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직전까지 무시당했던 과학자의 그녀(헤디 라마)
“사람들은 내가 얼굴이 예뻐서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남들에게 나도 머리가 있다고 믿게 하려면 남들보다 두 배는 더 열심히 일해야 했죠.”
이는 “헤디 라마(Hedy Lamarr, 1914~2000)”라는 할리우드 배우가 한 말이다. 그는 1940년대 당시 가장 아름다운 여성으로 뽑혔으며 ‘삼손과 델릴라’에서 데릴라 役을 맡았던 유명한 배우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진정한 자신의 능력과 가치가 빛을 발하지 못했다면서 스스로 외모를 비하 했었다.
1940년대의 할리우드는 배우들에게 성(性)의 고정적인 이미지만을 강요했고, 그로 인해 헤디의 관능적인 외모만을 부각하여 성적으로 대상화시켰으며, 그 이외의 것은 전혀 주목받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영화인으로서의 능력이 뛰어났지만, 그에 못지않게 발명가로서의 재능도 뛰어났었다. 그녀의 업적으로 현대사회에서 흔히 쓰는 ‘와이파이’와 블루투스의 핵심기술인 ‘주파수 도약 스펙트럼’의 발명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발명가로서 별로 주목받지 못했으니 영화인으로서의 명성은 그가 발명가로서 이룬 업적과 성과를 감추고 드러내지 못하도록 종용했음을 알 수 있다.
“아버지는 제 꿈을 꽉 붙잡으라고 하시면서 격려해 주시고 붙잡을 수 있으면, 그 꿈은 이루어질 거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과학적 재능을 믿어주신 아버지를 이렇게 회상했었다.
그녀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제국에서 은행가였던 아버지와 부다페스트 출신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어린 시절 발레나 피아노를 배우는 전형적인 당대 부유층 유대인 자재답게 성장하였으며, 틈만 나면 시계나 기계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분해하고 조립하는 등 과학과 공학에 대한 소질이 남달랐다.
헤디 라마가 19세 때에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화 “엑스터시”에 출연하여 파격적인 노출과 관능적인 소재로 영화계에 큰 충격을 주기도 하였는데, 이 영화에서 그녀는 당시 보수적 풍조를 비웃기라도 한 듯 최고의 오르가즘 연기를 선보였지만, 사회적인 파장이 엄청났다. 그 후 이 영화는 남편에 의해 가위질당했다.
그녀의 첫 번째 남편인 “프리드리히 만들”은 그녀보다 13세 연상으로 무기상이었다. 그녀는 결혼하여 감옥 같은 저택에서 살았지만, 보수적이며 나치 옹호주의자인 남편에 의해 집에 갇혀 살게 되었다. 틈틈이 남편에게 허락받아 무기상들의 사교 모임에 참여하여 무기 발명가, 공학도 등과의 진지한 토론을 즐기었으며, 이를 통해 공학적인 상상력을 키워나갔다.
그후 남편과 잦은 충돌로 그녀는 저택에서 탈출하고 난 후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뒤 그와 이혼하고 대서양을 횡단하는 여객선에서 미국인 영화 제작자를 만나 할리우드에 진출하게 되었다, 그 후 영화계를 점령하였지만 1940년대의 할리우드는 오직 그녀를 관능적인 여성의 모습으로만 대상화하였으며 그 이외의 것은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0년, 독일이 영국의 선박에 어뢰를 공격하여 83명의 어린이를 포함해 300여 명이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러한 뉴스를 접한 헤디 라마는 연합군의 승리를 돕기로 하고 그녀의 친구이자 조력자인 작곡가 조지 앤타일의 도움으로 원격조종 어뢰 연구에 착수하였다. 당시 어뢰는 주파수를 활용한 무선통신 방식으로 제어했다. 즉 하나의 주파수로만 산호를 전달하면 적이 주파수를 찾아내서 교란하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고자 여러 개의 주파수를 바꿔가면서 송신하여 적의 전파 교란을 피하고자 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이 기술이 바로 “주파수 도약 기술 (Frequency Hopping)" 이었다.
1941년 미연방 특허청에 이 기술을 출원하였고, 1942년 특허로 등록되었지만, 헤디 라마의 국적인 오스트리아가 적국이라는 이유로 특허가 몰수당했다.
당시 어린 여배우가 무슨 국가안보에 관련된 발명이냐며 군인들을 위한 영화를 찍거나 전쟁채권을 파는 데 도움이 되는 홍보활동을 강요받았다. 그 기술은 국가에 빼앗기고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사망 후에 비로소 인정을 받았다.
그녀가 발명한 주파수 도약기술은 휴대전화에 사용되는 CDMA(부호분할다중접속)의 근간 기술로 와이파이, 블루투스, GPS 등 오늘날 무선통신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1997년 미국전 자 개척재단(EFF)은 그녀에게 개척자상을 수여하였다. 또한 2014년 국립발명가협회 명예의 전당에 오르기도 하였다.
“그녀(헤디 라마)가 없었다면, 구글도 없었다.”
무선통신 기술의 최대 수혜자 중 하나인 구글은 2015년 헤디 라마 탄생 101주년 헌정 영상에서 그녀에게 이렇게 추모하였다.
만약 현대사회에 그녀가 살았다면 그녀는 화려함으로 관철되는 영화배우와 과학자라는 직업을 잘 수행하고 사회에 인정을 받았을까? 나는 ‘yes’라는 대답을 하기 힘들 듯하다. 왜냐하면 아직 우리 사회도 화려함과 두뇌라는 그 연결고리를 인정하는 문화는 완성되지 않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인간의 본연 자체로서 수용하고 인정해 주는 문화가 되도록 더욱 더 노력해야 할 듯하다.
그 당시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가 아니라 자신이 가진 특별한 것, 내면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싶어 했던 것 같다. 평소 외모가 아닌 두뇌에 관심이 많다고 말하던 그녀이기에 평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남들보다 더 큰 노력을 한 덕분에 현재의 우리는 어쩌면 더 편리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녀가 타고나 외모 꾸미기에 집착하여 자신의 재능을 게을리했다면, 어쩌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편리함을 활용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고민하고 탐구해야 하는 삶의 과정에서 사람을 외모로만 평가하고 그런 외부의 시선에, 과한 신경을 쓴다면, 긍정적인 삶의 신호는 점차 희미해지지는 않을까 생각해 본다.
오늘은 헤디 라마의 영화 “삼손과 델릴라”라는 영화를 휴대전화로 다운받아서 보고 싶은 맘이 든다. 그녀를 추모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