은 이 손과 발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구석


  지금도 세상의 구석에서 네가 살고 있듯이, 그 변함없는 하루를 아쉬워하며 보내고 있듯이, 우리도 여기에 있어.

  그러니까 괜찮아. 네가 하는 일이 아무리 세속적인 것이더라도, 누군가에겐 하찮은 일로 보이는 것이더라도, 엄격한 도덕적 잣대에 어긋나는 것이더라도.

  우리는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어. 네가 만든 것을 보며 가벼운 웃음을 누리는 사람들이, 또 한 주를 살아갈 힘을 얻는 사람들이. 그리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설렘을 즐길 줄 아는 사림들이.

  이 넓은 세상 한구석에서, 늘.



흔적도 없이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손도, 발도, 따듯해 보였던 옷도. 분명 조금 전까지 내 눈앞에 있었는데, 하는 생각을 떠올렸을 즈음엔 이미 모든 것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입에서 무슨 맛이 느껴졌다. 손가락을 가져다 대니 붉은 액체가 보였다. 그 액체는 눈 덮인 하얀 대지에 점을 찍으며 네가 있던 자리에 이어져 있었다. 눈이 살짝 녹아 있는 그 자리에 붉은빛이 점점 모여 방울을 만들고 있었다.

  그건 끔찍한 광경이었다. 물론 소복이 쌓인 눈은 끔찍하지 않았다. 붉은 액체도, 혀도, 손가락도, 전혀 끔찍하지 않았다.

  끔찍한 것은 바로 그 아름다움이었다. 그리고 달콤함이었다. 이 기분, 끝없이 몸이 해체되고 다시 재조립되는 듯한 감각을 나는 어찌해야 할까.

  겨울 밤보다 더 깊고 어두운 시간을 나는 보내고 있는 것이다.



주말


  “주말에 뭐 해요?”

  동그란 눈동자가 날 보며 그렇게 물었을 때, 결국 내가 답할 말는 하나밖에 없었음에도 나는 망설였다. 우리가 힘을 모아 추억을 쌓아 올렸던 그 건물이 하룻밤 새 처참한 잔해만 남기고 사라졌듯이, 우리의 모든 관계도 그렇게 될까 봐.

  “저번에 못 갔었던 그 가게, 이번에 가보는 거 어때요? 그때, 고기가 엄청 맛있어 보인다고 했었잖아요.”

  평소처럼 명랑한 어조로 말을 건네는 너 역시 이런 불안을 품고 있을까. 그렇기에 더욱 명랑함을 가장하며 한시 빨리 즐거웠던 그 일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걸까.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모든 것이 무의미한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결국 우리는 이 두 손으로 잔해를 치우고 정원을 가꾸어야 하기에.

  그게 이곳의 삶임을 나는 배웠던 것이다.



뭐든


  나는 네가 뭐든 했으면 좋겠어.

  지금까지 푹 쉬었잖아. 그렇지?

  학교에서, 대학에서, 회사에서. 너는 늘 바쁘게 살았지만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 너 스스로 내게 고백하듯 말해주었던 것처럼 말이야. 세상이 만든 시계에 맞춰 많은 일을 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 숨기고 있는 열정은 조금도 드러낸 적이 없었지.

  이제 시간이 없어. 네가 지금처럼 열정을 숨긴 채 쉬고만 있는다면, 곧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게 될 거야. 우주의 나이만큼이나 긴 시간도 잠자고 있는 바위 앞에서는 찰나에 불과할 뿐이니까. 알고 있지? 그건 절대로 스스로 굴러가지 않아.

  부디 네가 잠에서 깨어나길. 그리고 귓가에서 속삭이는 편안함을 떨쳐낼 수 있기를. 내가 줄곧 여기서 응원하고 있을 테니까. 힘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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