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북쪽길 | 바다의 끝, 또다른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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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나란히 이어지던 길은 방향을 틀어 나를 점점 갈리시아의 땅 더 깊은 곳으로 이끌었다. 동시에 뜬구름처럼 막연하게만 느껴졌던 종착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부쩍 현실로 다가왔다. 더 이상 바다를 볼 수 없을 때 북쪽길도 끝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흙냄새 폴폴 나는 내륙 길로 접어들면서 나는 오히려 새로운 챕터가 시작됨을 느꼈다. 종착지까지 남은 거리는 100여 킬로미터. 이 길은 바다랑 산티아고를 잇기 위해 존재하는 자투리길이 아닌, 그저 그 자체로도 북쪽길의 당당한 일부였다. 여느 때와 같이 노란 화살표가 그늘이 없는 오르막을 가리키면 낙담을 거쳐 체념하며 올랐다가 이어진 내리막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가벼운 표정과 발걸음으로 속도를 내어 걸었다. 밥때가 되면 순례자 메뉴가 있는 식당에 들렀고,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신발을 벗어던지고 샤워실로 직행하는 평범한 순례자로서의 하루가 이어졌다.
그렇게 내륙으로 접어든 지 이틀째, 아침부터 안개가 가득 끼어 있는 날이었다. 그날따라 유독 몸이 무겁기도 했고, 인적 드문 숲 속에서 만난 순례자가 다짜고짜 남기고 떠난 ‘니하오’ 한마디에 시작부터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날씨 때문인지 으슥하고 곧 유령이라도 나올 것 같은 곳이 많은 데다 길도 굉장히 거칠었다. 길게 걷지 않기로 한 날이지만 걸어도 걸어도 남은 길이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걷다 보니 길이 두 갈래로 나뉘었다. 지도를 보니 각각 고도가 높고 험하지만 짧은 길과 비교적 완만하지만 빙 돌아가는 길로 이어진다고 나와 있었다. 고민할 것도 없이 짧은 길을 택했다. 가파른 산길에서 고생하더라도 몇 킬로미터를 덜 걷는 게 훨씬 나아 보였다. 하지만 막상 그 길로 들어설 때는 조금 후회스러웠는데, 산길이 아닌 흡사 무너져 내린 공사장처럼 황톳빛 흙이 줄줄 흘러내리는 비탈길이었던 것이다. 주변 경치도 뭐도 없는 삭막함 뿐이어서 실망감이 차올랐다. 그래도 어쩌겠어. 당장 내 앞길에만 집중하며 헥헥거리며 오르막을 오를 수밖에. 그러다 발걸음을 멈췄을 땐 주변의 공기가 달라졌음을 느꼈다.
여전히 안개가 자욱했지만 흐릿한 시야 너머로 울창한 숲이 펼쳐졌다. 거칠고 황량했던 주변도 포근한 느낌을 주는 부드러운 풀밭으로 바뀌어 있었다. 곳곳에 흐드러진 자그마한 보랏빛 야생화는 안개와 함께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었고, 쇳소리를 닮은 스산한 바람 소리와 안개 너머로 이따금 가축의 울음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으스스한 분위기였지만 그보다는 태고의 자연 속에 있는 듯한 안온함이 더 컸다. 당장 몇 발자국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곳이었지만, 그 길만이 주는 차분함이 마음에 들었다. 선명한 고화질의 세상과 사뭇 이질적인 풍경은, 많은 부분이 흐릿하고 불분명해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듯했다. 안개를 매개로 세상과 단절된 자연 속, 나만의 공간을 허락받은 듯한 기분이었다. 길을 살짝 벗어난 공터에 가방을 내려놓고 털썩 앉았다. 그리고 가만히 바람소리를 들으며 흰색 풍경을 바라봤다. 이 고요가 오래갔으면 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들려온 발소리와 말소리에 작은 평화에 균열이 갔다. 오래간만에 맞은 오롯한 고요가 깨어져서 김이 팍 식었지만, 그래도 지금 지나가는 저 순례자들을 무시하고 싶진 않아서 작게 한숨을 내뱉고 돌아앉았다. 앞뒤로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가볍게 손을 들고 인사를 건넸다. 인기척을 느낀 그들도 화답하며 고개를 돌렸다. 순간 안개가 걷히고 앞쪽 사람의 얼굴이 드러났다.
‘어 아는 얼굴인데..?’
그 사람도 아리송한 듯 나를 멀뚱 바라봤다. 알듯 말 듯한데? 점차 서로의 눈이 커지던 찰나, 그의 뒤에서 다른 사람이 폴짝 튀어나왔다.
“잔!”
곧이어 함박웃음 가득한 얼굴로 나에게 달려오는 그 모습을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어느새 오랜 친구처럼 익숙해진 사람이었고, 하루가 긴 순례길에서는 너무 오랜만의 재회였다.
“세상에, 한나!”
어느 때보다도 요란하게 호들갑을 떨며 한바탕 기쁨을 표출하고 나서야 먼저 나타났던 사람이 올리비에라는 것을 알아봤다.
“올리비에도 반가워요! 여기서 만나다니!”
방해받은 줄 알았던 시간이 순식간에 우리만의 무대로 바뀌었다. 한나와 헤어졌다 다시 만난 건 이미 수차례 겪은 일이었지만 희한하게 안갯속에서의 재회는 이전의 재회들을 너무 평범한 사건으로 만들었다. 이전 재회들의 배경은 게임의 클래식 맵이었다면, 이번 재회는 아무에게나 열리지 않는 히든 맵에서 이루어진 느낌이랄까. 우리는 서로의 팔을 붙잡고 팔짝팔짝 뛰면서 빙글빙글 돌다가 각자의 폰으로 번갈아가며 셀카를 찍어댔다.
한바탕 흥분이 가시고 함께 안갯속으로 들어서며 다시 말했다.
“다들 여기서 만날 줄 몰랐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야! 우리가 어제 묵었던 알베르게 주인이 이 길로는 절대 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거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아마 전부 다른 길로 갔을 거야. 근데 우리는 그 말을 별로 듣고 싶지 않더라고. 청개구리 심보랄까. 그래서 그냥 왔는데 역시 오길 잘했어!”
올리비에의 설명에 오는 동안 왜 그렇게 사람이 없었는지 이제 이해가 갔다. 뭐, 덕분에 우리는 좋았지만. 한나는 들뜸이 남아있는 목소리로 푸념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대체 여기가 뭐가 위험하다는 거야? 뭐 여기 용이라도 살아? 차라리 유니콘이 나오겠다!”
한바탕 깔깔 웃다 보니 나에게 작용되던 중력이 덜어진 것처럼 아침부터 무겁던 몸과 마음이 언제 그랬냐는 듯 안개처럼 가벼워졌다.
셋이서 함께 도착한 알베르게는 숲 속 산장 같은 곳이었다. 삼각형으로 경사진 지붕과 울퉁불퉁 질감이 그대로 살아있는, 넙적한 돌을 쌓아올린 벽면은 목가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푸근한 인상의 호스트가 입구부터 마중을 나와줘서 숙소보다는 가정집에 방문하는 기분이었다. 내부는 넓지는 않았지만 천장까지 뚫려 있어 개방감이 있는 공용공간과, 난간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2층의 방들로 이루어진 짜임새 있는 구성이었다. 계단 옆에는 아늑한 공용 공간이 있었다. 어스름이 지고 노란 조명이 기다란 테이블과 벽난로, 어두운 빛깔의 목재 천장을 잔잔히 밝히자 모험 소설 속 여관에 있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런 곳이면 항상 그랬던 것처럼 어김없이 저녁은 모든 투숙객이 함께 했다. 한나와 올리비에를 제외하고는 모두 초면이었는데도 집처럼 안락한 환경 때문인지 낯설기보단 편안했다. 친근한 인상의 롭과 살짝 날카로운 인상이지만 익살스러운 독일인 율리아는 오늘 단 6km만 걸었다고 해서 모두의 경악이 뒤섞인 감탄을 받았다. 하루 평균 20Km sodhl, 아주 적게 걸으면 10Km를 걷는 순례길에서 6km는 거의 안 걸은 거나 마찬가지기 때문. 누군가가 어디 안 좋은 거냐고 걱정하자 롭은 그의 곱슬머리와 잘 어울리는 짓궂은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아뇨. 그냥 걷기 싫어서 멈췄어요.”
한 켠에는 무려 신혼여행으로 이곳을 찾은 미국인 부부도 있었다! 율리아가 특유의 시니컬한 말투로 물었다.
“신혼여행이라고요? 이런 프라이버시도 없는데서 즐길 수나 있어요?”
부부는 한바탕 웃더니 말했다.
“아 저희는 보통 가져온 텐트에서 자요. 또 여기는 마침 2인실이 있더라고요. ”
“나름대로 누구보다 허니문을 즐기고 있다고요!”
우리는 그 밖에도 각자 길에서 만난 특이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각자의 언어로 하루를 묘사하며 서로의 문화를 알아가는 등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한 테이블에 둘러앉은 열명 남짓이 삼삼오오 나뉘거나 누구 하나 소외되는 일 없이 모두 같은 주제로 대화를 만들어가는 이 시간이 너무 즐거웠다.
접시가 비워지고 하나 둘 수저를 내려놓을 때쯤 호스트가 의문의 투명한 유리병과 작은 잔들이 올려진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자, 어디서도 맛보지 못할 최고의 음료가 왔습니다! 무려 제가 직접 담근 술이지요! 드셔보실 분?”
당연히 여기저기서 손이 올라왔다. 그 모습을 본 주인장은 한쪽 눈을 찡그렸다.
“역시 여러분은 뭘 좀 아시는군요! 아, 근데 참고로 도수는 70도랍니다!”
그 말에 올려졌던 손들이 일제히 내려갔다. 하지만 난 오히려 그 말에 호기심이 동했다. 70도라니? 도대체 어떤 느낌일까?
“저 한잔 주세요!”
당돌한 내 외침에 주변에서 “오오오오!!”하는 격려 소리가 터져 나왔다. 주인장은 빙긋 웃으며 나에게 한잔을 건네고는 내 옆에 나란히 앉은 신혼부부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좋은 날엔 좋은 술 아니겠습니까?”
어느새 그 두 사람의 손에도 나와 같은 잔이 들려 있었다. 짠을 외치려던 나를 향해 율리아가 조용히 말했다.
“그거 알지? 건배할 땐 무조건 상대의 눈을 똑바로 봐야 하는 거. 안 그러면 7년 동안 재수가 없다고.”
건너편에서 누군가가 말을 질세라 외쳤다.
“원샷 때리고 컵으로 테이블을 탁 소리 나게 치는 것도 잊지 마!”
… 술 한 잔 마시기 참 어렵다. 근거 없는 풍습이긴 해도 일단 그런 말을 들은 이상 안 하기는 굉장히 찝찝해지는 법이다. 비록 이제까지 단 한 번도 그런 규칙들을 지키지 않고도 잘 살아왔더라도 알게 된 이상 신경이 쓰인다. 난 신혼부부와 주인장과 일일이 눈을 부담스러울 정도로 강렬하게 마주치고는 단숨에 70도짜리 술을 들이켰다. 순간 불덩이를 삼킨 것처럼 목구멍이 화끈했고, 그 열기의 움직임으로 내가 마신 술이 식도를 지나는 과정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의외로 취기나 숙취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 생각보다 엄청 깔끔한데요? 맛있어요!”
“그래? 그럼 너 한잔 더 할래?”
음.. 모르긴 몰라도 섣불리 잔을 받았다간 큰일 날 것 같았다.
“앗, 그건 사양할게요.”
주인장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나와 얼굴이 시뻘게진 신부에게서 잔을 회수해 갔다. 외딴 오두막의 살짝 어두운 듯한 노란 조명, 직접 담근 술... 모험 소설 속 낭만이 부럽지 않은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