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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마지막 바다, 리바데오

산티아고 북쪽길 | Tapia de Casariego에서 Ribadeo

by 이끼레몬소르베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mosslemonsorbet/15



순례길에 들어선 지 29일 되는 날, 북쪽길의 마지막 바다이자 갈리시아의 시작 리바데오 Ribadeo로 향했다. 스페인 북부의 해안로를 따라 걷는 특성 때문에 바다는 북쪽길의 정체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인기가 많고 정보도 많은 프랑스길 대신 첫 순례길을 북쪽길로 선택했던 이유도 바다를 따라 걷는다는 점에 끌려서였다. 처음 이룬의 알베르게에서 문화가 완전히 다른 외국인들 사이에 끼지 못하고 홀로 하릴없이 침대에서 폰만 들여다볼 때, 중간중간 정보의 부재로 막막할 때, 그리고 비야비시오사의 갈림길에서 북쪽길을 이어갈지 말지의 기로에 섰던 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내 처음 선택을 믿고, 그리고 그 길의 모든 바다를 모조리 보고 싶어 북쪽길을 끝까지 고수했다. 그런 북쪽길의 바다는 산티아고가 있는 갈리시아에 들어서자마자 끝이 나버린다. 리바데오에서부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는 아직 150km 가까이 남아있지만 그 길에는 더 이상 바다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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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피아에서 출발한 여정 내내 오른편에서 파도소리가 잔잔히 들려왔다. 평소 같았으면 알베르게에 일찍 도착해서 오래 쉴 생각으로 걸음을 재촉했겠지만, 그날은 길을 음미하며 느릿느릿 걷고 싶었다. 하지만 그날따라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어 을씨년스러웠다. 바다는 우중충한 하늘을 닮은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날씨 때문인지 길도, 지나치는 해변도 유독 적막하고 스산했다.


바닷가와 이어지는 비탈길 중턱에 자리 잡은 바에서 어느새 중독되어 버린 카페 콘 레체(Cafe con Leche)를 시켰다. 야외 테이블로 나와 착 가라앉은 기분으로 바닷바람을 맞으며 멍하니 수평선을 보고 있는데 비탈길 아래에서부터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려왔다. 한나와 베로니카였다. 우리는 서로를 알아보고는 미소 지었지만 평소처럼 요란하게 인사를 나누지는 않았다. 항상 활달했던 두 친구도 그날만큼은 차분한 분위기였다. 우리는 함께 둘러앉아 커피를 마시며 이따금 몇 마디를 나누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침묵으로 흘려보냈다.


나란히 걸으면서 나눈 대화도 평소에 비해 무거웠다. 체코, 헝가리, 한국에서 온 우리는 각자 나라의 어두운 역사에 대해 할 말이 많았다. 막연히 서로 멀다고만 생각했던 나라들이지만 생각보다 비슷한 점이 많았고, 그래서 공감하며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아스투리아스 주와 갈리시아 주를 잇는 기다란 다리가 나타났다. 다리로 들어가는 길은 매우 좁아서 한 사람씩 차례로 들어가야 했다. 두 친구를 앞세워 마지막으로 다리에 들어섰을 때,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지금껏 지나쳐 온 바스크, 칸타브리아, 아스투리아스에서의 바다와, 그 물결을 배경으로 쌓아왔던 시간들이 다리를 건너며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한 시절을 뒤로하고 떠나가는 발자국에는 벌써 짙어지기 시작한 향수와 회한이 남았다.




리바데오는 한적한 마을이었다. 공립 알베르게도 단층짜리 아담한 건물이었고, 넓지 않은 침실에 열몇 개의 침대가 길게 줄지어 있는 아늑한 구조였다. 한나와 베로니카는 씻고 나오더니 그대로 침대에 파묻혀 버렸다. 날씨를 타는지 그간의 피로가 몰려온 건지 둘 다 몸이 무겁고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했다. 난 혼자 알베르게를 빠져나와 혼자 마을 구경에 나섰다. 마지막이니 더 제대로 바다를 즐기고 음미하고 싶었다.

하지만 리바데오는 생각보다 단조로운 도시였다. 알베르게에서부터 리바데오 시내까지 이리저리 돌아다녔지만, 아무리 걸어도 흰모래로 뒤덮인 고운 백사장은커녕 자연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곳조차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매끈하게 깎인 시멘트와 닿은 바다, 쇠로 된 선박이 가득한 항구는 끄물끄물한 하늘처럼 온통 무채색이었다. 내가 지금껏 마지막 바다를 상상하며 품었던 기대와 낭만 위로 실망이란 이름의 회색 필터가 덧씌워졌다. 결국 젤라또 하나를 손에 들고 도로가 벤치에 앉았다. 흘러내리는 젤라또를 천천히 핥으며, 혀에서 느껴지는 인조적인 달콤함을 위안 삼아볼 뿐이었다.


마지막 남은 눅눅해진 콘을 입 안에서 깨부수며 터덜터덜 숙소로 향했다. 한나와 베로니카는 낮잠에 빠져 있었다. 그냥 쉬기에는 침실이 너무 어두컴컴해서 거실로 나왔다. 별생각 없이 주방을 기웃거리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와 가스버너 옆에 쌀봉지와 마늘을 탁 올려놓았다. 요리를 하려는구나 싶어 자리를 비켜주려던 차에 하부장을 뒤적여 팬을 꺼내든 그 사람이 입을 열었다.


“안녕, 난 다니엘이야. 나 하는 거 구경할래?”


어차피 할 것도 없겠다, 난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예 가스버너 옆 하부장에 기댄 자세로 다니엘이 하는 행동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다니엘은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른 후 마늘 몇 조각을 편으로 썰어 넣었다. 그러더니 생쌀을 씻지도 않은 채 팬에 들이붓고는 물을 부어 뚜껑을 닫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리조또에 대해 잘 몰라서 이런 방식의 조리가 좀 황당하게까지 느껴졌다. 내 표정에서 그게 드러났는지 다니엘은 조금 웃더니 말했다.


“내가 종종 해 먹는 마늘 리조또야. 간단한데 꽤 맛있어. 너도 줄까?”


미심쩍긴 했지만 호기심이 동한 나는 좋다고 답했다. 마침 식사시간이라 좀 출출하기도 했다. 쌀이 익는 데는 10분 정도가 걸렸는데, 그동안 그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콜롬비아에서 자란 다니엘은 20대 때부터 미국으로 건너가 일을 하다가 지금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여행하면서 일을 한다고 했다. 항상 여행하며 살아가는 삶이라니. 긴 인생에 반짝하고 말 이 특별한 여행이 끝나가는 걸 아쉬워하고 있던 내게는 꿈같은 인생처럼 느껴졌다.


“부럽다. 나도 너처럼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살아보고 싶어.”


팬 안에서 물이 조금씩 끓고 있었다. 다니엘은 프라이팬 뚜껑을 살짝 열어 쌀을 몇 번 휘저으며 말했다.


“보통 사람들은 사는 대로 살아진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그 반대야. 생각하는 대로 사는 거야.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살 수 있는 거야. 명심해, 생각대로 살게 되는 거야.”




마늘리조또는 기대보다 훨씬 맛있었다. 살짝 알싸하면서 고소한 마늘과 올리브유의 풍미가 어우러지는 밥이었다. 페페론치노만 넣으면 알리오올리오 맛이 날 것 같았다. 내가 먹는 모습을 보던 옆테이블의 순례자들이 나눠준 미트볼 덕에 풍족하진 않지만 알맹이가 꽉 찬 한 끼를 먹을 수 있었다. 넉넉한 인심 덕분에 몸도 마음도 충만해졌다. 비록 바다는 제대로 못 즐겼지만 이만하면 괜찮은 마지막이지 않을까 생각하며 바람을 쐬러 건물 밖으로 나섰다. 마당을 가로지르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왔다. 맞은편 침대를 배정받아 스치듯 인사를 했던, 인자한 인상의 올리비에 할아버지였다.


“너 혹시 바다 보러 갈래? 버스로 10분만 가면 정말 끝내주는 바다를 볼 수 있어.”


끝내주는 바다라… 사실 슬슬 피곤해서 버스까지 타야 하는 일정이 그다지 끌리지도 않았고, 바다에 대한 기대와 미련도 떨어지던 참이라 망설여졌다. 올리비에는 그런 나를 보더니 한마디 덧붙였다.


“여기가 마지막 바다잖아. 그걸 봐야 완성된 느낌일 거야. 후회하지 않을걸?”


내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말이어서 구체적인 생각이 떠오르기도 전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좋아요, 갈게요.”


외투와 짐을 챙기러 들어가면서도 반신반의했지만 일단 대답을 해버렸으니 가야 했다. 조금은 떨떠름한 기분을 지우지 못하고 약속 시간에 나갔다. 그런데 뜻밖에 한나와 베로니카도 올리비에가 말한 약속 장소에 나와 있었다. 익숙한 얼굴들을 보자마자 비로소 안심이 되면서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낯선 사람, 그것도 또래가 아닌 할아버지와 단둘이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레 부담감을 느꼈던 듯하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친구들을 따라 버스에 올랐다.




그렇게 도착한 곳에는 장관이 펼쳐져 있었다. 눈이 닿는 끝까지 바다와 새하얀 백사장이 펼쳐져 있었고, 그 위에는 가늠도 못할 세월이 겹겹이 간직한 암벽들이 마을에 늘어선 집들처럼 줄지어 우뚝 서 있었다. 바다와 가까운 암벽에는 무수히 부딪친 파도가 뚫어놓은 높다란 아치들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붉은빛의 오묘한 지층과 고운 모래, 맑은 바다와 만나며 만들어내는 풍경은 이국적임을 너머 외계 행성에 온 것 같은 기분마저 자아냈다. 이제껏 무채색의 인상만 남긴 리바데오 근처에 이런 곳이 있을 거라곤 전혀 생각도 못했다. 계획에도 없던 낯선 풍경은 사진을 보고 찾아간 경치보다도 더 큰 경이를 안겨주었다. 그곳은 원래의 기대를 넘어선 북쪽길 최고의 바다였다.


나와 베로니카, 한나, 그리고 올리비에 할아버지는 신발을 벗어 들고 맨발로 이곳저곳을 탐험했다. 웅덩이를 건너 아치를 통과하고, 동굴처럼 파인 통로를 지나 원형으로 뚫린 하늘이 드러난 자연이 만들어낸 신전에 다다랐다. 그곳에 멈춰 서서 빛이 절벽에 뿌리는 그림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하루 종일 하늘을 잔뜩 가리던 회색 구름들도 저물어가는 해를 위해 자리를 터주었다. 백사장으로 다시 나온 우리는 함께 바다로 들어갔다. 우리와 주변의 모든 것들을 황금빛으로 덧칠하는 밤 9시의 노을을 마주보며 풍경과 하나가 되었다. 태양이 절벽에 걸치며 불현듯 강렬하게 반짝거리더니 이내 스르르 절벽 너머로 자취를 감추었다. 흐지부지 끝날 줄 알았던 내 북쪽길의 마지막 바다는 그렇게 찬란히 저물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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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로 돌아왔을 때는 밤 10시가 넘었지만 하늘에는 아직 빛의 잔재가 남아 있었다. 스페인의 노을은 정말 느리다. 그만큼 아름다운 색깔을 오래도록 보여준다. 이미 최고의 바다를 보았지만, 그걸로 끝내기는 뭔가 아쉬웠다. 한나와 베로니카도 나와 비슷한 기분인지 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서성였다. 그때 베로니카가 무언가 결심한 듯 어딘가로 향하더니 두 손에 자잘한 음식들을 들고 돌아왔다. 그 모습을 본 한나와 나도 각자 미리 조금씩 사둔 주전부리들을 챙겼다. 우리는 알베르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바다를 향해 돌출된 작은 전망대로 갔다. 좁은 바다 사이를 가로지르는 다리가 보였고, 그 위로 달이 빛나고 있었다. 아까의 장대한 풍경과 대조되는 소박한 장면이었지만 마지막 바다의 여운을 느끼기에는 더없이 충분했다. 노을이 밤을 향해 무르익으며 온 하늘과 바다를 보랏빛과 분홍빛으로 물들였다. 우리의 소박한 식사에도 그 빛은 스며들었고, 우리는 그렇게 리바데오의 마지막 빛깔에 찬찬히 젖어들었다. 무채색의 기억 위에 덧입혀져 더욱 깊이 반짝이는 빛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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