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초희’, 그녀는 누구일까요?
‘허초희’, 그녀는 누구일까요?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봄 직한 이름으로 그녀는 ‘허난설헌’의 본명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누이이며, 우리나라 여류문장가이자 천재 시인이기도 하다. 그녀는 강릉의 유지인 아버지 ‘허엽’의 외동딸로서 이미 8세 때 신선 이야기에 나오는 달(月)의 광한전에 백옥루를 짓는다고 상상하고 그 건물의 상량문을 쓴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이라는 문장을 지어 신동으로 소문이 났었다.
그녀의 천재성은 타고났지만, 조선시대의 남존여비 사상이 심한 시대였는데, 그녀의 아버지 ‘허엽’은 달랐다고 한다. 평등한 교육철학과 집안의 자유로운 환경이 그녀의 천재성을 더욱 배가시켰다고 추측된다. 왜냐하면, 조선시대 여자가 글을 익힌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실학파의 대가인 ‘이익’은 이러한 말을 남겼다. “글을 읽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남자가 할 일이다. 여자가 이에 힘쓰면 그 해로움은 끝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 ‘허엽’은 글공부할 때 아들과 딸의 구분을 두지 않았다고 하니, 딸에 대해서 완전한 인격체로 대한 “양성평등”을 몸소 실천했다고 할만하다.
시대를 앞서간 집안의 가풍과 더불어 개방적이고 남녀 차별이 없는 집안에서 자란 허난설헌은 유년 시절을 행복하게 보냈다. 하지만, 그녀는 15세에 안동김씨 집안에 시집가면서 그녀의 생은 변화가 시작되었다. 행복했던 과거와는 달리 시집살이는 힘들었다. 조선시대 명문가의 외동딸이 시집살이가 호되었다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결혼생활이었다.
허난설헌은 안동김씨인 ‘김성립’의 아내가 되어 두 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시집살이는 고되었다. 그녀의 시어머니는 시를 쓰는 며느리를 달가워하지 않았고 무능한 남편 때문에 심리적 정신적 고통이 심했다. 남편은 번번이 과거에 낙방하였는데, 글솜씨가 뛰어난 아내 허난설헌에 대한 열등감과 질투심이 점점 늘어나기만 하였고, 매일 주막을 들락거리며 술과 여자에 빠져들었다.
고된 시집살이에 아이들 돌봄과 시를 쓰는 게 유일한 안식처였다. 하지만
그 시대는 여자가 시를 쓴다는 게 힘든 시대였다. 조선이란 사회는 여자가 시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녀는 틈틈이 지은 시에는 가난한 서민들의 삶을 시로 표현했다. 주로 신분 차별을 비판하고 있으며, 양반가에 대해서는 모순에 대한 그 시대에 대한 저항정신이 들어 있다. 시를 무기로 그릇된 현실에 저항했던 그녀에게 견디기 힘든 불행이 찾아온다.
그녀의 아버지 허엽이 경상도 관찰 사직에서 물러나 한성으로 올라오던 도중 객사하고 만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두 자녀도 모두 병으로 떠나보낸다.
“지난해에는 사랑하는 딸을 잃고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까지 잃었구나.
슬프고 슬픈 광릉 땅에
두 무덤 나란히 마주하고 있구나.
가엾은 너희 형제 넋은
밤마다 서로 만나 놀고 있으려나
하염없이 슬픈 노래 부르며
슬픈 피눈물만 속으로 삼키노라.”
그런데 그녀의 불행은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정치적 실패를 거듭하던 오빠 '허봉'이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강원도에서 그만 객사하고 말았다. 당시 26세이던 해 의미심장한 시 한 수를 남긴채, 자기 죽음을 예언하듯, 27세(1589년) 젊은 나이에 생을 마쳤다. 그녀의 짧은 인생이 참 안타까운 마음이다.
“푸른 바다가 옥구슬 바다를 적시고
푸른 난세는 오색 난세에 어울리네.
아리따운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
붉게 떨어지니 서릿발이 차갑구나”
여성들의 인권이 무시되던 조선시대에 태어난 그녀는 생전에 세 가지 한탄을 하였다고 한다.
첫째는 조선에서 태어난 것이요,
둘째는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요,
셋째는 남편인 김성립과 결혼한 것이라 하였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조선시대에 여자로 태어나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은 유교에 뿌리를 둔 나라였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로 인해 남녀 차별이 더욱 심해졌으며, 양반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남자아이들이 책을 읽고 글을 배울 때 여자아이들은 수를 놓고 바느질로 옷을 만드는 일을 배우며, 집 안에서는 남자들이 지내는 공간과 분리되어 주로 안채에서만 생활하며, 밖에 함부로 다닐 수도 없었고, 나갈 일이 있을 때는 꼭 쓰개치마로 얼굴을 가려야 했다. 여자는 집안 족보에도 이름을 올릴 수 없었고, 남편이 죽으면 다시 결혼할 수도 없었고, 이혼도 쉽지 않았다.
조선시대 이전에는 남녀 모두 평등하게 부모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았었는데 아는 조선 중기까지도 이어졌었다. 그래서 이 시기의 여자들은 남자 못지않은 경제력도 있었다. 그러나 점차 결혼풍속이 변화하고 여자는 출가외인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재산상속에서 여성의 기득권은 훨씬 줄어들고 말았다. 게다가 가부장적인 유교적 가족 질서는 더욱더 여성의 지위를 몰락시켰다. 따라서 조선시대 여성들의 성적 종속은 어느 시대보다 심할 수밖에 없는 사회환경에서 이미 잉태된 것이며, 이는 오늘날까지도 청산되지 못하고 어느 정도 유효하다고 하겠다.
허난설헌은 조선시대 사회구조의 희생자라는 생각이 든다. 조선시대의 남녀 차별, 가부장제, 남성 중심의 사회적 구조 속에 오롯이 그녀 자신으로서 존중받기란 쉽지 않았으리라, 그로 인해 그녀의 능력을 인정받지 못했으며, 그녀의 천재성을 희생당한 셈이다.
조선시대, 천재 시인 허난설헌, 그녀가 이 시대에 살았으면, 어떠한 시를 남겼으며, 어떠한 시선으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
현대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참 좋은 세상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내가 결혼하여 육아하던 1990년대의 나의 육아 경험과 지금 2022년 직장에서 경험하는 육아 문화는 많이 달라졌다. 우리 사회가 성차별을 위해 큰 노력을 하였음을 알 수 있지만, 아직도 ‘유엔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우리나라 법과 제도에 여러 가지 권고를 하고 있다. 점점 더 나아지리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