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북쪽길 | Piñera에서 Tapia de Casarie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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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와 금발 여자애는 배정받은 침대에 짐만 던져놓고는 바로 거실에서의 모임에 합류했다. 때마침 호스트가 와인을 한병 내와서 자연스럽게 2차 모임처럼 대화가 이어졌다. 난 곧바로 한나에게 물었다.
“근데, 어떻게 이렇게 늦은 시간에 여기까지 온 거야? 난 네가 한참 뒤에 있을 줄 알았어!”
“하하 맞아. 사실 여기까지 걸어온 게 아니야. 차 타고 왔어”
한나는 느긋한 성향을 십분 발휘해 원래 나보다 한참 뒤처져 있었지만, 길 한가운데에서 해가 지기 시작하자 덜컥 불안해졌다고 한다.
“여기 베로니카한테 텐트가 있긴 한데,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우리 둘 다 침대에서 꼭 자고 싶었거든. 그런데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길 위에서 밤을 지새워야 할 것 같아서 그냥 히치하이킹을 해버렸어.”
원체 한적한 도로여서 걱정도 했지만 다행히 곧바로 히치하이킹에 성공했다. 마음씨 좋은 커플은 흔쾌히 차를 태워주고, 알베르게 바로 앞까지 와주었다.
“진짜 웃기다. 근데 너네는 어떻게 만난 거야?”
그 말에 한나는 베로니카와 눈을 마주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뭔가 범상치 않은 이야기가 나올 참인 것 같았다.
“그 이야기가 진짜 웃겨! 일단 이 사진을 봐봐.”
사진 속에는 밑에서 올려본 각도로 괴상한 표정을 한 한나와 베로니카,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있었다. 너무 익숙한 얼굴이었다.
“어? 얀 이잖아? 어떻게 만난 거야?”
전말을 들어보니 정말 ‘얀’스러운 만남이었다. 한 알베르게에서 얀과 한나는 한밤중에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갑자기 누군가 벌떡 일어나 조용히 좀 하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며 거칠게 항의했다. 둘은 너무 겁먹은 나머지 무작정 모든 짐을 다 싸들고 건물을 나왔는데, 마침 마당에서 텐트를 발견하고는 무작정 텐트를 두드리며 재워달라고 했다. 그 텐트의 주인이 바로 베로니카였던 것이다. 셋은 1인용 텐트에서 부대끼며 불편하게 하룻밤을 보낸 후 급격히 가까워졌다고 했다. 위기(?)를 맞은 밤에 우연히 고통을 나누며 친해진 사이라니. 어딘지 익숙한 이야기 같기도 했다.
“진짜 불편했어. 땅이 기울어져서 가만히 있어도 자꾸 밑으로 내려가고, 문도 제대로 안 닫혀서 결국 이슬 다 맞고 잤어. 다음날 일어나니 우리 다 감기몸살에 걸려있더라고. 조용한 얀도 그때 처음 봤어”
재회의 기쁨으로 떠들썩했던 밤이 지나 아침이 밝았다. 각자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 대비하느라 비장한 기운이 감도는 평범한 알베르게의 아침 풍경이었다. 알베르게의 호스트는 한창 준비 중인 순례자들을 모두 거실로 불러들였다. 얼마 없는 순례자들이 모두 모이자, 테이블에 커다란 지도가 펼쳐졌다.
“자, 오늘 여러분이 지나갈 길에 대해 설명해 드릴게요. 제말 잘 듣고 꼭 명심하셔야 해요!”
예의 명심할 내용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마을 외곽에서 화살표를 따라 숲으로 들어가지 말고 포장 도로로 갈 것. 화살표를 따라가면 끔찍한 진흙밭에 빠져버릴 거라고 했다. 둘째, 바다가 보이면 화살표를 따라가지 말고 곧장 바다를 향하는 길로 갈 것. 그 길이 기존 루트보다 거리는 조금 더 멀어도 훨씬 아름답다고 했다. 어렵지 않은 내용이라 머릿속에 차곡차곡 집어넣고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피녜라와 작별인사를 했다.
길을 나서 얼마간 걷자 숲길과 포장도로로 갈라지는 갈림길이 나왔다. 알베르게에서 같이 나온 메쉬와 제시카는 호스트의 조언을 착실하게 이행하며 망설임 없이 포장도로로 향했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작은 반항심이 일었다. 지루할 게 자명한 포장도로보다는 화살표가 가리키는 미지의 숲길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짧은 고민 끝에 야심 차게 숲길로 들어섰다.
“에잇, 진흙이 깊어봤자지! 뭐 별일 있겠어?”
초반은 여느 숲길과 다르지 않았다. 한동안 평탄하고 건조한 흙길만이 이어지자 안도감을 넘어 약간의 배신감마저 들었다. ‘뭐야, 호스트 사실 여기 잘 모르는 거 아냐?’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땅의 질감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비 온 뒤 생긴 웅덩이처럼 보이던 질퍽한 구역이 금세 온 숲으로 퍼져 있었다. 비 때문에 잠시 묽어진 게 아닌, 정말 오래된 진흙밭인 것 같았다. 점차 발이 너무 많이 빠진다고 느껴질 때쯤엔 아예 말뚝 같은 징검다리가 나왔다. 편의성보다는 일단 진흙을 피할 수 있도록 높이 박아둔 게 목적인 듯했다. 평평하지도 않고 면적도 엄청 작아서 빠지지 않고 건너려면 집중력을 발휘해야 했다. 이것만 다 건너면 끝나겠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다음 말뚝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좀 떨어진 곳에 커다란 통나무가 누워 있었다. ‘설마 저게 길인가..?’ 현실을 부정하며 주위를 360도 둘러봤지만 그 길 뿐이었다. 몬스터만 안 나왔다 뿐이지 무슨 게임 캐릭터가 되어 챌린지를 하나씩 깨는 기분이었다. 살짝 망설여졌지만 계속 보다 보니 잘 뛰면 한 번에 건널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과감하게 점프를 했고…
“악!”
… 그대로 진흙에 착지했다. 보이는 것보다도 훨씬 악질의 진흙이었다. 말이 진흙이지 늪처럼 종아리까지 푹 빠져버렸다. 이대로는 가라앉을 것 같은 기분마저 들어서 필사적으로 주변 지형지물을 아무렇게나 잡고 몸을 끌어올렸다. 다행히 다친 곳 없이 무사히 숲을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깨끗이 닦인 마을의 길거리를 걷는 것마저 민폐처럼 느껴지는 몰골이 되었다. 아침을 먹지 않아 바 bar에 가야 했는데, 이 상태로는 입구 문을 열기도 전에 쫓겨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여행 중 처음으로 물티슈를 꺼냈다. 바지와 신발은 물론 양말과 종아리까지 진흙 범벅이었다. 양말까지 완전히 벗어 큰 덩어리들을 털어낸 뒤 어느새 굳어서 바지에 완전히 스며들어버린 진흙과 고군분투하는 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영! 도대체 무슨 일이야!”
고개를 들자 눈을 동그랗게 뜬 제시카와 메쉬와 눈이 마주쳤다. 현명하게도 호스트의 말을 따른 둘은 더할 나위 없이 뽀송한 상태였다.
“진흙에 빠졌어요. 그 숲길을 지나왔거든요, 헤헤.”
”아니 그래서 호스트가 절대 가지 말라고 했잖아! 왜 말을 안 들었니 쯧쯧”
"꼭 저런 애가 있지. 학교에서 일하면서 많이 봤어. 당해봐야 정신 차리지."
제시카와 메쉬는 장난스레 한 마디씩 핀잔을 주고는 마을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난 다시 바지를 닦는 데 집중하려 했지만, 이미 바지에 스며들어버린 진흙을 물티슈로 닦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난 한숨을 한 번 크게 내쉬고는 물티슈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흙자국으로 얼룩진 양말과 신발을 신고서 다시 걸음을 옮겼다.
몇 시간 후, 시선의 끝에 수평선이 나타났고, 호스트가 말한 두 번째 갈림길에 다다랐다. 이번에는 호스트를 믿어보기로 했다. 바다로 향하는 길은 하나뿐이어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바다로 쭉 뻗은 흙길의 양쪽으로는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다. 단순한 지형에 그늘 한 점 없이 뜨거운 길이었지만, 그 덕에 시야를 가리는 것 하나 없이 탁 트인 수평선을 두 눈 가득 담을 수 있었다. 이따금 땀을 뻘뻘 흘리고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헥헥거리면서 달리기를 하는 동네 주민을 마주칠 뿐 사람도 거의 없어 그 평화를 온전히 즐길 수 있었다. 쨍쨍한 날씨만큼 바다도 유난히 깊은 푸른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새삼 알베르게 호스트의 말을 듣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지역의 토박이이자 매일같이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안내하는 그는 길의 전문가였다. 그제야 그것을 인정한 나 자신이 조금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의 말을 처음부터 귀담아 들었다면 진흙탕에 처박힐 일도 없었을 텐데...
아스투리아스의 마지막 마을, Tapia de Casariego는 바다로 둘러싸인 마을이었다. 수영을 해볼까 고민했지만 피곤하기도 하고 아직 마지막 바다가 남아 있으니 그냥 숙소에서 쉬기로 했다.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워 폰을 하고 있는데 제시카가 다가왔다.
“영, 나랑 메쉬는 지금 마을로 내려가서 저녁 먹을까 하는데 너도 같이 갈래?”
“오, 좋죠!”
메쉬와 제시카는 각각 40대, 50대의 중년이었지만 쾌활함과 낙천성을 잃지 않은 유쾌한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온갖 주제로 깔깔대며 이야기를 했는데, 이따금 제시카가 농담조로 "여기서 네가 제일 젊으니까 너부터 해봐."라는 식의 말을 할 때가 아니라면 그들이 내 또래와 다름없이 느껴질 정도로 대화가 잘 통하고 재미있었다. 평소에는 그 나이대 분들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기회도 없고, 그럴 수 있다는 생각도 잘 못했다. 하지만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종종 나이를 넘어선 우정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친구가 되는데 국경이 걸림돌이 되지 않는 것처럼, 나이차로 비롯된 거리감도 생각보다 쉽게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우리는 마을로 내려가서 저녁을 먹고, 아스투리아스 전통 사과주, 시드라를 하나 시켰다. 시드라는 컵을 바닥이나 테이블에 놓고는 병을 최대한 높이 들어 따라 마시는 전통이 있는데, 각자 서투른 손놀림으로 그걸 따라 하며 놀았다. 식사가 끝나고는 마을 축제가 열린 바다에 내려갔다. 바닷물은 발바닥만 닿아도 온몸의 열이 싹 내려가는 게 느껴질 정도로 수온이 낮아서 우리는 발목이 조금 잠길 정도로만 들어갔다가 황급히 나왔다. 그런데 저녁에 알베르게에서 만난 한나는 긴 머리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수영복을 짜서 널고 있었다.
“수영했어? 물 너무 차갑던데, 안 추웠어?”
“응? 춥다니? 정말 완벽했어! 너무 좋아서 수영만 5시간 하고 왔는걸!”
5시간 바다수영이라니! 난 두세 시간 물장구만 쳐도 지쳐버리는데, 한나는 피곤한 기색도 없이 씩씩한 얼굴이었다. 함께 다닐 때는 얀한테 가려져 있어서 잘 몰랐는데 한나도 얀 못지않게 활동적이고 에너지가 넘치는 친구였다.
빨랫줄이 설치된 마당 너머로는 한적하고 작은 해변이 보였다. 그곳에서 베로니카가 노을을 바라보며 우쿠렐레처럼 생긴 악기를 연주를 하고 있었다. 거리가 멀기도 했고 바람소리와 파도소리에 묻혀 연주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어쩐지 그 뒷모습 만으로도 음악이 상상되는 듯했다. 다가가서 말을 걸어볼까 하다가 이내 관뒀다. 파도소리 사이로 희미하게 들리는 악기 소리, 해가 넘어가서 고요해진 노을과 잔잔한 바람이 만들어내는 평화로움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난간에 몸을 기대어 파도소리를 들었다. 저물어가는 하루의 끝자락, 각자의 마음속에서 바다는 저마다 다른 빛깔로 일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