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7. 낭만 농도 200%의 어느 날

산티아고 북쪽길 | Laredo에서 Noja

by 이끼레몬소르베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mosslemonsorbet/11



이튿날 눈을 뜨니 이제껏 쌓인 피로가 다 달아난 듯 개운했다. 뭉쳤던 어깨와 다리에 결림이 사라졌고, 새로 태어난 것처럼 정신도 맑았다. 하루를 함께 보낸 일행들 사이도 한결 편안하고 친밀해졌다. 잊지 못할 저녁을 선사해 준 산장에 고마운 마음을 담아 손을 흔들어준 후, 우리 일행은 산뜻한 발걸음으로 우리를 길 위로 데려다줄 버스를 타러 나섰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탁 트인 해변이 나왔다. 구름 사이로 내리쬐는 햇살이 물결에 맺혀 일렁였다. 파도에 몸을 맡기며 행복한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 자신의 키를 훌쩍 뛰어넘는 서핑보드를 질질 끌며 모래사장을 가로지르는 아이들, 맨발로 파도와 모래를 해치며 걷는 사람들이 내뿜는 활기찬 에너지가 그대로 전달되었다. 그때 모리츠가 발치에 작은 모래폭풍을 일으키며 휘적휘적 나를 앞질러갔다. 손에 신발과 양말을 든 채였다. 뒤를 돌아보니 앤도 맨발로 걷고 있었다. 그래, 이런 곳에서까지 등산화와 양말을 착실하게 갖춰 신은 모범 하이커의 복장일 필요는 없지. 난 슬며시 웃으며 멈춰 서서 신발끈을 풀었다.


중간에는 보트를 타고 바다를 가로질렀다. 작은 보트는 파도를 시원하게 가르며 질주했다. 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휘날리고, 옷자락이 시끄럽게 펄럭이게 하는 속도감이 한없이 상쾌했다. 내 맞은편에는 친구들이 나란히 앉아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모습을 담기 위해 핸드폰 카메라를 들었다. 스냅처럼 자연스러운 장면을 담으려고 했지만 그런 나를 본 친구들이 각자 포즈를 취하기 시작했다. 끄트머리에 있는 친구들이 사진에 더 잘 나오려고 몸을 점점 옆으로 기울였고, 거기에 밀린 다른 친구들이 차례로 도미노처럼 옆으로 쓰러졌다. 그런 불편한 자세로도 환하게 웃어 보이는 모습들이 우리 여행의 단면처럼 느껴졌다.



20190625_131115_2.jpg
20190625_131115_3.jpg
20190625_131115 2_4.jpg
사진에 잘 나오려고 차례로 쓰러지는 친구들. 흔들리는 배 위에서 비뚤어진 각도까지 마음에 든다.


Santoña에 도착한 후 점심을 먹으러 들어간 식당에서 난 온통 스페인어로 된 메뉴판에서 대충 느낌만으로 끌리는 메뉴를 골라 시켰다. 잠시 후 샐러드 위에 참치통조림처럼 보이는 넓적한 무언가가 올려진 음식이 나왔다. 겉보기에는 그럭저럭 먹음직스러웠다. 하지만 조금 잘라 입에 넣자마자 든 생각은 ‘아… 괜히 시켰다’였다. 비릿한 향에 기름진 흔적이 입안에 맴도는 끝맛 등은 도저히 내 입맛에 맞지 않았다. 내 표정을 본 일행들은 도리어 호기심을 보이며 저마다 포크로 내 음식을 조금씩 떠먹었는데, 얀과 모리츠는 입에 넣자마자 ‘음!’이라며 눈을 빛냈다. 독일에서는 이런 맛의 페이스트를 아침마다 빵에 발라먹곤 한다며 갓 지은 밥 퍼먹듯이 포크질을 쉴 새 없이 했다. 괜히 시켰나 하는 후회는 고향의 맛을 음미하는 표정들에 지워져 예기치 못한 즐거움이 되었다.



식당을 나서서 얼마간 걷다 보니 또다시 드넓은 모래사장이 나타났다. 아침부터 모래밭길만 걷다 보니 지겹기도 했고, 오후의 따가운 햇살을 가려줄 그늘도 없어서 다들 조금씩 지쳐갔다. 바다고 뭐고 필요 없으니 길만 좀 평탄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잠식해 갈 때쯤 해변의 끝자락에 작은 언덕이 나타났다. 멀리서 봤을 땐 별 특별할 것 없는 조금 야트막한 언덕처럼 보여서 신경 쓰지 않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엄청 가팔랐다. 바위와 억샌 식물들로 뒤덮여있었는데, 사람의 손이 거의 닿지 않는 듯 거칠어서 오히려 등산 스틱이 방해가 될 정도였다. 별 수 없이 양손과 양발을 모두 써서 올라야 했다. 눈앞의 장해물에만 집중해서 낑낑거리며 바위를 오르던 중 별안간 얼기설기 자란 식물들의 줄기가 사라지고 눈앞이 탁 트였다.


언덕의 꼭대기에는 크진 않지만 딱 우리 일행이 모여 앉기에 알맞은 바위가 있었다. 수평선을 바라보고 똑바로 서니 오른편에는 우리가 지금껏 지나온 해변이, 왼편으로는 우리가 앞으로 지나갈 해변이 펼쳐져 있었다. 양쪽에 시야를 가득 채우는 광대한 백사장들이 펼쳐져 있는데도 외진 곳이라 그런지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맑은 에메랄드 빛이 섞인 바다에서 일렁이는 파도와, 언덕 꼭대기에서 잔잔히, 그리고 끊임없이 불어오는 바닷바람은 더위는 물론 지금까지의 노고도 싹 데리고 가버렸다.


20190625_161938_Original.jpg
20190625_173835.jpg
(왼쪽) 험한 길 위에서 한 컷 / (오른쪽) 언덕 꼭대기에서 바라본 풍경. 반대편에도 비슷한 크기의 백사장이 펼쳐져 있었다.


먼저 올라온 한나, 실리언과 함께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며 사방을 구경하고 있자 나머지 일행들이 하나둘 꼭대기로 올라왔다. 처음에는 온 얼굴로 지친 표정을 짓던 일행들도 우리의 손가락을 따라 주변의 경치를 둘러보면 곧바로 환한 얼굴이 되었다. 얀은 그를 처음 마주쳤던 잔디밭에서 그랬던 것처럼 옆으로 드러누웠고, 앤은 양말을 벗은 다음 맨발을 쭉 뻗었다. 일행들 한가운데 앉아 있던 실리언은 가방을 열어 잠시 뒤적거리더니 길쭉한 상자를 하나 쑥 꺼내었다. 호기심 어린 눈들 속에서 열린 상자에서 나온 것은 영롱한 빛을 뿜어내는 와인 한 병이었다! 햇빛을 반사시키는 매끈한 와인병은 그 순간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모두의 입에서 진심 어린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이걸 어떻게 여기까지 들고 온 거예요! 와!”


얀은 벌떡 일어나 앉아서 실리언의 어깨를 마구 두드렸다.


“You’re a hero!”


일행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은 실리언은 살짝 수줍은 듯 웃더니 말했다.


“혹시 몰라서 챙겨 와 봤지. 하아, 난 이제 날아갈 수도 있을 거야!”


우리는 한바탕 웃으며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와인을 사이좋게 한 모금씩 마셨다. 누군가가 노래를 틀었다. 분위기와 감성을 한껏 끌어올리는 선곡이 더해지자 마치 영화 한 장면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도처에 길게 자란 풀들도 리듬에 맞춰 흔들리는 듯했다.


숙소로 가는 1시간 남짓 내내 노래는 끊이지 않았다. 얀은 등산 스틱을 양손으로 들고는 끊임없이 빙글빙글 돌며 춤을 췄다. 이따금 달리아와 모리츠도 두 팔을 펼치고 몸을 흔들었다. 한 번은 얀과 달리아, 모리츠가 돌림노래처럼 차례로 회전하는 군무를 보여주기도 했다. 앤과 실리언, 나는 무아지경으로 춤을 추는 친구들을 구경하다가, 문득 서로 눈을 마주치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한나는 항상 배낭에 넣고 다니던 핸드폰을 꺼내더니 이 모든 장면을 렌즈에 담았다. 음악과 손을 맞잡은 시간은 잔잔히 흘렀고, 공간을 이루는 모든 것들은 그에 맞춰 리듬을 타는 듯했다. 길 위의 모든 것들이 하나가 된 순간이었다. 늦은 오후의 은은한 햇빛이 살며시 우리를 감쌌다.


20190625_175018.jpg 해변 위의 한나, 얀, 앤, 모리츠, 달리아, 그리고 실리언




목적지인 노하의 알베르게는 바다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붉은 기와지붕과 흰색 벽으로 이루어진 산뜻한 건물이었다. 규모가 작진 않았지만 워낙 사람이 없고 일행들이랑만 도미토리를 공유할 수 있어서 아주 자유롭고 편안한 분위기였다. 의도치 않게 두 번 연속으로 전세 낸 것처럼 지내게 되자 마치 처음부터 계획된 mt를 온 것 같았다. 우리는 대충 짐을 갈무리한 후 저마다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해변으로 향했다. 난 수영을 할 거라는 생각을 못해서 아쉬운 대로 고등학교 때 체육복으로 갈아입었다. 해변에 도착하자마자 앤이 양손으로 허리를 짚은 자세로 외쳤다.


“물에 들어가기 전엔 스트레칭을 해야겠죠? 지금부터 요가 시간이야!”


앤의 지휘에 따라 일행들이 모래 위에 커다란 원을 그리며 섰고, 앤의 즉흥 요가 수업이 시작되었다.


“자, 모두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서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리세요…”


교육을 전공했다더니 가르치는 목소리가 자신감에 차있고 자연스러웠다. 앤과 달리아는 평소에 요가를 많이 해서인지 매끄럽게 동작을 이어갔지만 다른 친구들의 입에서는 이따금 곡소리가 흘러나왔다. 나 역시 뻣뻣한 몸을 타고난 데다, 오랫동안 걷는 생활을 하면서도 스트레칭을 전혀 하지 않았던 탓에 다리가 딱딱하게 뭉쳐있는 상태여서 절로 악소리가 나왔다. 결국 학생들의 역량 부족으로 요가 수업은 금세 끝이 났고, 대신 그 자리에 어수선한 잡담이 자리 잡았다. 갑자기 얀이 못 참겠다는 듯 벌떡 일어섰다.


“누가 먼저 바다에 도착할까!”


이어서 한나와 모리츠가 모래를 털며 일어섰고, 실리언과 나도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이미 얀과 한나는 이미 저만치 달려가는 중이었다. 수영복을 준비해 온 친구들은 가볍게 물장구를 쳤지만, 수영복이 없던 나는 혹시나 해서 챙겨 온 고등학교 때 입던 체육복 바지가 물을 머금고 무거워져 자꾸 내려가는 바람에 신경이 쓰여서 헤엄치기를 포기했다. 대신 친구들이 노는 모습을 구경했다. 얀은 물 밖으로 목만 빼꼼 내놓고는 두 손을 하늘 위로 치켜들더니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난 어이없는 표정으로 얀을 바라보았다. 똑바로 서도 종아리밖에 안 잠기는 깊이에서 왜 저러는 거지...? 얀은 두 팔을 열심히 파닥거리며 바로 앞에 있던 한나를 보며 외쳤다.


“로즈! 도와줘! 로즈!”


그러고는 머리끝까지 푹 빠져버렸다. 한나는 살짝 당황한 듯했지만 얀이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자 곧 자신의 역할을 알아차렸다.


“오오 잭, 컴백…”


... 저건 한나라서 받아줄 수 있었던 것 같다. 둘은 몇 번이고 타이타닉 놀이를 반복했다. 한동안 로즈 역할에 충실하던 한나가 별안간 표정을 바꾸더니 말했다.


“근데 그 갑판에 둘이 같이 올라갔으면 됐었잖아. 왜 잭은 굳이 빠진 거야?”




밤이 되자 거리는 바로 옆사람의 모습만 간신히 보일 정도로 캄캄해졌다. 마을은 우리밖에 없는 것처럼 엄청 조용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바닷가 쪽에 작은 바가 열려 있어서 일행은 모두 그곳으로 향했다. 노란 전구만 밝혀진 어둠 속의 저녁 만찬인 점은 어제와 비슷했지만 분위기는 한결 차분했다. 간혹 흥분한 얀이 목소리를 높이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꿈에 취한 듯 이완된 편안함이 깔린 분위기였다. 어제가 고난의 끝을 기념하는 파티였다면, 오늘은 잔잔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느긋하게 하루를 마무리하는 자리였다고나 할까. 잠시 앉아있던 달리아는 피곤해서 먼저 자야겠다며 일어나서는 일행들에게


“부에나스 노체스 Buenas noches”


라는 밤인사를 건넸다.


다들 스페인어나 영어, 얀의 경우는 독일어로 밤인사를 한바탕 외쳤고, 달리아는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잠시 가만히 멍 때리는 얼굴을 하던 앤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


“근데 한국어로는 '굿 나이트'를 어떻게 말해?

“’안녕히 주무세요’야.”


일행들은 각자 나름의 최선을 다해 발음해 보았다.


“안냐줘세이!”

“아요이죠우세…?”


음, 내가 생각해도 어려운 발음이긴 했다. 난 한 글자씩 떼서 발음을 하는 등 열심히 가르쳐줬지만 단시간에 되는 일이 아니었다. 불현듯 내가 너무 난이도가 높은 버전을 말해줬다는 것을 깨달았다.


“친구끼리는 그냥 ‘잘 자’라고 하면 돼.”


낯선 발음을 제대로 해내 보려고 저마다 고군분투하며 찌푸려졌던 친구들의 얼굴이 그제야 환하게 펴졌다. 앤은 한결 밝아진 얼굴로 나에게 ‘잘 자’라고 말해주었다. 서툰 발음으로 한 짧은 말이었지만, 우리 사이의 거리를 한 뼘 좁히기엔 충분한 길이었다. 나도 앤과 다른 친구들에게 마주 인사를 건네었다.


“잘 자.”



강우영_텍스타일 디자인 포트폴리오.jp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6. 오르락내리락 하루