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북쪽길 | 길은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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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니언팀과 함께 다닌 지 며칠이 흘렀다. 순례길을 걷는다는 것 외에는 이렇다 할 공통점도 없는 일곱 명이 몇 날 며칠을 붙어 다니다 보니 알게 모르게 서로 피로감이 많이 쌓였다. 특히 성격이 급한 축이었던 나와 달리아는 묵묵히 빨리 걷는 것보다 순간순간 농담하고 늦장 부리는 것을 즐기는 얀한테 지쳐있었다. 자신은 절대 지치는 법이 없는 얀의 텐션이 점점 더 버거워졌고, 결국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
구에메스에서 맞은 아침, 달리아와 앤과 나는 일찌감치 준비를 마치고 알베르게를 나와 대문 앞에서 스트레칭을 하거나 신발끈을 다시 묶으며 나머지 일행들을 기다렸다. 하지만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얀과 모리츠, 한나는 준비를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특히 얀은 알베르게 입구의 바위에 걸터앉아 신발을 신는가 싶더니 다른 순례자들과 갑자기 하이파이브하며 몇 분 동안 수다를 떨고, 가방을 닫는가 싶더니 갑자기 칫솔을 꺼내 양치를 하는 식이었다. 그 사이에 많은 순례자들이 우리에게 인사를 하며 멀어져 갔다. 먼저 떠난 순례자들의 수가 출석부 한 장을 채울 수 있을 정도로 쌓여가고 있었다. 선선했던 아침 공기가 높이 떠오른 해에 달궈지고, 우리의 얼굴에서 서서히 감출 수 없는 짜증이 드러나기 시작할 즈음에야 겨우 다 같이 출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걸으면서도 요주의 세 명은 수시로 멈춰서 장난을 치거나 여유를 부리기 일쑤였고, 갈수록 무르익는 더위에 지친 나와 달리아, 앤은 결국 그들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가버렸다.
목적지인 산티크루즈 데 베자나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방이 어느 정도 차 있었다. 얼핏 봐도 얀 일행은 이대로라면 자리를 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걱정보다는 안도감이 앞섰다. 그들을 끝까지 기다렸다면, 우리까지 침대 못 잡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씻고 나오니 앤이 숙소에서 늘 입는 원피스 차림에 가벼운 보조가방을 든 채로 입구 문 앞에 서 있었다.
“어디 가?”
“우리 방금 새로 만난 애들이랑 바에 가기로 했는데, 너도 올래?”
난 흔쾌히 그러겠다고 하고는 머리도 제대로 안 말리고 따라나섰다. 새로운 친구들은 바스크 지방에서 온 세명이었는데, 그중 한 명은 유난히 얀과 닮아 있었다. 하지만 이미 숙소도 잡고 홀가분한 상태여서 그런지 아침에 얀의 장난이 거슬렸던 것과 다르게 마냥 재밌게 받아칠 수 있었다. 그렇게 근처 바에서 맥주를 마시고 게임을 하면서 어울리고 있는데, 잠시 짐을 가지러 알베르게에 다녀온 앤이 심란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달리아가 왜 그러냐고 묻자 앤이 살짝 흔들리는 얼굴로 말했다.
“걔네 와 있어. 방금 도착한 것 같아.”
달리아는 의외라는 듯 눈이 살짝 커졌다.
“오 진짜? 오늘 여기까지 안 올 줄 알았는데. 그런데 침대가 남아 있대?”
“침대는 없는데 대신 로비의 소파에서 잘 건가 봐. 그런데… 얀이 울고 있어”
그 마지막 말에 달리아와 나도 당황해 버렸다. 얀이 울다니? 눈물은커녕 무표정조차도 잘 상상이 안될 만큼 긍정적인 얀이? 우리의 머릿속엔 같은 의문이 떠올랐다. 달리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 우리 때문이야..?”
“글쎄, 그건 모르겠는데 그냥 엄청 펑펑 울어”
왠지 미안해진 우리는 맥주 파티를 관두고 곧바로 알베르게로 향했다. 앤의 말대로 얀은 신발장 옆 벤치에 앉아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오열을 하고 있었고, 한나가 그의 머리를 안아 쓰다듬으며 달래고 있었다. 너무 서럽게 울고 있어서 약간 안쓰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사과를 해야 할까 싶어 그 앞을 서성거리다 섣불리 말을 걸면 안 될 것 같아서 조용히 자리를 피했다. 그런데 몇 시간 후 한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살짝 물어봤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응? 아, 그거 별거 아니야. 중간에 너무 더워서 바에서 다 같이 맥주를 좀 마셨는데, 이런저런 얘기하다가 너무 취해버려서 다 같이 울었어. 얀은 그게 좀 오래갔나 봐.”
뭐야, 그런 이유였어? 생각보다 싱거운 사연에 괜한 걱정이었다 싶어서 살짝 맥이 빠졌다. 한편으로는 잠시 멈춰 가더라도 함께 취하고 울고 웃으며 낭만을 더해가는 그들이 아직 경쟁과 규칙에 얽매여있던 나와 대조되어 좀 부럽기도 했다.
그날 저녁 식사도 알베르게에 모인 모든 순례자들이 모여 함께했다. 마침 누군가가 생일을 맞았고, 알베르게 호스트가 준비한 깜짝 케이크 이벤트를 시작으로 그날 밤에는 자연스럽게 파티가 열렸다. 이미 모두가 조금씩 취한 상태여서 분위기는 쉽게 달아올랐다. 알베르게 거실에는 기타와 피아노가 있었고, 충분한 술이 있었다. 얀은 울다가 지쳤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얼굴이 상기된 모리츠는 기타를 집어든 채 한쪽 발을 소파에 올린 자세로 현란하게 기타를 쳤다. 맞은편에는 목까지 벌겋게 된 달리아가 두 손으로 잔을 들이키며 웃고 있었고, 낯선 얼굴의 다른 친구들도 다 같이 웃고 떠들며 이성의 끈을 잠시 놓았다. 시끌벅적한 광란의 밤이었다. 즐겁고 충만했지만 침대에 몸을 누이며 난 어떤 결심을 굳혔다. 다음날 아침, 난 아침에 친구들에게 혼자 가겠다고 말했다. 혹시나 서운해하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친구들은 쿨하게 알겠다며 다음에 보자고 말했다. 그렇게 칸타브리아에 들어선 후 처음으로 난 혼자서 알베르게를 나섰다.
혼자가 되니 자연스럽게 새로운 친구들과 이야기를 할 시간이 많아졌다. 서너 시간쯤 걸었을 때 길가에 기다란 통나무가 하나 보여서 거기 앉아서 쉬고 있자니 전날 알베르게에서 만났던 친구들이 하나둘 나타나더니 곁에 앉았다. 함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던 중, 멀리서 전부터 몇 번 마주쳤던 순례자 마틴이 다가왔다. 그는 통나무 옆에 배낭을 내려놓더니 그 위에 기대어 누워 우리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우리는 각자 어디서 순례를 시작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북쪽길의 가장 흔한 출발지는 이룬이었지만 다른 곳에서 시작하는 순례자들도 많아서 처음 만난 순례자들끼리 자주 하는 대화 주제 중 하나였다. 내가 이룬에서 시작했다고 말하자 마틴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비스듬하게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도 너랑 이룬에서 같은 날 출발했어. 너 나 기억 안 나?”
난 순간 당황했다.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따금 길에서 마주쳤을 때 모리츠나 달리아가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만이 어렴풋이 떠오를 뿐이었다.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있자 그는 웃음 띈 얼굴 그대로 말했다.
“이룬에서 크리스랑 만타스 부녀를 만났었어. 너도 그 친구들 알지?”
첫날 같이 걸었던 친구들의 이름을 듣고서야 난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오 너 정말 거기 있었구나! 진짜 신기하다!”
첫날 함께 시작한 사람들은 대부분 나를 앞질러 갔거나 순례길을 떠났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남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룬 알베르게에서 난 유일한 동양인이었고, 그때만 해도 특별히 눈에 띄는 특징이 없는 이상 외국인들의 얼굴을 전혀 구분하지 못했으니 내가 그를 못 알아보고, 그가 날 알아본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얼굴만 아는 수많은 순례자 중 한 명에 불과했던 마틴이 마치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반갑고 친근해졌다. 며칠 동안 동행과 함께 걷다가 막상 혼자가 되니 헛헛함과 허전한 느낌이 어쩔 수 없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인연은 색다른 성격의 소속감을 주었다. 이 길을 걷는 이상 모두가 인연의 끈으로 이어져 있었다. 어떤 끈은 유독 굵고, 어떤 끈은 길거나 짧지만 어떻게든 서로가 연결되어 있었다. 마틴과의 만남은 매 순간 함께 있지 않더라도 어떤 날, 어떤 장소에서 잠시 함께 있던 시간만으로도 동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함께 걷기 위해 꼭 붙어있을 필요는 없었다.
이는 더이상 함께하지 않게 된 어니언팀 친구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칸타브리아를 지나며 사실상 어니언팀은 해체되었다. 실리언은 조금 일찍 이탈리아로 돌아갔고, 다른 친구들도 점차 서로 거리가 벌어졌다. 하지만 그것이 곧 그들과의 인연이 끊긴 일은 아니었다. 칸타브리아 다음 지역인 아스투리아스는 헤어짐과 재회의 연속이었다. 난 주로 혼자서 걸었지만 비교적 속도가 비슷했던 달리아, 앤 일행과는 혼자가 된 이후에도 종종 마주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식당에서 야외석에서 점심을 기다리던 나를 마침 길을 지나치던 달리아와 앤이 발견해서 함께 점심을 먹은 적도 있었고, 우연히 알베르게에서 만났을 때는 마을축제를 함께 구경하기도 했다. 한 번은 같은 숙소에서 함께 출발해 걷다가 아침 식사를 하러 바에 들어갔다. 길보다 살짝 아래쪽에 건물이 있어서 차례로 내려가고 있는데, 갑자기 가게 안에서 먼저 들어간 달리아의 비명 소리와 다른 사람들의 환호 소리가 터져 나왔다. 영문을 몰라 멈칫했을 때 문 밖으로 익숙한 얼굴이 빼꼼 나왔다. 나와 앤을 발견한 얀은 환한 얼굴로 양팔을 쫙 펼치며 소리쳤다.
“어니어어언!!!!!”
그제야 앤과 나도 소리를 지르며 달려 내려가 바 안으로 뛰어들어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을 얼싸안으며 재회의 기쁨을 만끽했다. 예상치 못한 만남은 더 큰 반가움을 안겨줬고, 함께한 다른 시간들보다도 더 특별한 기억으로 남았다.
헤어졌던 친구들과 다시 만나기를 반복하다 보니 같은 길을 걷는 한 언제든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이 자리 잡았고, 이 믿음은 혼자 걷는 시간의 외로움도 든든하게 채워주었다. 하지만 길에서 만난 친구들 중 마지막까지 만날 가능성을 안을 수 있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꽤 많은 순례자들이 끝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 순례를 마무리 짓고, 끝까지 가더라도 속도 차이가 많이 나면 결국엔 격차가 며칠 씩 벌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루트에 따라서 아예 길이 갈라져 버리기도 한다.
내가 갔던 북쪽길에도 중요한 갈림길이 있다. 아스투리아스를 절반정도 가면 나오는 비야비시오사 마을에서 조금 더 가면 어떤 집을 중심으로 완전히 다른 길로 갈라지는 지점이 나온다. 왼쪽으로 가면 최초의 길, 까미노 프리미티보의 시작점인 오비에도가 나오고, 이후에는 높은 고도의 산길이 이어진다. 오른쪽으로 가면 해안도시인 히혼이 나오고, 바닷길을 따라가는 북쪽길이 이어진다. 같이 북쪽길을 걷던 사람들도 이 날을 기점으로 길이 달라져서, 비야비시오사의 알베르게에서는 작별의 장면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나도 몇 명의 정든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때까지도 나랑 페이스가 비슷해 종종 만났던 마틴은 오비에도로 가서 프리미티보 길을 걸을 예정이라고 했다. 내가 히혼 방향으로 갈 거라고 말하자 그는
“왜? 프리미티보 길이 그렇게 예쁘대! 너도 오비에도로 가자!”
라고 권했다. 하지만 난 내 무거운 배낭으로 프리미티보의 산길을 걸을 자신이 없었다.
“아냐, 난 바다를 더 보고 싶어. 사실 등산을 그렇게 할 자신도 없고. 음… 우리 이제 마지막이려나?”
마틴은 아쉬운 기색이었지만 내 마지막 말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닐 거야.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날 두고 봐. 우린 또 만날 거야. 그런 예감이 와.”
확신할 수 없는 예감일 뿐이었지만 무언가 힘이 실려있는 말이었다. 마틴과는 그렇게 “마지막 날 보자”는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비야비시오사의 알베르게에는 얀과 한나도 와 있었다. 얀은 갈림길로 향하지 않고 순례를 마무리짓는다고 했다. 너무 활발해서 첫인상은 정신없고 곁에 있기 힘든 사람이었지만 여러 날을 함께하며 정이 들었는지 이제 독일로 돌아간다는 소식이 아쉬웠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내 표정을 읽었는지 얀은 이게 끝이 아닐 거라며 다시 만나자고 듬직하게 인사해 줬다. 처음으로 얀이 나보다 어른임을 느꼈던 순간이었다. 생각해 보면 평소의 활발함은 주변 사람들에게 힘을 주려던 그 나름의 노력이었을지도 몰랐다.
이튿날이 밝았고, 순례자들이 하나 둘 길을 나섰다. 누군가는 어디로 갈지 알고 있었고, 갈림길에서 즉흥적으로 정하겠다는 이들도 종종 있었다. 난 홀로 갈림길을 맞이했다. 갈림길에는 탁자가 하나 놓여 있었고, 그 위에 누군가가 주스나 주전부리 같은 것을 준비해 놓았다. 행운을 바라는 문구와 함께. 난 그 문구를 읽고는 망설임 없이 히혼으로 향하는 오른쪽 갈림길로 들어섰다. 그곳에서의 새로운 만남을 상상하며, 그리고 뜻밖의 재회를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