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북쪽길 | 걷다가 마주한 온갖 것들과의 사소한 관계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mosslemonsorbet/13
히혼은 향하는 길도, 빠져나오는 과정도 결코 녹록지 않았다.
갈림길을 지나 얼마간 걷다 보니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좁게 난 오르막이 나타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별 걱정 없이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오르막을 오를수록 뭔가 이상했다. 처음엔 비교적 정상적인 범위의 경사였던 길이 갈수록 가팔라졌다. 좁다란 길을 이루는 바위들은 점차 크고 투박해졌다. 이따금 오르막의 끝이 보이는 것 같아 기대를 하며 힘차게 올라서면, 화살표는 어김없이 나무에 가려졌던 더 가파른 길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떤 바위는 너무 높은 나머지 한쪽 다리를 올리고 나머지 한쪽을 마저 올리기 전에 심호흡을 한 번 해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길은 악명 높은 설악산 공룡능선 코스 중에서도 가장 힘든 코스와 비슷하게 꽤 험한 길이었다. 보통 그렇게 힘든 길이면 인터넷 후기에 올라오거나 순례자들 사이에서 소문이 돌 법도 한데, 그런 이야기를 전혀 들은 적이 없었다. 마음의 준비도 없이 갑작스레 맞닥뜨렸다는 게 어이없게 느껴지기도 했다.
온몸이 땀범벅이 되고 숨소리가 거칠어질 무렵 뜬금없이 “100m만 더!”라고 적힌 나무 표지판이 나타났다. 화살표는 거의 암벽에 가까운 지형을 반영한 듯 이제 아예 위쪽을 향하고 있었다. 이 거친 산길에 한가운데 도대체 뭐가 있다는 건지 반신반의하면서도 일단 남은 힘을 짜내어 올랐더니 별안간 줄지어 놓인 여섯 개의 의자가 나타났다. 그 위에는 해변에라도 온 것처럼 의자에 느긋하게 앉아 컵을 하나씩 들고 있는 사람들이 파묻히다시피 앉아 있었다. 가파른 길 중간쯤 평평한 공간이 좁게 나 있었는데, 누군가 그 틈새에서 아이스박스에 음료수들을 쌓아 놓고 팔고 있었다! 자세히 보자 앉아있는 사람들의 얼굴에 말라붙은 땀자국이 선명했다. 등산로의 카페라니. 이런 건 한국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평소였다면 망설였을 가격이었지만 그 순간의 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지갑을 꺼내며 아이스박스로 직진했다.
“오렌지 주스 하나요!”
지난한 과정을 거쳐 도착한 히혼은 왁자지껄한 도시였다. 오랜만에 들른 도시여서 들뜬 마음으로 시내 구경을 나섰다. 하지만 대형마트와 옷가게를 돌아보는 몇 분 사이 기대는 금세 착 가라앉았다. 며칠 만에 혼자 마주한 도시 한복판에서 잠시 잊고 지냈던, 일상을 벗어나고 싶었던 이유가 삽시간에 되살아났다. 때마침 주말이라 길거리에는 삼삼오오 즐겁게 웃고 떠드는 사람들이 가득했지만 왠지 나와는 다른 세상의 사람들처럼 느껴져 그 분위기에 녹아들 수 없었다. 약간의 실망감을 안은 채 창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을 애써 외면하며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 일찍 히혼을 벗어나면서는 공장 지대를 지나야 했다. 큰 도시의 외곽에는 거의 항상 공장들이 밀집해 있다. 풍경은 단조로운 회색 건물로 뒤덮이고 소음이 공기를 가득 채운다. 순례길을 걷는 20일 남짓의 기간 동안 자연의 적막에 익숙해져 있던 청각은 히혼 같은 중소 도시의 일상적인 소음조차 다소 정신없게 느껴질 정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그런 상태로 주변엔 공장이 가득하고, 길 위에는 보도 없이 자동차만 늘어서 있는 길을 지나는 일은 꽤나 고역스러웠다. 자연 속에서는 오히려 음악도 과하게 느껴져서 일부러 챙겨 온 해드폰조차 거의 쓰지 않았는데, 정말 오랜만에 해드폰으로 귀를 틀어막고서 오아시스의 Champaigne Supernova를 틀고 볼륨을 높였다. 전주에 흐르는 파도소리와 한적한 바닷가의 분위기를 닮은 나른한 멜로디로 머릿속까지 헤집어놓을 만큼 거슬리는 소음을 중화시키고 싶었다. 한시라도 빨리 그 지역을 벗어나고 싶어 쉬지 않고 걸으니 서서히 아스팔트 길이 잔디밭으로 바뀌고 숲이 가까워 왔지만, 공장의 소음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까지는 수킬로미터를 더 가야 했다.
도망치듯 숲 속 깊숙이 걸음을 재촉하는 동안, 도시에서 내가 왜 그렇게 쉽게 예민해졌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는 항상 소음에 둘러싸인 생활을 하게 된다. 지하철에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오는 카페나 식당에서, 사람들로 가득 찬 거리에서 소음을 피하기란 불가능하다. 사실 내가 통과한 공장 지대의 소음은 지하철 소리나 경적소리, 사람 많은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 등 평소에 항상 접했던 일상적 데시벨과 큰 차이가 없었을 텐데, 그 정도로도 사람의 정신을 날카롭게 만드는 데는 충분했다. 마침내 귓가에 숲의 바람소리와 내 발걸음 소리만이 들려올 만큼 깊은 숲으로 들어서고서야 종일 꽉 움츠려있던 마음의 긴장을 놓을 수 있었다. 해드폰을 벗어 들자 귓가에 상쾌한 공기와 함께 바람소리가 날아들었다. 기계가 들려주는 소리로 애써 안정을 꾀하던 귀도 자연의 소리에서 비로소 안정을 찾았다.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듯한 안온함이 찾아왔다.
그 이후의 여정은 지극히 평화로웠다.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냈고, 지나치는 마을들의 규모도 그리 크지 않았다. 때때로 지나치는 해변도 인적이 거의 없이 자연 그 자체로 존재하는 곳들이 많았다. 비슷한 풍경들이었지만 전혀 단조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날마다 날씨가 다르고, 닮은 꼴의 해변마다 주변에 조금씩 다른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도시의 소음과 자연의 고요가 적나라하게 비교된 하루를 보낸 이후로는 자연의 미묘한 변화에 더 귀를 기울일 줄 알게 되었다. 그렇게 특별할 것 없지만 평온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완만하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오르막 포장도로를 걷던 중 베를린에서 온 시나를 만났다. 시나는 나보다 키가 한 뼘은 더 컸고, 그에 맞춘 듯 거의 내 키에 가까운 큼직한 나뭇가지에 화려한 나리꽃을 감아 장식을 한 지팡이를 짚으며 걷고 있었다. 흔히 보이는 등산스틱과는 비교도 안되게 탐날 정도로 멋진 지팡이였다.
“와 지팡이 멋있다. 어디서 난 거야?”
“아, 이건 누가 준거고, 꽃은 떨어져 있는 것을 주워서 매단 거야.”
시나는 수수한 차림새와 어울리게 자연을 사랑하하는 친구였다. 눈에 보이는 모든 자연이 이야기의 소재가 되었다. 멀리 보이는 수평선이 땅보다 높게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게 신기하다던지, 길가에 나리꽃이 유난히 많이 보인다던지 하는, 내가 그간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던 모든 것들이 시나의 시선을 거치면 새롭고 신기한 현상이 되었다. 한창 걷던 중 문득 시나가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내가 의아한 표정을 하며 따라 멈춰 서니 시나는 지팡이로 조용히 땅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작은 사슴벌레 한 마리가 아무것도 없는 시멘트 길을 힘겹게 건너고 있었다. 한 여름의 직사광선을 그늘도 없이 받아내는 사슴벌레가 안쓰러운 듯했다. 시나는 사슴벌레를 지팡이에 태워 풀숲까지 옮겨주기 위해 사슴벌레의 앞에 지팡이를 가져가다 실수로 사슴벌레를 뒤집어버렸다. 느닷없이 봉변을 당한 사슴벌레는 절박하게 여섯 다리를 버둥거리기 시작했고, 평소 벌레를 꺼리는 나는 그 모습이 너무 징그러워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시나는 조금 당황하더니 이내 “어떡해, 미안해..”라고 말하며 정성 어린 손길로 사슴벌레가 다시 길을 갈 수 있도록 되돌려주었다. 조금도 징그럽다거나 거부감이 없이 생명에 대한 순수한 애정만이 그 몸짓에 여실히 드러났다. 나 자신도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는 편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작은 벌레에도 마음을 쓰는 시나 앞에서는 스스로가 한없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시나와 반나절을 함께 걸어 피녜라 Piñera에 도착했다. 나는 오랜만에 만난 또래와의 시간이 좋았어서 내심 시나도 나처럼 그곳에서 멈췄으면 했지만 시나는 자신은 다음 마을까지 가고 싶다며 다음을 기약했다. 나는 붉은 나리꽃과 함께 천천히 멀어져 가는 시나의 뒷모습을 조금 바라보다 알베르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피녜라는 인적이 매우 드문 작은 마을이었다. 알베르게는 폐교를 개조한 건물이었는데, 곳곳에 학교였던 시절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두 개의 정문에 각각 ‘boys’와 ‘girls’를 뜻하는 Niños와 Niñas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는데, 안으로 들어가니 샤워실, 화장실 등에도 똑같이 적혀 있는 게 재밌었다. 침실은 교실이었던 곳을 개조해서 그런지 마냥 아늑하진 않았지만 어딘지 정겨운 분위기를 풍겼다. 한때 아이들이 뛰어놀았을 운동장 곳곳에는 잡초가 자라고 있었지만 활기찼을 예전의 모습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마을에 식당이 없어 저녁식사 시간에는 그곳에 모인 여섯 명의 순례자 모두가 거실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갈림길을 기점으로 북쪽길을 걷는 사람들의 수가 많이 줄어서 알베르게에서도 다른 순례자를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심지어는 알베르게 자체의 투숙객이 나밖에 없었던 경우도 있었다. 그런 만큼 이날의 저녁은 만찬이나 다름없었다. 들르는 알베르게마다 항상 열명 이상이 모여 시끌벅적했던 칸타브리아에 비하면 소박한 구성이었지만, 아스투리아스에 들어선 이후로는 대화가 있는 저녁 자체가 드물었기 때문에 여섯 명이면 충분히 대규모라고 할 만했다. 다들 오랜만에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고, 헝가리에서 온 선생님 에메세와 멕시코에서 온 제시카 등 분위기 메이커들이 섞여 있어서 식사가 끝나고도 한동안 유쾌한 대화가 계속되었다.
한창 떠들썩한 대화가 이어지던 중, 거실 뒤편에서 갑자기 ‘덜컹’하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늦어 잠가놓은 뒷문을 누군가가 열려고 하고 있었다. 벌써 저녁 8시가 넘은 늦은 시간이었다.
“누구지? 순례자인가?”
한 명이 일어서서 문쪽으로 가려고 하자 다른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기다려 봐, 침입자일수도 있잖아.”
순례자들은 정말 늦어도 저녁 6시 안쪽으로는 도착하는 게 일반적이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진 않았다 하지만 정체불명의 방문객은 계속해서 거칠게 문을 흔들어대고 있었고, 결국 방에 있던 호스트가 달려 나왔다.
문이 열리자 누가 봐도 순례길을 걷는 복장의 사람이 땀과 뒤섞여 마구 흐트러진 금발을 쓸어 넘기며 문턱을 넘었다. 고생을 했는지 전반적으로 초췌해 보였지만 놀랍도록 맑게 반짝이는 눈망울은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온 얼굴에 안도와 환희를 드러내며 거실을 둘러본 순례자는 벅찬 목소리로 말했다.
“드디어!”
그 모습에는 조금 전까지 불안해하던 사람들도 긴장을 풀 수밖에 없었다. 모두 한마음 한 뜻으로 고생했을 순례자를 환영하는 가운데, 감격스러워하는 순례자의 등 뒤로 또 한 명이 들어서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실루엣이 묘하게 익숙해 보였다. 나는 긴가민가하면서도 본능적으로 계속 그쪽을 주시했다. 이윽고 그림자 속 실루엣이 얼굴을 드러냈다.
“어어?”
순간 나는 드르륵 의자를 빼며 일어났다. 기대는 했지만 예상치 못한 만남이었다. 난 팔을 들고 손을 흔들며 외쳤다.
“한나!!”
신발을 털던 한나의 눈길이 나를 향했다. 토끼눈이 됐던 한나의 얼굴에 곧 커다란 미소가 피어났다.
“잔!!”
한나는 나에게 두 팔을 활짝 펼치며 나에게 달려오다 별안간 머뭇거리며 멈춰 섰다
.
"앗 근데 나 지금 더러운데!"
“상관없어!”
난 마주 두 팔을 펼쳐 한나를 와락 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